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짐승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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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몸이 하나의 허기를 느끼고, 세 개의 입이 같은 소리를 내며, 서로 다른 심장이 하나의 박자로 뛰던 시절이 있다. 어린 형제들에게 세계는 아직 각자의 몫으로 나뉘지 않았다. 배고픔도 장난도 두려움도 함께 겪었으며, 누구의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해 누구에게로 옮겨 갔는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스틴 토레스의 『우리, 짐승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던 세 형제의 유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몸이 타인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서로 다른 욕망을 품을 수 있음을 알아간다. 가장 가까운 존재들과 공유했던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순간, 어린 시절의 ‘우리’는 이전과 같은 의미로 지속될 수 없다.

푸에르토리코계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 형제는 뉴욕 북부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다. 부모는 충분히 어른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되었고, 아이들은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스스로를 돌보는 법부터 익힌다. 이 집에서 사랑은 따뜻한 포옹과 거친 손길을 번갈아 입는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웃음을 나누다가도 폭력을 행사하며, 어머니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서도 자신의 절망을 그들에게 의탁한다. 가족의 애정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 애정이 언제나 안전한 형태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상처받은 몸으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반복된 경험은 세 형제의 몸짓과 언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조금씩 스며든다.

사랑과 폭력이 뒤섞인 환경에서 아이들은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일찍 깨닫는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맡겨야 한다. 그러나 보호와 위협이 같은 손에서 비롯될 때, 아이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이들에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장소이자 언제든 낯설어질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가난은 그 불안정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불규칙한 노동과 결핍은 부모의 몸을 지치게 하고, 충분히 돌봄받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하루를 견딘다. 세 형제가 그토록 강하게 결속하는 데에는 사랑뿐 아니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깃들어 있다.

그러한 형제들을 작가는 ‘짐승들’이라고 부른다. 원제 We the Animals에는 집단의 이름을 선언하는 듯한 힘이 있다. 미국 헌법의 첫머리인 We the People을 연상시키는 이 어구에서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짐승들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오래된 위계 속에서 짐승은 흔히 본능에 충실하고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세 형제의 동물성은 그들을 비하하는 언어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들고, 기쁘면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몸을 밀치고 끌어안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단정한 몸가짐보다 생존과 욕망의 리듬이 먼저 흐른다. 짐승이라는 이름은 거친 유년을 설명하면서도, 인간에게 허락된 삶의 형태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되묻게 한다.

