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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평점 :
아파트는 늘 위를 향해 쌓인다. 층이 높아질수록 시야는 넓어지지만,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겹겹이 묻힌다. 1939년 경성의 여름, 근대의 표정을 하고 선 명성아파트 역시 그렇다. 단정한 외관과 달리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계산이 촘촘히 얽혀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걸음마다 서로 다른 사정이 스민다. 이 소설은 사건을 따라가게 만들지만, 끝내 남는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닌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악이 되는가.
이 작품에서 선과 악은 명확히 갈라진 두 진영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라는 압력 아래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경계에 가깝다. 누구도 처음부터 괴물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두려움이 앞서고, 결핍이 쌓이고, 잃을 것이 생기는 순간 선택은 서서히 기울어진다. 도덕은 늘 이상처럼 말해지지만, 생존이 먼저가 되는 자리에서는 종종 사치가 된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대한독립’이라는 말조차 낮은 목소리로만 떠도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옳음을 외치는 일보다 무사히 오늘을 넘기는 일이 더 절박했던 시대.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한 걸음씩 어두운 쪽으로 이동한다.
이 소설이 날카로운 이유는 가장 연약해 보이는 존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비춘다는 점이다. 열두 살 입분의 시선은 순박하다가도 번뜩인다. 권력의 옷차림에 겁을 먹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도, 어른들이 흘리는 미묘한 균열을 재빠르게 읽어낸다. 사람들은 아이 앞에서 경계를 풀고 흐트러지지만, 바로 그 틈에서 진실은 새어나온다.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눈만이 세상을 그대로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보호받아야 할 자리에서조차 삶은 계산을 요구한다. 순수로 남는 것보다 세계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 더 안전해지는 순간, 그때 선은 선택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끝까지 깨끗하게 남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애초에 허락되지 않은 조건은 아니었을까.
명성아파트는 하나의 건물이지만 동시에 시대의 축소판이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틴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타협으로, 누군가는 더 치열한 선택으로. 저마다의 이유를 위해 마음속에 작은 어둠을 품게 된다. 그 어둠은 거창한 악의 선언이 아니라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특히 입분의 성장은 지독하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키가 자라는 일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회색을 배우는 일이라는 사실. 그 과정에서 선과 악은 서서히 서로를 닮아간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입분이 완전히 검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만 단단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은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품은 통쾌한 심판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누구를 쉽게 단죄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스스로도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악은 거창한 얼굴이 아니라 두려움에 젖은 눈, 잃지 않으려는 손, 밀려나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서 자란다. 그래서 이 소설은 범죄의 서사라기보다 인간 조건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선과 악을 명쾌하게 가르는 이야기보다,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응시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려 인간의 민낯을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명성아파트의 복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래빗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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