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오기로 한 자리
김진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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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은 이미 많다. 그러나 김진아의 <사랑이 오기로 한 자리>는 사랑을 설명하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공기를 오래 붙들고 있다. 읽는 내내 어딘가 따뜻한 창가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햇살이 부드럽게 번지고,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드는 오후. 포근한 이불 속에서 단짝 친구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듣는 듯한 다정한 결. 그 다정함 속에는 묘하게도 깊은 슬픔의 잔해가 섞여 있다. 충실했던 사랑의 기록일수록 그 문장들은 지나간 시간의 결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그 잔해까지 포함해 사랑이 오기로 한 자리였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이 오지 않는 이유를 자주 외부에서 찾는다. 타이밍이 어긋났다고, 인연이 아니었다고, 아직 더 나은 누군가가 남아 있을 거라고. 시선을 내부로 돌려보자. 사랑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이 보인다. 사랑은 타인이 건네는 감정이기 이전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용기이다. 누군가를 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화해해야 한다. 비워둔 줄만 알았던 자리가 실은 방어로 가득 차 있었음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렵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의 형태가 조금씩 확장된다. 꼭 누군가를 곁에 두고 있어야만 사랑일까. 함께 웃고 손을 맞잡는 현재형만이 사랑의 증거일까. 떠난 자리를 오래 응시하는 일,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남겨두는 일, 끝났음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까지도 모두 사랑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통과의 경험이라는 사실. 관계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지나며 스스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다.

책 속 인덱스를 붙여두었던 문장들을 떠올리면, 그 대부분은 사랑하는 이에게 바라는 소망과 닮아 있었다. 더 이해해주기를, 더 다정하기를, 더 오래 머물러주기를. 그 바람을 곱씹다보니 질문이 되돌아온다. 사랑을 준다는 말 아래, 실은 더 받기만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랑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얼마나 비워두었는지. 사랑이 오지 않는 이유를 바깥에서 찾기 전에, 스스로의 자리를 먼저 둘러보아야 한다는 깨달음. 사랑은 타인이 채워주는 결핍이 아니라, 함께 나누기 위해 스스로 마련해두어야 할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랑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의 기억을 가만히 펼쳐 보인다. 잘된 사랑과 망가진 사랑을 구분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이 한 시절을 통과하며 남긴 온기를 보여준다. “그럼에도”라는 말이 자주 떠오른다. 상처가 있었음에도, 이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사랑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다시금 자리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반복해서 어긋난다 느꼈던 사람, 이별 후 감정이 오래 남아 스스로를 탓했던 사람, 누군가를 만나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사랑은 약속처럼 도착하기보다 비워둔 자리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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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얼굴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최고은 옮김 / 반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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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얼굴을 버리는가. 그리고 얼굴 없는 삶은 정말 살아 있는 삶일까. 이 질문은 사건의 진실보다 먼저 다가온다. <잃어버린 얼굴>은 산중에 묻힌 시신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파헤치는 것은 한 인간의 신원이 아닌 존재의 표면이다. 훼손된 얼굴과 잘려나간 손목은 신원 확인을 방해하기 위한 장치이자, 한 사람이 스스로의 흔적을 지워온 시간을 상징한다. 이름은 바뀌고 기록은 조작되며 진실은 매장된다. 얼굴은 단지 이목구비의 배열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호명되어 타자 앞에 서는 방식이고, 세계와 관계 맺는 표면이며,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얼굴을 잃는다는 것은 곧 응시를 피하는 일, 타자의 눈을 견디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방향을 잃은 사랑은 끝내 폭력의 형상을 닮는다. 사랑하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거짓은 단단해 보인다. 부모라는 이름은 쉽게 면죄부가 된다.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선택은 언제나 ‘아이를 위해‘라는 말로 포장된다. 그 문장은 진실과 윤리를 가장 손쉽게 유예시킨다. 보호는 곧 삭제와 은폐가 되고, 그 순간 사랑은 타인을 향하지 않고 두려움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아이가 짊어질 미래를 염려한 어른들은 정작 아이에게 현재를 좀먹는 가장 무거운 유산을 남긴다.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진 평온은 늘 붕괴를 예약한다. 죄는 유전되지 않을지라도, 침묵은 공기처럼 스며든다. 지키려 했던 것은 아이의 삶이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공포와 수치심이었는가.