그러나 같은 짐승으로 살아가던 형제들도 영원히 같은 방향으로 자라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던 세 사람이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감각과 욕망을 갖게 된다. 특히 막내에게는 형들이 공유하는 남성성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이 자라난다. 그는 형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자신의 일부로 간직하면서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만, 그 관계가 허락하는 모습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일에는 때때로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해를 벗어나는 경험이 뒤따른다. 가족에게 속한다는 감각과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은 그렇게 한 사람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소설의 동물성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처음의 짐승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생명들이었다면, 성장한 막내를 둘러싼 세계에서는 어떤 몸과 욕망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규범이 한층 엄격하게 작동한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몸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 질서가 승인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정상적인’ 존재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누가 그 정상성의 기준을 정하는가. 같은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서로의 모든 차이를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막내의 퀴어 정체성은 가족이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남성성과 충돌하고,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사랑이 어떤 조건 아래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면, 그 사랑은 한 인간의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소설에 겹쳐진 인종과 계급의 조건을 통해 더욱 복잡해진다. 세 형제는 푸에르토리코계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의 중심에서 떨어진 삶을 살아간다. 가난과 혼혈이라는 조건은 이들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막내의 성적 정체성은 그 위에 또 다른 차이를 더한다. 태어난 집의 형편과 물려받은 혈통, 몸에 밴 습관과 뒤늦게 알아차린 욕망은 서로 얽히며 한 사람의 삶에 저마다 다른 흔적을 새긴다. 그 흔적들은 같은 몸 안에 축적되지만, 세상은 그중 일부만을 골라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한다. 막내가 경험하는 소외를 이해하려면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가족 안에서 어떤 몸으로 성장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세계는 처음부터 여러 경계가 포개진 장소였으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 경계들의 의미를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저스틴 토레스가 이 이야기를 구성한 방식 역시 이러한 성장의 경험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소설은 유년의 사건들을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정돈하기보다 짧고 감각적인 장면들로 나누어 제시한다. 어떤 기억은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어떤 기억은 웃음소리와 춤의 리듬으로, 또 다른 기억은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되살아난다. 삶의 모든 순간이 같은 밀도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며, 어린 시절의 경험은 사건의 순서보다 그때의 감각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파편적인 서술은 이러한 기억의 성질을 문학의 형식으로 옮겨 놓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에는 시간이 흐르고, 독자는 그 생략된 시간 속에서 세 형제가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감지한다. 이러한 형식적 관심은 이후 발표한 『암전들』에서 더욱 대담하게 확장된다. 『우리, 짐승들』이 유년의 기억을 짧은 장면들로 엮었다면, 『암전들』은 사진과 역사적 기록, 검게 지워진 문서와 이야기의 조각들을 교차시키며 지워진 퀴어의 역사를 더듬는다. 전자가 개인의 기억에 생긴 공백을 감각으로 채운다면, 후자는 기록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그 공백 자체를 통해 드러낸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이 작품을 자서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다. 이 태도는 『우리, 짐승들』의 문학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인간은 지나온 경험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그것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 허구는 이러한 재구성에 더 넓은 가능성을 부여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벗어나, 경험이 한 인간의 내부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소설적 사건으로 꾸미는 방식을 거부하고, 실제로 들었던 말과 생활의 세부를 통해 한 개인과 계급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한쪽이 허구를 통해 경험의 감각을 되살린다면, 다른 한쪽은 사실에 대한 충실함을 통해 삶의 사회적 실체에 접근한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개인의 경험이 문학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경험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토레스가 선택한 파편적인 형식과 서정적인 문장은 유년의 사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간을 통과한 존재가 자신의 과거를 어떤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소설의 목소리가 변화하는 방식이다. 초반의 세 형제는 함께 먹고 뛰고 소리치는 ‘우리’의 언어로 묶여 있다. 그러나 막내의 감각과 욕망이 뚜렷해질수록 집단의 목소리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이는 서술 기법의 변화이면서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막내는 자신을 형성한 가족의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그 기억을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점차 자신의 것이 된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경험의 주체였다면, 성장한 ‘나’는 그 경험을 다시 서술하는 주체가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 짐승들』에서 성장은 독립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한때 세 형제는 서로의 허기를 알아보는 데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같은 식탁에 달려들고, 같은 두려움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서로의 웃음소리를 자기 것처럼 터뜨렸다. 그러나 같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가장 깊이 사랑했던 세계가 자신의 모든 모습을 허락하지 않을 때, 익숙한 체온조차 낯선 감각으로 바뀐다. 막내는 그 세계의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로는 발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 개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 리듬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제 그 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소리를 조금씩 익혀 간다. 누구의 박자에도 맞추지 않은 채,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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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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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떠나온 집의 방 하나를 떠올려 보라.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한 형태로 살아남는다. 오래된 집의 벽지와 가구의 마모된 표면, 빛이 바랜 사진과 서랍 깊숙이 방치된 물건들은 지나간 시간의 일부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흔적들이 증언하는 과거는 온전한 생애의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은 소중해서 보관되었고, 어떤 것은 버릴 기회를 놓쳤으며, 또 어떤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남았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현재의 의식이 선택한 장면들이 뒤얽혀 있다.

브라이언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부모의 죽음 이후 남겨진 세계를 탐색하는 기록이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성인이 된 무렵 아버지를 잃은 그는 가족이 살았던 집과 유품, 사진을 통해 유년기의 시간을 다시 더듬는다. 그러나 이 책은 상실의 경위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회고록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집, 사물들, 사진, 몸들, 장소들이라는 다섯 가지 매개를 따라 흩어진 기억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문학과 철학, 시각예술에 관한 비평을 교차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건너뛰며 예기치 않은 순간과 감각을 따라 움직인다. 오래전에 맡았던 냄새 하나가 잊었던 계절을 불러내고, 낯익은 물건의 질감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을 되살린다. 기억은 현재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서로 다른 시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시간과 의식의 문제를 탐구한 앙리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완전히 소멸한 시간이 아니다. 지나간 경험은 현재의 지각과 행위 속에서 선택적으로 현실화되며, 기억은 그때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겨울은 지금도 공기의 온도와 냄새로 되살아난다. 유난히 추운 지역이었지만, 방 안을 후끈하게 데워 놓고 창문을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만큼 열어 두곤 했다. 틈으로 흘러든 겨울 공기를 마시며 잠들기 위해. 밤새 냉기의 향을 맡기 위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공기는 따뜻한 방 안에서도 특유의 냄새와 차가움을 잃지 않는다.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 밤사이 쌓인 눈을 바라보고, 찬 공기가 방 안을 채우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시절의 겨울은 달력 속에서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몸은 아직 그 공기의 온도를 알고 있다.

