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사이의 우주
더그 존스턴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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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가로지른 섬광과 동시에 쓰러진 이들 가운데 기적처럼 깨어나는 세 사람. 그리고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비토착 두족류 하나. 이 소설의 중심에는 인간이 아닌 수상한 두족류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 놓여 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도, 거대한 침략 선언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언어로는 끝내 설명할 수 없는 존재 하나를 지금 여기에서 죽게 둘 수는 없다는 마음이다. 샌디는 그저 이 세계에 너무나도 연약한 방식으로 도착해버린 타자이다. 그리고 헤더, 에이바, 레녹스는 그 타자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여정은 영웅담이 아닌, 세계가 이해하지 못할 존재를 끝까지 이해하려는 소수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

샌디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권력과, 통제와 소유의 언어로 접근하는 세계 속에서 세 사람의 선택은 지나치게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샌디를 살리기 위한 여정은 단순한 도주나 보호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자를 대하는 오래된 방식-규정하고, 통제하고, 해석하려는 태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샌디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 침묵 앞에서 세 사람은 흔들린다. 그럼에도 선택은 이루어진다. 이 소설의 윤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해한 뒤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조차 곁에 남는 태도. 여기서 관계는 지식이 아닌 결단의 문제로 전환된다. 합리성의 바깥에서만 성립되는 윤리가 있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목인 <너와 나 사이의 우주>는 물리적 거리보다 더 넓은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 말과 침묵 사이에 놓인 설명 불가능한 간극이다. 우주는 건너야 할 공간이 아닌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로 남는다. 중요한 것은 그 거리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거리를 인정한 채 어떻게 함께 움직일 것인가다. 이해 또한 끝내 닿지 못할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거리만큼 물러서지 않는 태도에 가깝지 않은가. 세 사람과 샌디의 결말이 온전히 정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정의 끝에서 남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흔적이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세계는 다시 이전처럼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다른 생명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본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타자를 구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샌디를 살리기 위한 여정은 결국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가장 위태로운 순간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각자의 삶이 충분히 버거운 상태에서,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고, 또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이 구조는 분명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다시 마음을 붙드는 이유는 우리에게 여전히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힘든 순간을 견뎌내는 지구력, 설명 없이도 곁에 있어주는 용기, 고통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것들은 모두 특별한 영웅의 자질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태도이다. 그렇기에 다소 진부하게 다가올수도 있는 인상조차 이 소설을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이 책은 새로움을 증명하려 애쓰는 대신, 지치고 소진된 세계를 향해 말한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고, 완전히 설명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소설은 위로가 된다. 멀리 있는 별처럼 빛나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사이의 우주를 조심스럽게 건너오며 손을 내밀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이 소설이 남긴 가장 오래 가는 흔적이다.