가짜 이름으로 버텨낸 십 년은 과연 거짓이기만 했을까.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은 단순한 위장이 아니다. 존재의 근거를 외부로 이전한 삶이었더라도 웃고, 일하고, 숨 쉬는 동안은 분명한 실제였다. 다만 그 실제는 언제나 들킬 위험을 품고 있었다. 이름은 사회가 부여한 표식이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타인의 과거를 짊어진 채 시간을 통과하는 삶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다. 얼굴은 매일같이 거울에 비춰졌지만 그 얼굴은 진정 자신의 것이 아닌 언제나 빌린 자리였다. 그렇게 타인의 자리를 빌려 살아가는 일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서서히 자아를 잠식하는 자기 부정에 가깝다. 타인의 자리를 차지한 존재는 결국 자신의 자리도 잃는다. 그는 살아 있으면서도 점점 더 세계에서 사라진다.

이 소설에서 더 두려운 것은 최초의 살인이 아니다. 우발적 충돌은 한순간의 격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선택들은 매번 의식적이었다. 은폐를 택하고, 침묵을 택하고, 다시 한 번 입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택하는 일. 죄는 한 번의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속이기로 한 그날 이후 선택은 반복되고, 반복은 성격이 되며, 성격은 운명이 된다. 책임을 미루는 순간마다 인간은 조금씩 괴물과 같은 형상으로 일그러진다. 처음에는 손이 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덜 떨리고, 세 번째에는 계산이 앞선다. 그렇게 양심은 급격히 사라지기보다 서서히 무뎌진다. 얼굴을 버린 인간은 결국 더 많은 얼굴을 훼손하며 자신을 지키려 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더 이상 도망치는 존재가 아니라, 도망이라는 방식을 삶의 원리로 삶는 존재가 된다.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신분이 아닌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시신의 신원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자 시간의 판결이다. 시간은 거짓을 완전히 삼키지 못한다. 묻힌 시체는 언젠가 발굴되고, 바꿔치기한 이름은 결국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그 선택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구했는가. 얼굴 없는 삶은 살아 있음이라 부를 수 있는가. 끝내 답을 허락하지 않는 질문만이 남아 있다. 사쿠라다 도모야가 적어낸 것은 단순히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얼굴>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상실하는지, 그리고 그 지움이 어떻게 또 다른 파괴를 낳는지를 추적하는 기록에 가깝다. 지키려는 것들이 전부였던 이들이, 정작 자신만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정체성과 이름, ‘나’라는 존재의 근거를 사유하고 싶은 독자, 단순한 추리의 쾌감보다는 인간 내면의 붕괴 과정을 따라가는 서사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얼굴을 감출 수는 있어도, 존재의 책임까지 지울 수는 없다.

**출판사 오팬하우스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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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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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늘 위를 향해 쌓인다. 층이 높아질수록 시야는 넓어지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겹겹이 묻힌다. 1939년 경성의 여름, 근대의 표정을 하고 선 명성아파트 역시 그렇다. 단정한 외관과 달리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계산이 촘촘히 얽혀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마다 서로 다른 사정이 스민다. 이 소설은 사건을 따라가게 만들지만, 끝내 남는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닌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악이 되는가.

이 작품에서 선과 악은 명확히 갈라진 두 진영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라는 압력 아래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경계에 가깝다. 누구도 처음부터 괴물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두려움이 앞서고, 결핍이 쌓이고, 잃을 것이 생기는 순간 선택은 서서히 기울어진다. 도덕은 늘 이상처럼 말해지지만, 생존이 먼저가 되는 자리에서는 종종 사치가 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대한독립’이라는 말조차 낮은 목소리로만 떠도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옳음을 외치는 일보다 무사히 오늘을 넘기는 일이 더 절박했던 시대.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한 걸음씩 어두운 쪽으로 이동한다.