딜런이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중첩이 드러난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은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아버지의 부재, 남겨진 형제들이 유품과 재산의 처분을 두고 겪었던 갈등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집은 한때의 안식처이면서 고통의 지속을 목격한 장소였다. 집을 버리고 떠나던 아침에야 자신이 그곳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깨달았다는 고백(80쪽)은 공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 시간의 층위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어떤 장소를 떠난 뒤에야 그곳에서 자신이 견뎌 온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인간의 기억과 상상력이 응축되는 친밀한 공간으로 사유했다. 그러나 딜런의 집에는 친밀함과 적의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유년기의 공간을 그리움으로만 회상하는 관습은 이곳에서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가족이 함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행복한 기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오래 거주했다는 이유로 한 장소를 무조건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의 벽과 방들은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을 오랫동안 수용한다. 과거의 공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는 그곳에서 경험한 애정만큼이나 그 안에서 겪었던 고통과 불화를 인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딜런이 집을 떠나는 행위는 물리적인 이주인 동시에, 오랫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가족의 역사와 거리를 확보하는 사건으로 읽힌다.

집에 남겨진 사물들 역시 복잡한 문제를 품고 있다. 딜런은 과거를 의미 있는 물건들의 아카이브 안에 온전히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경계한다. 남겨진 물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과거에 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지보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아버지의 책과 어머니의 기도서, 오래된 사진은 부모가 실재했다는 물질적 증거이지만 그들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독서인이라면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에서 구입 당시의 장소와 날씨, 그날의 감정까지 떠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책에는 구매한 날짜나 당시의 기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그 책을 발견했던 서점의 풍경과 책을 고르던 순간의 감각이 뒤따라오곤 한다. 사물이 간직한 시간의 상당 부분은 사물의 표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몇 점의 유품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는 그 물건이 전하지 못하는 시간을 상상으로 메워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사진은 사물과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증언한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에 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그 시간을 통과했는지까지 증명하지는 못한다. 딜런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는 이러한 간극이 응축되어 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아직 누군가의 부모로만 규정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었고, 아들의 기억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관계와 욕망이 존재했다. 가족사진은 친밀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 친밀함이 얼마나 제한된 이해 위에 성립하는지를 드러낸다. 가까운 사람을 오래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삶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확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탐구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이 증명하는 과거의 실재성과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사유했다.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이러한 사진의 시간성을 가족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사진 속 부모의 모습이 아무리 또렷하게 보존되어 있더라도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깊이까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머니의 질병으로 변형된 몸에 관한 기억은 이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고통의 흔적과 그 고통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의 경험 사이에는 타인이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에는 그 사람을 자신의 기억으로만 이해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딜런에게 어머니는 병을 앓던 사람이자 자신을 돌보았던 사람이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 세 아들과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욕망, 부모라는 역할로 설명되지 않는 독립적인 생애가 있었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관계의 역사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거리를 성급하게 해소하려는 순간 타인의 삶은 기억하는 사람의 서사 속으로 흡수되기 쉽다. 딜런이 훗날 자신의 책을 돌아보며 부모가 실제로 무엇을 겪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회고한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의 의미도 변화한다. 어린 시절의 상실을 성인이 된 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으로 가득했던 기억 속에 부모의 고통을 위한 자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 애도는 한 번의 이해로 완결되는 경험이 아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해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그 변화는 때로 자신이 간직해 온 기억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딜런의 글쓰기가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문학과 예술에 관한 비평으로 확장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의 매끄러운 가족사로 정리하는 대신, 다른 작가와 예술가들이 시간과 상실을 다루어 온 방식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킨다. 비평은 개인적인 고통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를 마련한다.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행위는 이미 지나간 사건에 구조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경험들 사이에 관계를 형성한다.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한다. 딜런에게 글쓰기는 사라진 가족의 역사를 탐색하는 작업이자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읽는 과정이 된다.

