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갱이들 - 제6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황보나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누군가가 사라지고 나면 과거가 뒤늦게 부산해진다. 별뜻 없이 건넨 말은 의미심장해지고, 평범했던 표정에는 보지 못한 기색이 생긴다. 마지막 만남은 몇 번이고 되감기며 사소한 몸짓까지 증거가 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죽음 이후에는 모두 설명을 요구한다. 황보나의 『알갱이들』에서 정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미의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 움직인다. 언니 유미는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비를 찾아오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현비는 번번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누군가를 오래 알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내부까지 오래 들여다보았다는 뜻이 되지 못한다. 우정도 사랑도 타인의 마음에 대한 열람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유난히 어렵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내일 다시 물어볼 수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어서, 남겨진 기억만으로 그의 마지막 마음을 복원하려 한다. 정미의 죽음에 어떤 원인을 붙이는 순간 이야기는 매끄러워질 것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매끄러운 이야기는 이해하기 편하지만 한 사람의 생은 그보다 훨씬 울퉁불퉁하다. 원인 몇 개를 찾아냈다는 이유로 그의 가장 내밀한 선택까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비의 모름에는 무책임보다 어떤 절제가 있다. 모르는 자리를 견디지 못해 그럴듯한 말로 메우는 대신, 현비는 계속 모르는 사람으로 남는다. 이런 태도는 타자를 이해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하지 않으려 했던 레비나스의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타자는 내가 충분히 이해하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며, 나의 언어와 인식 바깥을 언제나 남겨두는 존재다. 그렇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이해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도 포함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을 살아 있는 사람의 언어만으로 완성해버리지 않는 것. 『알갱이들』은 그 빈칸을 성급히 채우지 않는다.
하지만 모름은 좀처럼 그대로 놓여 있지 못해서, 남은 사람의 기억은 자꾸 그 빈자리를 향한다. 자살 사별을 다룬 Chris Shields, Michele Kavanagh, Kate Russo의 체계적 문헌고찰은 11편의 질적 연구를 분석하며, 사별자들의 경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과 행위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죄책감과 비난, 공허뿐 아니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사별자는 고인이 살아 있을 때의 행동과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죽음으로 이어졌을 법한 단서를 찾는다. 기억은 더 이상 지나간 일을 보관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수색하는 장소가 된다. 무엇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갔는지 알 수 있다면 놓쳐버린 과거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를 이해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왜’는 죽은 사람에게만 향하는 물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겪고도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너진 세계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유 찾기는 쉽게 자기 심문으로 번진다. 가까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때 조금 더 물었다면 달라졌을까. 마지막에 했던 말을 바꾸었다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가정법이 죽음 뒤에서 생겨난다. 사랑했던 기억까지 증거물처럼 뒤집어보게 되는 시간. 죄책감에는 슬픔만큼이나 인간의 통제 욕구가 깊숙이 섞여 있다. ‘내가 막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고통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사건을 바꿀 힘이 있었다는 전제를 품는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타인은 모든 고통을 알 수 없고 한 사람의 생을 대신 지켜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막막하다. 사랑의 크기와 책임의 크기가 반드시 같지는 않은데, 죽음은 그 둘의 경계를 자꾸만 흐린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정미에게서 답을 받아내는 대신 남은 사람들의 시간을 오래 바라본다. 슬픔을 얼마나 드러내야 충분히 슬퍼한 것인지, 다시 웃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죽은 이를 덜 사랑한 것인지, 일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애도가 끝났다고 말해도 되는지. 상실 뒤의 삶에는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문제만큼이나 살아남은 사람이 자기 삶을 다시 허락하는 문제가 있다. 황보나는 그 허락을 성대한 결심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밥을 먹고, 걷고, 누군가를 만나며, 어제 했던 일을 또 한다. 죽음을 겪었다고 해서 하루의 단위까지 장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소함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생을 이상할 만큼 질기게 만든다.
제6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들이 이 작품의 ‘알 수 없음’을 거듭 짚은 이유도 이 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지리문학상은 박지리의 작품이 보여준 인간 본질과 사회를 향한 시선과 통찰을 기억하며 새로운 소설을 발굴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알갱이들』은 그 마지막 수상작이 되었다. 한 청소년의 자살을 다루면서도 원인을 극적으로 발굴하거나 사회적 교훈으로 정돈하지 않는 선택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죽음을 소재로 삼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죽음 앞에서 작가가 가진 설명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을 쉽게 설명하지 않는 것과 인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는 듯이.
남겨진 사람의 삶을 ‘회복’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도 조금 망설여진다. 회복에는 은근히 원래의 자리라는 목적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한 뒤에도 돌아갈 수 있는 원래의 내가 남아 있을까. Rebecca Goodall, Karolina Krysinska, Karl Andriessen은 자살 사별 이후의 ‘지속되는 유대(continuing bonds)’를 다룬 체계적 문헌고찰에서 15편의 연구(질적 연구 13편, 양적 연구 2편)를 검토했다. 그 결과 사별자들은 고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기억하기, 이야기하기, 유품이나 장소를 통한 연결, 내면의 대화처럼 여러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런 유대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연결은 위안이 되고 어떤 연결은 고통을 지속시키며, 같은 사람에게도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애도는 고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놓아주었는지를 측정하는 단선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과 자신의 삶을 계속하는 일 사이에 굳이 승패를 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미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슬퍼하면서도 웃을 수 있으며, 어떤 날에는 오래 기억하고 어떤 날에는 잠시 잊을 수 있다. 그 어느 쪽도 앞선 마음을 취소하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삶은 죽은 이를 마음에서 덜어내며 이전의 크기로 돌아가는 과정보다, 그의 부재까지 들어갈 자리를 새로 만드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자리가 생기면서 사람 역시 전과 다른 모양이 된다.
다시 제목을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알갱이들. 단수가 아닌 복수로 놓인 이 말에는 처음부터 하나로 모이지 않는 마음들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알갱이는 너무 작아서 하나만으로는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없고, 여럿을 손에 올려놓아도 서로의 틈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미를 기억하는 마음도 그와 닮아 있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선명하게 남은 것과 어느새 희미해진 것이 한데 섞인 채 각기 다른 무게를 가진다. 기억은 그렇게 고르게 남지 않는다. 어떤 것은 오래도록 손끝에 걸리고, 어떤 것은 이름조차 붙이기 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남겨진 사람은 그 불균질한 조각들을 가진 채 떠난 사람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중 무엇을 집어 들어 정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그 모든 조각을 하나의 모양으로 맞추지 않는 일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남겨두어야 한 사람을 너무 많이 설명하지 않은 것이 될까. 『알갱이들』을 읽는 동안 완성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것들의 사이를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도서출판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