알갱이들 - 제6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황보나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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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사라지고 나면 과거가 뒤늦게 부산해진다. 별뜻 없이 건넨 말은 의미심장해지고, 평범했던 표정에는 보지 못한 기색이 생긴다. 마지막 만남은 몇 번이고 되감기며 사소한 몸짓까지 증거가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죽음 이후에는 모두 설명을 요구한다. 황보나의 『알갱이들』에서 정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미의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 움직인다. 언니 유미는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비를 찾아오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현비는 번번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누군가를 오래 알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내부까지 오래 들여다보았다는 뜻이 되지 못한다. 우정도 사랑도 타인의 마음에 대한 열람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유난히 어렵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내일 다시 물어볼 수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어서, 남겨진 기억만으로 그의 마지막 마음을 복원하려 한다. 정미의 죽음에 어떤 원인을 붙이는 순간 이야기는 매끄러워질 것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매끄러운 이야기는 이해하기 편하지만 한 사람의 생은 그보다 훨씬 울퉁불퉁하다. 원인 몇 개를 찾아냈다는 이유로 그의 가장 내밀한 선택까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비의 모름에는 무책임보다 어떤 절제가 있다. 모르는 자리를 견디지 못해 그럴듯한 말로 메우는 대신, 현비는 계속 모르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런 태도는 타자를 이해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하지 않으려 했던 레비나스의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타자는 내가 충분히 이해하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며, 나의 언어와 인식 바깥을 언제나 남겨두는 존재다. 그렇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이해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도 포함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을 살아 있는 사람의 언어만으로 완성해버리지 않는 것. 『알갱이들』은 그 빈칸을 성급히 채우지 않는다.

하지만 모름은 좀처럼 그대로 놓여 있지 못해서, 남은 사람의 기억은 자꾸 그 빈자리를 향한다. 자살 사별을 다룬 Chris Shields, Michele Kavanagh, Kate Russo의 체계적 문헌고찰은 11편의 질적 연구를 분석하며, 사별자들의 경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과 행위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죄책감과 비난, 공허뿐 아니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사별자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의 행동과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죽음으로 이어졌을 법한 단서를 찾는다. 기억은 더 이상 지나간 일을 보관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수색하는 장소가 된다. 무엇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갔는지 알 수 있다면 놓쳐버린 과거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를 이해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왜’는 죽은 사람에게만 향하는 물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도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너진 세계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유 찾기는 쉽게 자기 심문으로 번진다. 가까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때 조금 더 물었다면 달라졌을까. 마지막에 했던 말을 바꾸었다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가정법이 죽음 뒤에서 생겨난다. 사랑했던 기억까지 증거물처럼 뒤집어보게 되는 시간. 죄책감에는 슬픔만큼이나 인간의 통제 욕구가 깊숙이 섞여 있다. ‘내가 막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고통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사건을 바꿀 힘이 있었다는 전제를 품는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타인은 모든 고통을 알 수 없고 한 사람의 생을 대신 지켜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막막하다. 사랑의 크기와 책임의 크기가 반드시 같지는 않은데, 죽음은 그 둘의 경계를 자꾸만 흐린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정미에게서 답을 받아내는 대신 남은 사람들의 시간을 오래 바라본다. 슬픔을 얼마나 드러내야 충분히 슬퍼한 것인지, 다시 웃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죽은 이를 덜 사랑한 것인지, 일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애도가 끝났다고 말해도 되는지. 상실 뒤의 삶에는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문제만큼이나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 삶을 다시 허락하는 문제가 있다. 황보나는 그 허락을 성대한 결심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밥을 먹고, 걷고, 누군가를 만나며, 어제 했던 일을 또 한다. 죽음을 겪었다고 해서 하루의 단위까지 장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소함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생을 이상할 만큼 질기게 만든다.

제6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들이 이 작품의 ‘알 수 없음’을 거듭 짚은 이유도 이 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지리문학상은 박지리의 작품이 보여준 인간 본질과 사회를 향한 시선과 통찰을 기억하며 새로운 소설을 발굴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알갱이들』은 그 마지막 수상작이 되었다. 한 청소년의 자살을 다루면서도 원인을 극적으로 발굴하거나 사회적 교훈으로 정돈하지 않는 선택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죽음을 소재로 삼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죽음 앞에서 작가가 가진 설명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을 쉽게 설명하지 않는 것과 인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는 듯이.