이 소설이 날카로운 이유는 가장 연약해 보이는 존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비춘다는 점이다. 열두 살 입분의 시선은 순박하다가도 번뜩인다. 권력의 옷차림에 겁을 먹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도, 어른들이 흘리는 미묘한 균열을 재빠르게 읽어낸다. 사람들은 아이 앞에서 경계를 풀고 흐트러지지만, 바로 그 틈에서 진실은 새어나온다.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눈만이 세상을 그대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보호받아야 할 자리에서조차 삶은 계산을 요구한다. 순수로 남는 것보다 세계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 더 안전해지는 순간, 그때 선은 선택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끝까지 깨끗하게 남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조건은 아니었을까.

명성아파트는 하나의 건물이지만 동시에 시대의 축소판이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틴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타협으로, 누군가는 더 치열한 선택으로. 저마다의 이유를 위해 마음속에 작은 어둠을 품게 된다. 그 어둠은 거창한 악의 선언이 아니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특히 입분의 성장은 지독하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키가 자라는 일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회색을 배우는 일이라는 사실. 그 과정에서 선과 악은 서서히 서로를 닮아간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입분이 완전히 검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만 단단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은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은 통쾌한 심판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누구를 쉽게 단죄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스스로도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악은 거창한 얼굴이 아니라 두려움에 젖은 눈, 잃지 않으려는 손, 밀려나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서 자란다. 그래서 이 소설은 범죄의 서사라기보다 인간 조건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선과 악을 명쾌하게 가르는 이야기보다,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응시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려 인간의 민낯을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명성아파트의 복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래빗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1939년명성아파트 #무경 #추리소설추천 #책추천 #도서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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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아메리카 - 무일푼 청년의 미국·캐나다·멕시코 낭만 자전거 여행
정우창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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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의 대륙을 건너는 일은 결국 두 다리로 배우는 공부에 가깝다. 지도와 검색창으로는 끝내 닿을 수 없는 감각들이 있다. 흙을 밟고, 바람을 맞고, 체력이 한계까지 밀려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몸이 이해하는 진실. 드넓은 미국 땅 위를 쉼 없이 굴렀던 자전거 ‘시리우스’의 바퀴. 그 회전은 질문을 반복한다. 왜 떠나는가. 미국과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끝내 명확해지지 않던 물음. 그것은 어쩌면 이 여행의 가장 깊은 동력이었을지 모른다. 목적이 또렷했던 출발과 달리, 이유가 흐릿해진 순간부터 여정은 비로소 여행자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세계를 향해 열려 있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장면에서, 이 기록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한 인간의 성장 서사로 확장된다.

동행이 곁에 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고독이 있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모하비 사막에서 물 한 모금 구하지 못했던 시간, 숲속에서 곰의 흔적을 발견하고 숨을 죽였던 기억, 로키산맥의 가파른 경사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던 순간들. 자연의 어느 한 조각도 자신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 자연은 환대하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길을 열어줄 뿐이다. 그 무심함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중심에서 밀려난다.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해방이다. 지독한 고독을 끌어안는 시간은 자신을 축소시키는 동시에 본질만을 남긴다. 남는 것은 체면도 과시도 아닌,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와 한 걸음 더 내딛는 힘뿐이다.

그 여름의 미국 대륙은 스스로에게 자행했던 담금질과도 같았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와 사막, 산맥과 국경은 저자를 어디론가 데려가기보다 그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두 다리와 두 바퀴로만 배울 수 있는 감각이 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결. 뜨거운 열기와 극한의 체력 저하, 반복되는 고독 속에서 불순물처럼 남아 있던 망설임이 조금씩 벗겨진다. 그렇게 단련된 마음은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결을 갖게 된다. 여행은 낭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벼리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증명한다.