암실에서는 빛에 노출된 흔적이 현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의 암실에서도 과거의 장면들은 현재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어두운 방에서』의 글쓰기는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현상하는 작업과 닮아 있다. 사물은 우연히 살아남고, 사진은 한순간의 존재를 보존하며, 장소는 그곳을 떠난 사람의 감각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잃어버린 사람과 시간은 남겨진 흔적을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며, 기억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어두운 방은 그렇게 사라진 것들의 흔적과 아직 해석되지 않은 자신의 역사가 함께 현상되는 장소가 된다.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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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 - 어려운 과학 개념부터 뜻밖의 뒷이야기까지, 술술 읽히는 과학 고전 가이드 ㅣ 지식의 눈 4
박균호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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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과학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었을까. 지식은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언어와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분류는 어느 순간 지식의 질서를 넘어 사유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기준이 된다. 문과와 이과라는 익숙한 구분도 그렇다. 학문을 선택하기 위한 편의가 개인의 지적 성향을 규정하고, 아직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마저 미리 제한한다. 과학은 누군가에게 허락된 언어처럼 느껴지고, 문학과 철학은 또 다른 누군가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새 지식의 경계는 인간이 스스로 그어 놓은 사고의 경계와 겹쳐진다.

박균호의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는 이러한 구분을 제목에 내세운다. 문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저자는 과학 고전을 읽으며 겪었던 어려움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과학자에게 익숙한 개념이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낯선 언어로 다가오고,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설명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경험.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의문을 하나씩 풀어내며 460년에 걸친 과학의 역사를 스물일곱 권의 고전으로 엮는다. 문과의 시선이라는 표면적인 구분을 따라 책 속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학문 사이에 놓인 경계의 성격을 다시 살피게 된다.

학창 시절 수능 국어의 비문학 지문을 분석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문학이 언어의 이면에 놓인 의미와 서사의 흐름을 탐색하는 영역이었다면, 비문학은 문장 사이의 인과와 논리적 구조를 해독하는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이었다. 특히 과학 지문 앞에서 유독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문과였던 내게는 그 역시 하나의 텍스트였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국어다.’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문장의 관계를 살피고 논증의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생소한 원리가 어느새 하나의 질서로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호기심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지식의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과 실제로 지식을 이해하는 방식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준다. 과학적 개념을 다룬 문장도 언어의 구조와 논리적 관계를 통해 읽을 수 있으며, 익숙한 독해의 방법은 낯선 학문으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 하나의 분야에서 익힌 사고의 기술이 다른 분야를 이해하는 데 활용되는 순간, 학문적 분류는 더 이상 호기심의 범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관찰된 현상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질서를 추론하는 일과,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인간의 경험을 서술하는 일에는 공통된 지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익숙한 설명에 의문을 품고, 서로 떨어져 있던 사실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려는 움직임이다. 학문마다 사용하는 도구와 검증의 기준은 달라도 인간의 호기심은 그 구획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과학 고전의 역사는 이러한 사유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이해하던 오래된 질서를 재구성했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이어진 자연의 역사 속에 위치시켰다. 두 발견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확신을 수정해야 했고, 자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새롭게 이해해야 했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달라질 때, 그 세계에 속한 인간의 의미 역시 다시 사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계는 문학과 과학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창조자의 책임을 길어 올리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사회를 상상한다. 과학적 가능성은 문학의 상상력 속에서 윤리적 문제로 확장된다. 새로운 기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결정되지는 않는다. 생명과 자유, 책임과 존엄을 둘러싼 논의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성찰이 함께 요구된다.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같은 세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며, 어느 한쪽의 언어만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마주한다.