남겨진 사람의 삶을 ‘회복’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도 조금 망설여진다. 회복에는 은근히 원래의 자리라는 목적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한 뒤에도 돌아갈 수 있는 원래의 내가 남아 있을까. Rebecca Goodall, Karolina Krysinska, Karl Andriessen은 자살 사별 이후의 ‘지속되는 유대(continuing bonds)’를 다룬 체계적 문헌고찰에서 15편의 연구(질적 연구 13편, 양적 연구 2편)를 검토했다. 그 결과 사별자들은 고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기억하기, 이야기하기, 유품이나 장소를 통한 연결, 내면의 대화처럼 여러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런 유대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연결은 위안이 되고 어떤 연결은 고통을 지속시키며, 같은 사람에게도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애도는 고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놓아주었는지를 측정하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과 자신의 삶을 계속하는 일 사이에 굳이 승패를 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미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슬퍼하면서도 웃을 수 있으며, 어떤 날에는 오래 기억하고 어떤 날에는 잠시 잊을 수 있다. 그 어느 쪽도 앞선 마음을 취소하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삶은 죽은 이를 마음에서 덜어내며 이전의 크기로 돌아가는 과정보다, 그의 부재까지 들어갈 자리를 새로 만드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자리가 생기면서 사람 역시 전과 다른 모양이 된다.

다시 제목을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알갱이들. 단수가 아닌 복수로 놓인 이 말에는 처음부터 하나로 모이지 않는 마음들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알갱이는 너무 작아서 하나만으로는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없고, 여럿을 손에 올려놓아도 서로의 틈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미를 기억하는 마음도 그와 닮아 있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선명하게 남은 것과 어느새 희미해진 것이 한데 섞인 채 각기 다른 무게를 가진다. 기억은 그렇게 고르게 남지 않는다. 어떤 것은 오래도록 손끝에 걸리고, 어떤 것은 이름조차 붙이기 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남겨진 사람은 그 불균질한 조각들을 가진 채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중 무엇을 집어 들어 정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그 모든 조각을 하나의 모양으로 맞추지 않는 일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남겨두어야 한 사람을 너무 많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 될까. 『알갱이들』을 읽는 동안 완성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것들의 사이를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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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 ㅣ 트리플 37
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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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에는 목격자가 없는 시간이 얼마나 많던가. 문이 닫힌 뒤에도 하루는 계속되고, 전화를 끊은 뒤에도 마음은 한동안 그 자리에 남는다. 함께 있었다고 기억하는 날조차 서로에게 같은 하루였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그중 몇 장면을 얻는다. 한때 보았던 표정, 오래 기억한 말, 함께 지나온 장소. 그리고 그것들을 이어 한 사람을 기억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빈칸은 쉽게 잊힌다. 오래 보았다는 이유로 많이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임솔아의 소설에는 그 빈칸이 있다. 장면과 장면 사이, 기억과 기억 사이, 내가 본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시간 사이. 그 간격은 가까워진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바라볼수록 넓어진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낯선 시간이 생겨나고, 이미 지나간 날에서 전에 보이지 않던 표정이 떠오른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내가 차지하지 못한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서로 다른 방향이 함께 놓인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를 향해 다가가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려는 욕망을 품는다. 행동에는 이유를 붙이고, 표정에는 감정을 대응시키고, 반복되는 특징에는 이름을 붙이면서. 낯선 사람을 조금씩 익숙한 언어 안으로 옮겨오는 일. 언어가 촘촘해질수록 설명은 쉬워진다. 설명된 사람은 다루기도 쉬워진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생은 그 설명보다 자주 넓어진다.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이 오랫동안 익혀온 것도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세계의 문법이다. 그녀는 웃는 얼굴을 연습하고,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에게 곧바로 주어지지 않는 의미를 배우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지윤에게는 배워야 하는 언어가 된다. 반대편에는 지윤에게 너무도 선명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계가 있다. 돌아가는 물체를 오래 바라보는 마음, 일정한 움직임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같은 세계 안에서 무엇은 상식이 되고 무엇은 해명해야 할 취향이 된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감각의 옳고 그름보다 다수의 익숙함이다.

도어 벨은 돌아가고, 지윤은 그것을 바라본다. 몇 시간이고 보고 싶다는 마음에는 복잡한 설명이 없다. 계속 보고 싶어서 본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도 이런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받아내기 전에 그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 모든 감각을 번역하려 들지 않는 시간.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서둘러 빈칸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간. 사람에게는 자신의 언어로 옮길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그대로 두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렇게 남겨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했던 표정 하나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처럼.