**문학수첩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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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루스트 - 삶의 슬픔과 희열, 위로와 예술을 알려준 우리들의 프루스트를 찾아서
김주원 외 지음 / 현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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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루스트>를 펼치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의 이력이다. 교수, 번역가, 피아니스트, 통역사, 연구자, 극작가, 연출가까지.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살아온 이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여 있다. 공통점은 단 하나,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 삶의 어떠한 선택을 감내해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그의 문장 곁에 머물기 위해 삶의 진로를 선택했고, 누군가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번역하고, 연주하고, 무대 위로 옮겼다. 10인의 저자에게 프루스트는 같은 이름이되, 결코 같은 의미는 아니다. 이 책은 그 해석의 차이를 존중하며 엮은 열 개의 고백이자, 하나의 합창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은 언제나 거대하다. 그의 소설 제목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박수갈채가 따라붙고,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단어 하나로 기억과 문학을 소환한다. 하지만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늘 지키지 못한 약속에 가깝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올해는 꼭 읽어야지 하다가도 매번 손에서 미끄러지는 목표. 그 거대함 앞에서 변명부터 늘어놓게 된다. 그래서 <나의 프루스트>라는 책은 나에게 참 반갑다. 거대한 작품 앞에 서기 전에, 먼저 프루스트라는 한 인간을 여러 시선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나 역시 나만의 프루스트를 조금은 만난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 스며들 프루스트를 잘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머리말에서 저자들은 분명히 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이 길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고. 대신 열 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프루스트를 사랑해온 이유를 보여주겠다고. 이 태도는 권위자의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해온 애독자의 수줍은 고백에 가깝다. 봉준수는 길이를 미덕으로 복권시키며, 순간을 늘이고 망각을 포용하는 독서를 제안한다. 김주원은 음악의 정적 속에서 상실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윤혜준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통해 읽기와 쓰기가 서로를 위협하는 긴장을 드러낸다. 이 글들은 프루스트를 설명하기보다, 프루스트를 통과한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오선민의 글은 이 책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일상의 사소함을 포착하고 끝까지 사유하는 힘. 실패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글감을 길어 올리는 태도. 글쓰기는 시간을 되찾는 일이며, 언어는 감정의 격랑에서 우리를 건져 올리는 도구라는 그의 말은 프루스트의 윤리를 오늘의 삶으로 옮겨온다. 비주류였던 프루스트, 죽음 앞에서 프루스트를 붙잡은 독자, 각색이라는 불가능한 과제를 상상하는 극작가,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다시 읽히는 프루스트, 애도와 행복을 번역하는 문학의 책무까지. 이 책은 프루스트가 하나의 정답이 아닌, 읽는 자 개개인에게 열리는 해석의 답안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한 길잡이나 지도가 되기보다는, 지도 앱에 남겨진 한 장소의 리뷰에 가깝다. 더 날것이고, 더 주관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간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향한 저자들의 애정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에 선하다. 각자의 경험과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문장들 덕분에, 프루스트와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고전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야 될, 이미 약속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프루스트를 읽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며, 각자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말은 이상하게도, 다시 한 번 그 거대한 소설을 향해 발을 내딛게 만드는 조용한 용기가 된다. 그렇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프루스트를 기다리며 서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은 여전히 길고, 그래서 이 책을 덮은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현암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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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록
듀나 지음 / 래빗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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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가 우리에게 처음 보여주는 것은 기이한 사건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미 한 번 잘못 조율된 뒤라는 감각이다. 설명되지 않는 폭력, 이유 없이 반복되는 죽음, 머리가 사라진 채 남겨진 몸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깨닫게 된다. 이 세계의 공포는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선택들의 결과라는 것을. <몰록>은 사건을 추적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건이 불가피해진 조건을 집요하게 더듬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지성을 축복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과도하게 연결되고, 증폭되고, 효율을 목표로 삼는 순간 어떤 파국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인 사고는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덕분에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사고가 집단이 되고, 네트워크가 되며, 더 많은 지식을 더 빠르게 흡수하려 할 때, 판단은 윤리를 앞지른다.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각이 과잉되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 이 소설의 세계에서 비극은 무지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진실은 읽는 이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설명되는 순간 공포는 형태를 바꾼다. 누군가의 악의나 광기가 아니라, 너무 합리적이어서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들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머리가 잘린 시체들은 그래서 상징처럼 남는다. 생각이 제거된 몸, 혹은 생각만 남기기 위해 버려진 몸. 생각할 수 있는 자와 생각당하는 자의 분리. 남겨진 몸들은 질문하지 못하고, 질문은 이미 다른 차원에서 끝났다는 듯 처리된다. 이 소설에서 폭력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선별과 정제의 부산물이다.

<몰록>이 불편한 이유는, 이 이야기의 구조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판단, 더 큰 효율, 더 빠른 공유를 향한 욕망은 이미 우리의 언어이자 사고 체계가 되었다. 연결은 미덕이 되었고, 집단 지성은 희망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묻는다. 연결된 사고는 과연 책임을 가질 수 있는가. 전체가 최적화될 때, 누가 잘려 나가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부터 고개를 끄덕이는 쪽에 서 있었는가.

그래서 <몰록>은 호쾌한 SF가 아니라, 읽고 난 뒤 오래 남는 불쾌한 여운에 가깝다. 이 모든 사태를 가능하게 한 것은 어떤 초월적인 악이 아니라, 그저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망이었기 때문에.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느 순간부터 폭력이 되는지, 지성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인간은 무엇을 잃는지를 묻는다. 이 책은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대신 하나의 감각을 남긴다. 너무 잘 돌아가는 세계는 이미 어딘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이 소설은 사건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보다는 시스템과 집단, 지성과 권력의 관계를 곱씹는 독자에게 어울린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이야기보다, 그 한계가 왜 아직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편리함이라는 말 앞에서 한 번쯤 멈춰 서본 적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래 남는 방지턱이 될 것이다.

**래빗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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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이모션
이서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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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장 먼저 건네는 질문은 단순하다. 감정이 사라진 세계는 과연 덜 아픈가. 살다 보면 감정이 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거나, 슬픔이 하루를 통째로 삼켜버릴 때.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들. <노 이모션>은 바로 그 유혹에서 출발한다.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효율과 평온을 획득한 사회는 겉보기에는 안전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 평온은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대신 흔들릴 이유 또한 잃어버린다. 분노도, 사랑도, 슬픔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덜 아파지는 일이 아니라, 아픔을 인식할 감각 자체가 무뎌지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안도보다 깊은 피로만이 남게 된다.

인간의 감정은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가. 분노와 슬픔, 불안과 기쁨은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고, 일정 선을 넘으면 결함으로 분류된다. 감정을 가진 이들이 문제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무감정은 규범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감정을 통해 스스로를 설명하던 언어를 잃어버린다. 이 세계의 인물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단단해서가 아니라, 깊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압하는 권력이 노골적인 폭력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시스템은 친절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인간에게서 가장 인간다운 것을 빼앗는 방식이 지나치게 매끄럽다.