이 책에서 더욱 주목할 부분은 과학적 발견의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완성된 이론을 앞세우기보다 과학자들이 처음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어떤 관찰과 추론을 통해 기존의 설명을 수정했는지 살펴본다. 다윈의 망설임과 뉴턴의 연구 환경, 과학자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은 과학사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끌어온다. 교과서에 정리된 법칙은 간결하지만, 그 법칙이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에는 실패와 우연, 반복되는 검토가 축적되어 있다. 과학적 지식의 권위는 이러한 과정을 지워 버릴 때보다 그 과정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사실이 왜 타당한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이다. 이미 확립된 결론을 기억하는 일에는 정해진 답이 있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근거를 검토하는 과정에는 끊임없는 판단이 필요하다. 저자가 과학 고전을 읽으며 반복해서 마주했다는 ‘왜?’라는 물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다시 읽고, 생략된 설명을 찾아내고, 낯선 개념을 익숙한 경험에 연결하는 과정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서에서 벗어나게 한다. 오렌지와 이쑤시개로 지구 둘레를 측정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만유인력을 우리 곁의 사람 사이에도 작용하는 힘으로 풀어내는 방식에는 추상적인 지식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전달하는 일은 이해의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독자가 스스로 사고를 이어 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설명의 친절함과 지적 엄밀함이 함께할 때, 독자는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의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의 설명이 수정될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 또한 이러한 탐구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독서의 태도는 책 밖의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과학 지문이 정답을 찾기 위한 독해의 대상이라면, 시험을 마친 뒤의 삶에서는 과학적 지식이 스스로 판단해야 할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낯선 정보를 분별하는 능력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권위를 내세운 정보가 일상에 끊임없이 유입되는 시대에, 전문적인 용어와 숫자는 주장에 신뢰감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건강과 환경,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접할 때 중요한 것은 전문가의 결론을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보다 그 결론이 어떤 근거와 조건 위에 성립하는지 살피는 능력이다. 과학 고전이 보여 주는 관찰과 검증의 역사는 우리가 정보를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험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선택하면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지만, 삶에서는 자신의 판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까지 헤아려야 한다. 지식을 이해하는 경험이 자신의 판단을 구성하는 능력으로 이어질 때, 독서는 현실을 해석하는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책은 스물일곱 권의 과학 고전을 한데 모으면서도 독자가 반드시 정해진 순서를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관심 있는 주제에서 출발해 다른 고전으로 이동할 수 있고, 각 장에 마련된 질문과 추천 도서를 통해 새로운 독서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구성은 지식의 세계에 진입하는 경로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누군가는 우주의 역사에서, 누군가는 생명의 구조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발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보다 그 호기심이 다음 탐구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있다.

학교 교육과정은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학문의 경계가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분이 한 사람의 지적 가능성을 미리 결정할 이유는 없다. 과학 고전의 역사는 인간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설명을 수정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 온 과정이고, 그 역사를 읽는 일 역시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의 범위를 돌아보게 한다. 『문과의 눈으로 보면 과학 고전이 더 재밌어진다』는 과학을 낯설어하는 독자에게 하나의 통로를 마련한다. 그 통로를 따라가며 발견하게 되는 것은 스물일곱 권의 과학 고전과 더불어, 학문의 경계 앞에서 멈추었던 자신의 호기심을 다시 움직이게 할 가능성이다.

✏️도서출판 갈매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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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
우샤오러 지음, 정세경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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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애에는 보이지 않는 마감일이 있다. 몇 살에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뒤에는 안정된 직업을 얻으며, 정해진 시기에는 어른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성적과 순위, 합격과 탈락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삶은 언제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가 된다. 이 질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를 요구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에는 일정한 눈금이 없다. 어떤 아이에게 열일곱 살은 무사히 지나온 한 해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벗어나기 어려운 계절이다. 사회가 측정하는 성장의 속도와 한 인간이 실제로 견뎌온 시간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놓여 있을까.

방과 후 38분, 명문 여학교의 학생 쑤밍쉬안이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제자의 죽음을 마주한 교사 우이광에게 그날의 사건은 오래전 자신의 유년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교사로서 사건의 책임을 요구받는 현재와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던 과거가 교차하면서, 살아남은 소녀가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작가는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는 서사에 우이광의 성장 과정을 겹쳐 놓는다. 그 결과 한 사람의 비극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가족과 학교, 사회가 아이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해 왔는지를 살피는 일로 확장된다.

실제로 우샤오러가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는 2019년과 2020년 타이완대학교와 자신의 모교인 타이중여고에서 잇따라 발생한 학생들의 죽음이 있었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개별 사건의 비극성만큼이나, 그 죽음에 자신을 겹쳐 보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다만 소설은 특정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기록이 아니며, 쑤밍쉬안의 삶을 현실의 어느 한 학생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실제의 비극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은 허구의 인물들을 통해, 한 사람이 살아갈 의지를 잃어가는 사회적 조건을 문학의 언어로 탐색한다.