기억은 다른 방식으로 빈칸을 만든다. 과거는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어린 도희가 보았던 얼굴과 지금의 도희가 떠올리는 얼굴 사이에는 같은 세월이 놓여 있지만, 두 얼굴의 의미는 같지 않다. 어린 눈에는 자신의 두려움이 먼저 보였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표정 안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사정이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시간이 바꾼 것은 그날의 사건보다 그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의 크기다. 어떤 기억은 아주 늦게 완성된다. 사건은 오래전에 일어났는데 그 안에 있던 마음은 수년 뒤에 도착한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보이고, 당시 확신했던 의미가 흐릿해진 자리에 다른 가능성이 들어선다. 뒤늦게 헤아린 마음으로 과거의 정답을 세울 수는 없다. 기억은 진실을 찾아내는 발굴보다 자신이 보았던 장면의 가장자리를 넓혀가는 일에 더 닮아 있다. 그 가장자리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신이 없던 곳에서도 타인의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런데 기억에는 실제로 지나온 시간만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쉴 곳」의 민영은 자신에게 없었던 시간을 기억의 자리로 불러들인다. 살아본 적 없는 장면 속에 자신을 놓아보고, 그곳에 있었을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았을지 그려본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그것을 떠올리는 마음만큼은 실제로 존재한다. 가지 않았던 길과 하지 않았던 선택, 다른 삶이 가능했다면 존재했을 자신도 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현실과 나란히 자란다. 실제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가능했으나 살아보지 못한 과거 역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눈이 된다. 사실의 증명 바깥에서도 삶을 움직이는 시간이 있다. 인간은 일어난 일만으로 자신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 또한 그런 시간을 만든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고, 가본 적 없는 방의 온도를 기억하게 하고, 경험하지 않은 상실을 한동안 자기 일처럼 품게 한다. 읽는 동안 빌려온 삶은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곁에 놓이고,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을 바라볼 때 슬며시 끼어든다. 문학이 타인의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창이라면 이 일은 너무 간단해진다. 창의 바깥은 무척이나 넓다. 소설은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앞뒤에 우리가 보지 못한 시간이 있음을 함께 감각하게 한다. 인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도 그 사람이 전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때 독자가 얻는 것은 타인에 관한 정답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삶의 넓이다. 소설은 보이는 것을 늘려주는 만큼 보이지 않는 삶의 크기도 키운다.

가까워진다는 말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기억이 있고, 설명을 들어도 체험할 수 없는 감각이 있으며, 내가 없었던 시절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몸을 기울이는 것. 알지 못하는 마음 앞에서도 손을 거두지 않는 것. 이 책에서 돌봄은 이해의 완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떨리는 손을 멈추게 할 방법을 몰라도 그 위에 손 하나를 포갤 수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읽지 못하면서도 그의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해보다 몸이 먼저 도착하는 순간. 임솔아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닿는 방식은 그런 작은 움직임 속에 있다.

책의 제목을 다시 바라보면 ‘보고 있지 않았던’이라는 말에는 묘하게 긴 시간이 들어 있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고 지금에 와서야 다르게 보이는 장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나 오래 상상함으로써 마음속에 생겨난 장면, 같은 것을 바라보고도 서로 다른 감각으로 살아낸 장면. 우리가 보고 있지 않는 동안에도 타인의 생은 계속된다. 몇 개의 표정으로 그의 마음을 완성하거나 한때의 행동으로 그의 시간을 고정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시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넓이가 된다. 어떤 장면은 오래 바라보아야 하고, 어떤 장면은 볼 수 없다는 사실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한 사람을 오래 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장면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직 모르는 시간이 더 있다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생을 완성해서 건네받지 못한다. 몇 장면을 보고, 몇 장면을 놓치고, 뒤늦게 하나를 다시 바라본다. 그 사이에도 각자의 삶은 계속된다. 보지 못했던 장면이 남아 있기에 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모습보다 언제나 조금 더 넓다.

✏️도서출판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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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페이지
홍승완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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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이면 한 달 동안 읽은 책을 한자리에 모은다. 몇 권을 읽었는지 세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책을 추리고, 짧게라도 기록을 남긴다. 그렇게 한 달의 독서를 숫자와 제목으로 정리하다 보면 목록과 기억이 꼭 같은 순서로 놓이지는 않는다. 분명 완독한 책인데도 금세 흐릿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달 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이 아무 때나 불쑥 되돌아오기도 한다. 읽은 권수는 정확히 셀 수 있지만 한 권이 사람 안에서 지속되는 시간에는 마땅한 단위가 없다. 독서가 쌓이는 일과 깊어지는 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그리고 독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수많은 문장을 지나온 뒤에도 이전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시간은 어디에 쌓이는 것일까. 홍승완의 『터닝 페이지』는 30년에 걸친 독서와 500편의 서평에서 건져 올린 경험을 서른두 가지 독서 수업으로 풀어낸다. 정독, 문독, 심독, 재독, 교독을 거쳐 기록과 서평, 문장 수집과 필사, 체독에 이르는 과정은 한 권을 읽고 소비하는 시간보다 오래 품으며 관계 맺는 쪽에 무게를 둔다. 저자가 구분하는 ‘창고형 독서’와 ‘도끼형 독서’도 독서의 양과 깊이가 언제나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많은 지식을 차곡차곡 저장한 뒤에도 익숙한 사고의 테두리는 그대로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단 한 줄이 오래된 믿음을 건드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세계를 바라보던 방향을 조금 틀어놓는다. 독서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했는지보다 읽기 이전의 자신과 얼마나 다른 자리까지 이동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책이 품은 세계 위로 독자가 살아온 삶이 겹쳐질 때 의미도 달라진다. 이해는 그 만남 속에서 계속 새로워진다.