이들이 향한 곳은 엽서 속 명소가 아니라, 이름 없는 자연과 경계의 지점들이다. 소비되는 풍경 대신 스스로를 시험하는 장소들. 그 선택은 여행을 전시가 아닌 하나의 탐험으로 바꿔놓는다. 그 과정에서 ‘아메리카’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수많은 얼굴로 분해된다. 사막의 얼굴, 산맥의 얼굴, 도시 변두리의 얼굴,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떠나는 이를 붙잡지는 않되 물 한 병을 쥐여주고, 식량을 건네고, 책이나 돈봉투를 말없이 내미는 마음. 그것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선 하나의 정서이다. 관심과 걱정, 응원과 아쉬움이 뒤섞인 채, 잠시 스쳐가는 인연에게 건네는 인간의 온기.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미미했던 존재가 또 다른 인간 앞에서는 따뜻한 우주가 된다. 세계는 냉혹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그 냉혹함을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얼굴들은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에너지로 남았을 것이다. 지칠 때마다 찾게 되는 작은 에너지바처럼, 타인의 풍경은 삶을 버티게 하는 연료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 여름의 아메리카>는 여행기를 넘어 알렉스이자 정우창이라는 한 인간의 성장 연대기처럼 읽힌다.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다운가, 어디에 설 때 가장 단단해지는가. 책장을 덮으며 오래 남는 인상은 단단함이다. 어디에 내려놓아도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사람이라는 확신. 낯선 대륙에서도, 고독의 한복판에서도, 극한의 체력 저하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태도. 바깥의 대륙을 건너며 동시에 안쪽의 지도를 완성해가는 과정.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은 이들, 진로와 적성 앞에서 망설이는 청춘들, 그리고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싶은 교사와 부모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대륙은 멀리 있지만, 질문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만이 결국 자신만의 길 위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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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트레인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7
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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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트레인>은 이별을 이야기하지만 이별의 종결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반지를 버리기 위해 떠난 여행은 끝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독자와 작가는 그 실패 앞에 오래 서게 된다. 그러나 이 실패는 서사의 결함이 아니라, 이 소설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삶에는 끝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인간은 바로 그 끝낼 수 없음 위에 서 있는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나이트 트레인>은 출발한다. 이 소설은 그 전제를 설명하거나 해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끝내지 못하는 상태‘ 자체를 삶의 본질로 끌어올린다. 여기서 이별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하나의 지속적인 조건으로 제시된다. 끝맺음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소설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가장 냉정한 진실이다.

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연인의 잔재이자,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며, 부재의 형상을 한 기억이다. 대관람차에서 버려지지 못하고, 니스의 바다에 던져졌음에도 되돌아오는 이 반지는 잊혀지지 않는 감정의 은유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억의 집착이 아니다. 기억은 저장되거나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위치를 옮긴다. 부재는 제거되지 않고 관계의 형태를 바꾸며 남는다. 이별은 지워지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자리에 놓이는 경험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애도’는 끝나는 과정이 아니라 감당 가능한 거리로 기억을 옮겨놓는 행위에 가깝다. 반지는 짐이 아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삶의 일부로 남아 우리를 따라온다.

9286일간의 여행은 이 재배치의 과정이다. 반지를 버리겠다는 명확한 목적은 번번이 좌절되고, 그 좌절 속에서 여행은 다른 의미를 얻는다. 목적은 해체되고 이동만이 남아 있다. 이 소설 속의 여행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상태로 이동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야간열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삶의 형식이 된다. 직선으로 달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 원을 그리며 되돌아오는 움직임. 우리는 늘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이미 어떤 궤도 위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도착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으면서 동시에 계속 이동하는 상태이다.

소설의 화자 역시 하나의 정체성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여행하는 나와 쓰는 나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 겹쳐진다. 자아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다시 쓰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전적 고백으로 보이면서도 개인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완전한 서사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종종 지워지고, 다시 쓰이며, 같은 자리에 다른 의미로 남는다. 아름다운 미완의 상태.

<나이트 트레인>의 문을 닫고 걸어 나오면 어떤 이별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인정은 체념이 아니다. 끝낼 수 없음은 실패가 아닌 조건이고, 그 조건 속에서 삶은 계속 다른 배치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반지는 다시 버려질 것이고, 또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버리지 못한 것들 덕분에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삶은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아니라 끝내 정리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계속 이동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야간열차는 지금도 어둠을 가르며 달리고 있고, 그 안에서 쓰이고 있는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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