우이광의 어린 시절에는 사랑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 할 조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요구하는 성취는 딸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었으나, 그 약속을 지키는 책임은 언제나 아이에게 주어졌다. 좋은 성적과 올바른 선택,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향한 요구 속에서 우이광은 자신의 감정보다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결합하고, 부모의 기대는 점차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자기인식은 성취가 멈추는 순간 자신의 가치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심리학자 졸린 E. 헤인스와 니컬라 S. 슈테는 2023년 발표한 논문 「Parental Conditional Regard: A Meta-analysis」에서 부모의 조건부 인정과 자존감의 불안정성, 우울 증상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부모가 기대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애정과 승인을 달리할 때, 자녀는 외부의 기준을 자기 가치의 척도로 삼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보여주는 연관성은 우이광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누군가의 칭찬을 얻기 위해 시작한 노력이 어느 순간 자신을 심판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바뀌는 과정. 부모가 곁에 없어도 평가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는 자신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어른을 마음속에 만들어 낸다.

아이의 삶을 제한하는 가장 익숙한 명분은 사랑과 보호다. 부모는 자녀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며 선택에 개입하고, 학교는 학생의 미래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성적과 행동을 관리한다. 성공을 향한 열망이 클수록 아이가 실제로 원하는 삶은 중요성을 잃는다. 부모의 두려움은 아이의 의무가 되고, 학교의 평판은 학생이 감당해야 할 성과가 된다. 『그 소녀』에서 교육은 개인의 가능성을 넓히는 과정인 동시에,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를 미리 결정하는 제도로 작동한다. 아이를 위한다는 확신이 아이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순간, 보호와 통제는 같은 문법을 사용한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선택들은 가해와 피해의 경계마저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복잡한 사정이 언제나 가혹한 행동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샤오러는 우이광의 어머니에게 불행한 유년이나 특별한 희생의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가한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그 사람의 상처부터 찾아야 한다는 관습을 거부한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교사,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학생들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그 이유들이 모인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것은 아니다. 성취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어른은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인 동시에 그 가능성에 순위를 매기는 사람이 된다. 한때 평가받던 아이가 자라서 다른 아이를 평가하는 위치에 서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제도가 지속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일상성에서 비롯된다.

우이광 역시 그 반복의 한가운데 서 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세계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이제 그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교사다. 어린 시절의 고통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아이의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견뎌온 경험을 기준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가늠할 위험도 존재한다. 우이광이 제자의 죽음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함께, 현재 자신이 어떤 어른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다. 피해의 기억이 타인을 이해할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잔인하면서도 중요한 깨달음이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날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일까. 반대로, 그 상처를 여전히 안고 살아간다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까. 우이광은 열일곱 살의 절망을 지나 일상을 이어왔고,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삶을 지속했다는 사실과 그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은 고통의 소멸을 보증하지 않으며, 성숙이라는 이름 아래 미처 이해하지 못한 감정들이 오래 보존되기도 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 고정된 장면으로 존재하면서도 현재의 관계와 선택에 개입한다. 한때 견뎌냈다고 믿었던 시간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순간과 마주한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최창용과 조슈아 P. 머스키가 2025년 발표한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and health-related outcomes in early adulthood: Evidence from the Korean Welfare Panel Study」는 한국복지패널의 종단자료를 분석해 아동기 역경 경험과 이후의 건강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청소년기의 우울 증상이 아동기 역경과 초기 성인기의 우울 증상 사이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매개한다는 결과는 과거의 경험이 이후의 삶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상처가 동일한 경로를 거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생애를 하나의 연구 결과로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성장의 시간이 반드시 치유의 시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우이광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읽게 한다.