책을 ‘거울과 창문’으로 바라보는 심독은 시선을 바깥과 안쪽으로 동시에 움직인다. 창문 너머에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가 있고, 거울에는 그 앞에 선 독자가 비친다. 낯선 삶을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는 것이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는 모습도 이와 닮았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히 지나갈 한 줄이 다른 사람에게는 페이지를 오래 넘기지 못하게 한다. 책에서 무엇을 골라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고른 사람의 일부도 함께 나타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 역시 자신의 일부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자기 이해에는 타인의 언어가 끼어든다. 마음속에서 이름을 얻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이 낯선 이야기를 경유한 뒤 처음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펼치면 밑줄은 어느새 당시의 독자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갈 문장 아래 여러 겹의 선이 그어져 있고, 현재라면 놓치지 않았을 대목은 아무 표시 없이 남아 있기도 한다. 글자는 그 자리에서 한 글자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책 앞에 다시 앉은 사람에게는 몇 년치 삶이 더해졌다. 경험이 늘고 가치의 순서가 달라지면 같은 말이 닿는 자리도 달라진다. 재독에서는 익숙한 내용과 과거의 자신을 함께 마주한다.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이전의 독자와 지금의 독자가 나란히 놓인다. 새롭게 발견한 의미에는 책이 처음부터 품고 있던 가능성과 그동안 살아낸 삶이 함께 스며 있다. 모든 독서는 자신이 서 있는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페이지를 다시 펼칠 때마다 처음 그곳을 지난 뒤 살아온 몫까지 함께 얹힌다.

‘반려 고전’과 ‘반려 작가’는 한 번의 독서를 여러 시절로 이어준다. 오랜 시간 같은 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한 권 위에 자신의 여러 시절을 차례로 포개는 일이기도 하다. 스무 살의 밑줄과 서른 살의 밑줄이 다른 자리에 놓이고, 그 차이가 다시 다음 독서를 기다린다. 첫 번째 완독에서 남겨둔 몫은 다음 만남으로 넘어간다. 당시에는 살아보지 못해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목이 훗날 자신의 경험과 맞물리고, 오래 곁에 둔 한 권에서는 그때마다 새롭게 발견할 자리가 생겨난다. 그렇게 반려하는 책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조금씩 포개진다.

읽은 것을 기록하는 일은 완독 뒤의 독서를 조금 더 이어간다. 밑줄 친 부분을 따로 옮겨두고 그 옆에 떠오른 생각을 적는다. 다시 서평으로 풀어내다 보면 처음에는 형태조차 없었던 생각도 조금씩 윤곽을 갖춘다. 머릿속에서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여겼던 내용도 글로 옮기려 하면 쉽게 막힌다. 무엇이 좋았는지, 무엇이 불편했는지, 왜 하필 그곳에서 오래 시선이 멎었는지 설명하려면 감상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앞장을 다시 펼친다. 멀리 떨어져 있던 대목을 이어보고 처음 품었던 해석도 고쳐 쓴다. 완독 표시 뒤에서 시작되는 또 하나의 독서다. 저자가 서평을 통해 ‘그 책’을 ‘내 책’으로 만든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연장과 맞닿아 있다. 타인의 언어는 자신의 경험을 거치는 동안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미 알고 있던 것과 맞대어보면 동의했던 생각이 의심스러워지고, 처음의 반박을 거두는 일도 생긴다. 기록은 그렇게 타인의 언어가 자신의 사유를 통과할 자리를 만든다. 쓰는 동안 흩어진 생각에는 순서가 생기고 멀리 있던 의미끼리 연결된다. 문장 수집 역시 아름다운 문구를 보관하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오랫동안 모은 것들을 한꺼번에 펼쳐보면 취향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 거듭 선택한 말들 사이에는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와 오래 생각해온 문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타인의 책에서 골라낸 것들이 한 사람의 사유가 지나온 자리를 기록하는 셈이다.