<노 이모션>은 감정을 아름답기만 한 것으로 그리거나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감정은 분명 불편하고 불필요하며 위험한 것이다. 사랑은 집착으로 변하고, 슬픔은 기능을 마비시키며, 분노는 질서를 위협한다. 그렇다면 감정 없는 평온은 과연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고통이 제거된 자리에는 안도 대신 공허가 남고, 선택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사함만이 남는다. 작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느끼는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느낄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 의미도 생성되지 않는 세계. 그것은 고통이 없는 대신 삶의 밀도가 사라진 상태이다.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많은 감정 중 사랑이 이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의문의 인물은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로 하리를 공격한다. 왜 하필 사랑인걸까. 사랑은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강렬하면서도 모순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보호와 파괴, 헌신과 소유가 동시에 존재하는 감정. 그래서 사랑은 가장 쉽게 폭력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완전한 구원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을 제거한 세계에서조차 사랑만은 끝내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된 형태로 남아 인간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찌른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감정의 정점이자, 감정을 통제하려는 세계가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증거가 아닐까.

감정은 과연 인간에게 무엇일까. 작가는 이를 재정의한다. 감정은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잡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흔들리고 망설이고 후회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끝내 포기할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감정을 제거한 사회는 상처를 없애는 대신 질문 또한 제거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완벽에 가깝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다. 감정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결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예민함, 과잉, 흔들림.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인간의 오류가 아닌 증거로 되돌려놓는다. 아직 살아 있고, 아직 반응하고 있으며, 아직 선택하고 있다는 증거로. 감정 없는 세계보다 감정 때문에 흔들리는 세계가 더 위험할지라도, 그 위험 속에 인간의 존엄이 남아 있다. 감정은 통제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견뎌내며 살아가야 할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해피북스투유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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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 지하 대피자들
전예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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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지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대개 설명되지 않고 사라진다. <매점 지하 대피자들>은 그 사라짐의 끝에 ‘아래‘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곳은 정상 사회에서의 실패나 이탈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삶의 형태로서의 ‘아래’이다. 적강산의 매점 지하, 스스로 땅을 파 내려가 만들어낸 임시 거처는 실패한 사람들의 은신처이자, 정상 사회의 규칙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일종의 무중력 지대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회복도, 성장도, 복귀도 요청되지 않는다. 다만 존재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 조건만이 허용된다. 이곳에서 삶은 다시 계획되지 않고, 잠정적으로 유지된다. 위로 올라갈 의지도, 완전히 사라질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선택한 깊이는 결국 살아 있으려는 마지막 자세에 가깝다.

땅굴은 노동으로 일궈낸 단순한 공간이 아닌 존재 방식이다. 각자가 삽을 들고 자기만의 폭과 방향으로 파 내려가는 굴은 타인에게 쉽게 내어줄 수 없는 생의 최소 단위이자, 사회가 요구하는 동일한 궤도로부터 벗어나려는 미세한 저항처럼 보인다. 정상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성과 복귀의 언어 대신, 이곳에서는 오늘을 넘기는 법과 체온을 나누는 법이 공유된다. 이곳의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경계하고, 돕지만 끝내 구원하지는 않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책임 없는 다정함, 지속을 약속하지 않는 관계. 인간은 언제나 연결을 갈망하지만 그 연결이 반드시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불완전한 연대가 바로 이 소설의 윤리인 것이다. 그 곳에서의 소속감은 제도적 안정이 아닌 정서적 은신에 가깝다. 서로의 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한 채 같은 깊이에 머무는 사람들, 다른 이들이 모르는 금 안으로 잠시 들어섰다는 감각. 인간에게 소속감이 중요한 이유는 보호 때문이 아닌,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 아닐까.

지하에서의 시간은 기묘하게 재편되어 목적을 잃는다. 하루는 아침과 저녁으로 분절되지 않고, 미래는 계획되지 않는다. 오후 여섯 시의 아침밥, 금요일마다 이어지는 강의와 잡담, 의미 없어 보이는 기록과 일. 이 반복은 삶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삶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 공동체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흔들리지 않는 법, 지금을 버티는 법, 당장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줄 아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래를 설계하지 않음으로써 오늘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처럼 읽힌다. 지금에 집중하라는 요청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현대의 시간 감각을 정면으로 겨눈다. 우리는 늘 나중을 위해 오늘을 미뤄두고, 언젠가를 조건으로 현재를 삭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땅속의 평형은 끝내 지우고 싶던 기억과 외부의 시선 앞에서 흔들린다. 묻혀 있던 과거가 비와 함께 드러나고, 지하를 지탱하던 흙은 붕괴의 징후를 보인다. 장대비와 산사태는 우연한 재난이기보다 감정의 물리적 형상이다. 오래 삼켜온 말들이 비가 되어 쏟아지고, 눌러두었던 기억들이 흙과 함께 무너진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터져 나오는 것들. 이 소설은 견디는 삶에 머물지 않고, 무너질 수 있는 삶까지를 포용한다. 끝내 이들이 붙잡는 것은 서로의 체온이다. 완전한 구출도, 명확한 결말도 없는 자리에 남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말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지금을 살 수 있는가. 작가는 말한다.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해도, 지하에서의 삶이 곧 실패는 아니라고. 살아 있으려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며, 때로는 아래로 내려가는 선택이 가장 솔직한 생의 형태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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