『터닝 페이지』의 독서는 마지막에 ‘체독(體讀)’으로 향한다.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손으로 옮겨 쓰고 소리 내어 되짚으며 책의 언어를 몸과 생활 가까이 가져온다. 앎과 삶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문장을 읽는 것과 실제 관계 속에서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은 다르고, 익숙한 편견을 의심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일도 다르다. 머리에서 이해한 것이 삶의 태도에 스며들기까지 그 거리를 건너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자신이 안다고 여겼던 것을 실제 관계 안에서 다시 확인한다. 판단의 속도가 조금 늦어지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며, 이전에는 지나쳤던 것을 알아차리는 변화도 그 과정에서 생겨난다. 지식이 반복되는 판단과 선택을 지나 습관에 스며들수록 책에서 배운 것은 생활의 일부가 되어간다.

다음 월말에도 읽은 책의 권수를 세고 한 달의 독서를 정리할 것이다. 숫자로 남은 기록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좋은 기준이 된다. 다만 그 목록에는 적히지 않는 독서도 있다. 지난달 읽었지만 이번 달에도 계속 생각한 책, 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펼쳐본 페이지, 몇 년 뒤에도 돌아가고 싶은 문장, 출처를 찾아야 할 만큼 생각 속에 오래 섞여버린 말들이다. 완독한 날짜는 적을 수 있어도 그 책을 마지막으로 생각한 날까지 기록할 수는 없다. 목록을 정리한 뒤에도 계속되는 독서가 있다.

『터닝 페이지』라는 제목은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작은 동작보다 조금 긴 시간을 품는다. 페이지는 손끝에서 몇 초 만에 넘어가지만 그곳에서 만난 말이 생각을 거쳐 삶의 태도에 닿기까지는 훨씬 오래 걸린다. 어떤 페이지는 넘긴 뒤에 더 오래 읽힌다. 밑줄 속에서 되살아나고, 기록을 거치며 다시 쓰이고, 몇 년 뒤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펼쳐진다. 한 권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 순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면, 그때 넘어간 것은 종이 한 장만이 아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난 뒤에도 이어지는 시간이 있다. 어쩌면 한 권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그 시간을 오래 살아보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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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 기업가, 예언자, 감독 그리고 왕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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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은 작아진다. 한 시대의 방향을 설명하는 자리에는 지리와 자원, 제도와 기술, 전쟁과 경제처럼 개인의 의지보다 오래 지속되는 조건들이 놓인다. 『총, 균, 쇠』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바라본 세계도 그러했다. 문명의 격차를 몇몇 영웅의 탁월함으로 설명하는 대신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인간보다 오래 남는 환경과 구조를 살폈다. 『리더는 언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에서 그의 시선은 거대한 문명으로부터 한 사람에게로 좁혀진다. 대통령과 CEO, 스포츠 감독과 종교 지도자를 차례로 불러내며 그는 묻는다. 수많은 조건이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도 한 사람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시대의 흐름이 사람을 선택하는 순간과 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다이아몬드는 이 문제를 ‘햄릿 테스트’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으로 풀어간다. 셰익스피어가 일찍 죽었다면 동시대의 다른 극작가가 『햄릿』을 쓸 수 있었을까. 이 가정을 정치와 기업으로 옮기면 익숙한 위대함의 기준이 흔들린다. 스티브 잡스가 없었더라도 스마트폰은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고, 제프 베이조스가 없었더라도 온라인 유통 시장은 성장했을 것이다. 반면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처럼 특정한 신분과 능력, 시대적 조건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다른 누군가로 쉽게 교체하기 어렵다. 다이아몬드에게 중요한 것은 성취의 크기보다 그 사람을 역사에서 지웠을 때 생겨나는 차이다. 유명한 사람과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위대한 인물’을 기억하는 방식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대체 불가능했다는 판단 역시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추론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사라진 또 하나의 역사를 살아볼 수는 없다. 『햄릿』이 없는 세계에서 또 다른 걸작이 태어났을 가능성도, 잡스가 없는 세계에서 스마트폰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확인할 길이 없다. 한 사람을 지워보는 사고실험은 그래서 역사의 정답을 알려주는 장치보다 인과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로 읽을 때 더 매력적이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너무 쉽게 필연처럼 보인다. 성공한 기업 뒤에서 탁월한 CEO를 찾고, 승리한 팀에서 명장을 발견하며, 번영한 국가의 중심에 위대한 지도자를 세우는 일도 그렇다.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향해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이 자연실험과 통계까지 동원해 개인의 영향력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꽤 의미심장하다. 성적이 나빠진 팀이 감독을 교체한 뒤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새 감독이 반등의 원인이라고 곧바로 말할 수는 없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성적이 평균으로 회귀했을 수도 있고, 선수의 부상이나 일정, 상대 팀의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조직학자 제임스 마인들(James R. Meindl), 샌퍼드 얼리치(Sanford B. Ehrlich), 재닛 듀커리치(Janet M. Dukerich)는 1985년 논문 「The Romance of Leadership」에서 사람들이 조직의 복잡한 성과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을 하나의 강력한 인과적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살폈다. 이들은 국가와 산업, 기업의 성과 변화와 리더십에 대한 관심을 비교하고 일련의 실험을 거쳐, 조직의 현실을 설명할 때 리더의 영향력을 두드러지게 인식하는 경향을 ‘리더십의 낭만화’라는 관점으로 해석했다. 한 사람의 힘을 실제보다 크게 평가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수많은 변수가 얽힌 조직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리더’라는 인물을 인과의 중심에 세우는 방식에 주목한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원인보다 한 명의 주인공을 기억하기 쉽다. 수십 개의 조건이 겹쳐 일어난 성공에는 영웅의 이름을 붙이고 실패에는 책임질 사람의 얼굴을 찾는다. 구조는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인간에게는 성격과 선택, 욕망과 결단이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개인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그리는 까닭에는 세계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서사적 습관도 섞여 있다.

그렇다고 개인이 구조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이아몬드가 여러 분야의 리더를 비교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그 사람에게 허락된 선택의 범위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이미 제도가 단단히 굳어진 조직과 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조직에서 전혀 다른 영향력을 갖는다. 대통령, CEO, 감독이라는 직함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에 있다. 여기에서 책이 말하는 ‘재량권’은 자유에 관한 문제와도 맞닿는다. 자유를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로 상상하기보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들의 범위로 바라본다면,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차이 역시 그 범위와 함께 커지고 작아진다. 자유는 의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의지가 현실의 결과로 이어지려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이 함께 주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량권은 개인의 자유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멀리 뻗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은 책임의 크기와도 연결된다. 더 많은 가능성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고른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개인과 구조 중 어느 한쪽만 남기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뛰어난 능력만으로 시대를 움직일 수 없고, 강력한 시대적 흐름만으로 모든 결과가 미리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진 능력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와 우연히 맞아떨어진 시간이 함께 작동한다. 카마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레이철 카슨의 언어를 받아들일 사회적 토양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면, 뛰어난 CEO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조직에 놓였다면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역사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성취 안에는 언제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대의 몫이 들어 있고, 시대의 흐름 안에도 특정한 순간 누군가가 선택한 몫이 스며 있다. 역사는 인간과 조건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기는 과정이라기보다 둘이 잠시 같은 시간에 포개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방향을 얻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리더의 능력을 몇 가지 자질로 정리하는 일보다 ‘언제’라는 제목 속 한 단어가 훨씬 중요해진다. 제목에 ‘언제’가 붙는 순간, 관심은 리더가 지닌 고정된 자질에서 그 자질이 실제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조건과 시기로 옮겨간다. 결국 리더의 영향력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의 선택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었던 순간까지 함께 살펴야 비로소 가늠할 수 있다. 다만 햄릿 테스트가 언제나 충분한 답에 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망설여진다. 대체 가능성을 판단하는 순간에는 필연적으로 가정이 개입하고, 정치와 종교처럼 수많은 변수가 얽힌 역사에서 자연실험이 모든 조건을 깨끗하게 분리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이 방법은 한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찬사와 비난을 몰아주던 시선에 제동을 건다. 누군가의 성공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능력만큼 그 능력이 작동할 수 있었던 환경을 함께 보고, 실패를 바라볼 때도 한 개인의 결함만큼 그가 움직일 수 있었던 범위를 살피게 한다.

『총, 균, 쇠』의 두께와 밀도 때문에 재레드 다이아몬드와의 만남을 망설였던 독자라면 이번 신작 역시 선뜻 펼치기 어려울 수 있다. 직접 읽어보니 이번 책은 조금 다른 다이아몬드를 만나는 경험이었다. 정치에서 기업으로, 스포츠에서 종교로 사례가 이동하고 하나의 물음을 여러 영역에서 반복해 시험하기 때문에 긴 논의를 따라가는 부담도 전작보다 덜했다. 무엇보다 거대한 문명의 흥망보다 사람 한 명의 선택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일상의 감각과 맞닿는 부분이 많다. 『총, 균, 쇠』가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조건을 바라보도록 시야를 넓혔다면, 이번 책은 그 넓어진 풍경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의 자리를 찾아간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고 난 뒤에도 인간의 선택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이유. 그 사이에서 한 사람이 차지하는 몫을 가늠해보는 일이 이 책을 읽는 가장 긴 사유가 된다.

✏️도서출판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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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
플로렌스 냅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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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세상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골라둔 몇 글자를 건네받고, 그것을 평생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이름에는 그것을 고른 사람의 바람과 기억도 스며든다. 누구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 한 집안이 오래 보존해온 역사까지. 이름을 물려준다는 행위에는 한 사람을 부르는 일을 넘어 그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먼저 건네는 의미가 있다.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생 앞에 놓이는 최초의 서사. 플로렌스 냅의 『이름들』은 바로 그 몇 글자에서 세 개의 삶을 펼친다.

1987년, 코라는 어린 딸 마이아와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다. 남편은 집안의 남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진 자신의 이름 ‘고든’을 아들에게도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코라는 베어와 줄리언이라는 두 이름을 함께 떠올린다. 다정하고 용감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이름,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 자기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름. 출생신고서에 적힐 몇 글자를 앞에 두고 하나의 삶은 세 갈래로 나뉜다. 베어, 줄리언, 고든. 같은 날 태어난 같은 아이는 서로 다른 가족의 시간을 통과하며 다른 사랑을 만나고, 다른 상처를 입고, 다른 어른이 된다. 작명이라는 작은 선택을 세 개의 생으로 확장하는 순간, 소설 속 이름은 한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움직이는 첫 번째 사건이 된다.

세 갈래의 생을 따라가다 보면 ‘만약’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삶의 문법 안으로 들어온다.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몇 분 먼저 혹은 늦게 도착했다면. 현재의 삶 뒤편에는 실현되지 않은 선택들이 셀 수 없이 겹쳐 있다. 『이름들』은 그 가능성 가운데 더 나은 생을 골라내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 삶에는 저마다 사랑과 상실, 다정함과 두려움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찾아온다. 어느 이름이 더 행복한 삶을 만들었는지 비교하려는 마음은 차츰 힘을 잃는다. 대신 지금의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관계의 교차 속에서 만들어졌는지가 드러난다. 현재의 나는 예정된 하나의 결과물보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이름은 운명을 결정하는 주문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같은 아이에게 붙은 세 이름은 각기 다른 관계와 기대를 불러들이고, 그 관계는 다시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스며든다. 로코 콸리아, 클라우디오 롱고바르디, 마누엘라 멘돌라, 라우라 엘비라 프리노는 「Names in Psychological Science: Investigating the Processes of Thought Development and the Construction of Personal Identities」(「심리학에서의 이름: 사고 발달 과정과 개인 정체성의 구성에 관한 탐구」)에서 이름을 개인 정체성의 형성과 연결해 살피며, 관계체계의 관점에서 개인의 이름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표상하는 기표로 바라본다. 이름은 몇 글자의 소리만으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선택했으며, 그 이름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불려왔는가와 함께 의미를 얻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베어’에는 누군가가 바란 용기와 다정함이, ‘줄리언’에는 또 다른 미래를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고든’에는 세대를 거쳐 보존되어온 가족의 역사가 포개진다. 같은 아이를 가리키는 세 이름에는 이미 서로 다른 관계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름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언어가 될 수 있으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까지 삶의 일부로 불러들인다.

그중에서도 코라의 작명은 이 소설에서 가장 절박한 선택으로 읽힌다. 아이의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단지 예쁜 몇 글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어떤 역사를 이어주고 어떤 역사로부터 아이를 떨어뜨려놓을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할 수 없고, 아이 대신 미래를 살아줄 수도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 안에서 무엇을 건네고 무엇을 건네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다. 그래서 출생신고서 앞에 선 코라의 망설임에는 미래를 통제하려는 욕망보다 한 아이에게 자기 삶을 살아갈 여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다. 작명은 이 순간 축복이면서 저항이고, 사랑이면서 책임이 된다.

이름에서 시작된 상속의 문제는 이내 삶을 이루는 더 넓은 영역으로 번져간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건네는 것은 성과 이름만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두려움에 반응하는 태도, 가족 안에서 익힌 침묵과 기대,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되어 전해진다. 가족은 인간이 처음 사랑을 배우는 장소이며 동시에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처음 습득하는 장소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이후의 삶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의 세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속은 그렇게 삶의 태도와 기억, 관계를 맺는 방식의 세습으로 범위를 넓혀간다.

세정 양, 양진 박, 파 토르는 「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Family Violence: A Narrative Review of Pathways from Childhood Exposure to Family Violence to Adult Intimate Partner Violence Perpetration」(「가족폭력의 세대 간 전승: 아동기 가족폭력 노출에서 성인기 친밀한 파트너 폭력 가해로 이어지는 경로에 관한 내러티브 리뷰」)에서 어린 시절 가족폭력에 노출된 경험과 성인기의 친밀한 관계 폭력 가해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을 기존 연구들을 통해 검토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의 전승이 하나의 직선적인 경로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학습 과정뿐 아니라 감정 조절, 관계를 해석하는 인지 방식,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맥락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한다. 가족 안에서 폭력을 경험했거나 목격했다는 사실은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미래의 행동을 하나의 방향으로 확정하지는 않는다.

『이름들』의 세 갈래 구조는 이 복잡성을 문학의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삶도 어떤 관계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는가에 따라 물려받은 것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변형한다. 가족에게서 전해진 역사와 기억은 한 사람 안에 흔적을 만들지만, 그 흔적을 어떤 방식으로 읽고 살아갈지는 계속 달라질 수 있다. 물려받은 것은 삶의 조건이 될 수 있어도 완성된 운명은 아니다. 주어진 환경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한 인간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이러한 상속의 문제를 강렬한 이미지로 옮겨놓는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다음 세대를 독립된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래된 욕망이 새겨져 있다. 부모가 자신의 가치와 질서를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순간, 사랑과 소유의 경계는 쉽게 흐려진다. 자신의 삶을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이 아이의 삶을 자신의 연장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변할 때, 다음 세대가 자기 몫의 존재가 될 공간은 좁아진다. 이름의 세습 역시 이러한 긴장 속에 놓인다. 물려준다는 말에는 다정함이 있지만, 무엇을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명령이 숨어들 때 상속은 무게가 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언제나 같은 의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가에 따라 같은 그림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작품 속 사투르누스가 지닌 의미 역시 한 번의 해석으로 닫히지 않는다. 그림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변하고, 달라진 시선은 다시 그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름들』이 세 개의 삶을 병치하는 방식도 이와 닮아 있다. 같은 이름과 같은 기억조차 어떤 생의 자리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그래서 상속의 반대말은 망각보다 선택에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지워내는 일보다 그 가운데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자신의 대에서 멈출 것인지 결정하는 일. 인간은 태어날 가족도, 처음 자신에게 붙여질 이름도, 어린 시절 자신을 둘러싼 세계도 고를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평생 같은 형태로 보존해야 할 의무까지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것을 해석하고 다시 배열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자기 삶의 몫을 만들어간다. 이름은 타인에게서 받은 최초의 문장이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살아가는 사람의 선택과 관계 속에서 계속 달라진다.

그렇다면 베어와 줄리언과 고든 가운데 누가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일까. 세 삶을 나란히 바라볼수록 어느 하나를 원본으로 세우기는 어려워진다. 인간 안에 하나의 완성된 자아가 먼저 존재하고 환경이 그것을 꺼내놓는다고 보기에는 세 삶이 너무 다채롭게 갈라진다. 관계가 달라지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랑과 상처의 경험이 달라지면 세계에 응답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핵을 보존하는 일보다 세계와 관계 맺으며 계속 형태를 얻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세 개의 이름은 세 개의 운명을 확정하기보다 한 사람 안에 존재할 수 있었던 서로 다른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낸 삶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은 삶의 결과를 확인할 수 없고, 다른 길의 자신과 만나 어느 쪽이 더 행복했는지 비교할 수도 없다. 『이름들』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현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그 비교를 잠시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 개의 삶을 모두 바라본 뒤에도 정답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의 생을 하나의 선택이나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생 역시 지금의 삶 주변에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하며, 지금의 자신 또한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모습이다.

처음 주어진 이름에는 타인의 바람과 가족의 역사,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가 함께 놓여 있다. 그러나 이름이 한 사람의 첫 문장이 될 수는 있어도 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정해둘 수는 없다. 삶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이어 쓰는 과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이해하고, 그중 무엇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며, 무엇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도 삶을 이룬다. 『이름들』이 세 개의 이름과 세 개의 생을 통해 펼쳐 보이는 가능성은 결국 그곳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미 쓰인 문장에서 시작하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니다.

✏️도서출판 문학동네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에는 그를 부르는 이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의 역사와 기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미래까지 함께 들어선다. 『이름들』은 세 개의 이름에서 세 갈래의 생을 펼쳐 보이며, 우리가 현재의 자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관계와 선택을 통과해왔는지를 섬세하게 더듬는다. 선택하지 않은 삶은 사라지는 대신 가능성의 형태로 현재의 나를 둘러싸며, 지금의 자신 역시 수많은 갈림길 가운데 현실이 된 하나의 모습임을 보여준다.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를 한 번쯤 상상해본 독자, 정체성과 자유의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세 삶이 갈라지는 순간마다 자신의 가능성까지 겹쳐 읽게 될 것이다.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기억과 관계, 사랑과 상처가 한 인간에게 어떤 흔적을 새기는지 탐구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더욱 깊이 읽을 만하다. 무엇을 물려받았는가에서 시작해 그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로 사유를 확장하는 작품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온 것들 가운데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자신의 삶에서 멈출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까지 세밀하게 응시한다. 이토록 치밀한 구조와 넓은 감정의 진폭을 한 권 안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플로렌스 냅의 소설 데뷔작이라는 점을 더욱 놀랍게 만든다. 한 작가의 첫 장편에서 이미 완성된 세계를 발견하는 경험을 기다려온 독자에게, 『이름들』은 플로렌스 냅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강렬한 첫인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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