우이광에게 제자의 죽음은 자신의 유년을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 자체보다, 과거에 부여했던 의미가 현재의 경험을 통해 달라진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사건들을 연결해 하나의 생애를 구성하지만, 그 이야기는 완성된 기록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어제까지 극복의 증거였던 시간이 오늘에는 외면해 온 감정의 흔적으로 읽힐 수 있다. 살아남았다는 말 역시 그러하다. 그 말에는 견뎌온 시간에 대한 긍지가 담겨 있으면서도, 그동안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슬픔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우이광의 성장은 과거의 소녀를 지워가는 일보다, 그 소녀가 겪었던 고통을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배우는 과정으로 읽힌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타인의 고통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한 소녀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가정환경과 성적, 친구 관계와 심리적 어려움을 살피며 무엇이 비극을 불러왔는지 밝혀내려 한다. 그 노력에는 책임을 규명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이해 가능한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고 싶은 욕망도 작용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이해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내면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이 고통받았던 존재의 전부를 설명하는 권한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우샤오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작품의 서술 속에 보존한다. 죽음의 이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의 삶이 드러나지만, 그들의 경험은 하나의 정답을 완성하기 위한 증거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특히 우이광과 쑤밍쉬안의 고통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유년을 통해 타인에게 접근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의 존재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태도를 포함한다. 작품이 죽은 소녀에게 섣부른 설명을 부여하지 않는 방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까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그 소녀』의 저항은 우이광 개인의 상처를 넘어선다. 자신을 억압했던 기준을 의심하는 일, 그 기준이 다음 세대에게도 정당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피는 일,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경험으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서로 연결된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책임을 모든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고통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삶을 성적과 성취만으로 평가해 온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어른의 자격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견뎌냈는지보다, 자신의 경험이 타인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태도에서 드러나지 않을까.

원제 『那些少女沒有抵達』(그 소녀들은 도착하지 못했다)에는 도착하지 못한 소녀들이 있다. 그들이 도달해야 했던 곳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졌을까. 어떤 삶은 정해진 시간표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어떤 삶은 그 시간표를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선택을 발견한다. 우샤오러는 살아남은 한 사람의 현재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소녀들의 시간을 함께 기록하며, 성장과 성공을 동일한 말로 취급해 온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의 삶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성장의 비유로 소비할 수는 없다. 그 삶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억에서 지워서도 안 된다. 도착하지 못한 소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지금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떤 목적지를 강요하고 있는지 살피는 일과 연결된다. 그 소녀들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시간 앞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성장의 순서와 성공의 기준은 더 이상 이전처럼 자명할 수 없다.

✏️도서출판 빈페이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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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 바깥에서 -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소수자가 바꾼 쓰기의 역사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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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에게는 우화가, 안데르센에게는 동화가 따라붙는다. 이름 하나로 작가의 세계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은 문학사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기억의 방식이다. 그러나 익숙한 이름은 복잡한 생애를 몇 개의 특징으로 압축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경험들은 문학적 명성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어린이에게 교훈을 전하는 이솝의 이야기에서 노예의 처지를 읽어내거나, 안데르센의 환상적인 동화에서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익숙한 작품을 낯선 역사 속에 다시 놓는 경험이다. 문학사는 작품을 보존하는 동시에 그 작품을 탄생시킨 세계의 일부를 망각하기도 한다.

박홍규의 『표준어 바깥에서』는 정리되고 분류된 문학사의 이면을 살핀다. 노예와 여성,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였던 열일곱 작가의 삶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그 성취를 가로막았던 질서를 함께 검토한다. 이들이 겪은 가난과 차별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전기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문학이 누구의 경험을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으며, 누가 자신의 언어를 공적인 기록으로 전환할 기회를 얻었는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에 부여된 명성 아래에서 그 작품이 태어난 사회적 위치를 다시 찾아낸다. 어떤 작가가 문학사에 편입되는 순간, 그의 작품은 분류되고 해석되며 하나의 권위 있는 이름으로 정착한다. 이러한 과정은 작품의 전승을 가능케 하지만, 해석의 방향을 제한하는 작용도 한다. 문학의 정전, 곧 오랜 세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읽기와 교육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의 목록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관한 선택이면서 무엇을 중요하게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판단이기도 하다. 이미 확립된 작가의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그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생애와 사상은 부차적인 정보로 취급되기 쉽다. 이솝과 디킨스, 마크 트웨인의 저항적 면모를 다시 읽는 일은 익숙한 문학적 명성 아래 가려졌던 사회적 현실을 복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문학적 권위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도 깊이 관여한다. 문자를 익힐 시간과 교육받을 기회, 책을 소유할 경제력, 혼자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은 오랫동안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언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이 축적되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러한 불평등을 설명하며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게 문화자본은 경제적 재산처럼 소유하고 축적할 수 있는 지식과 교양, 언어적 능력과 학력 등을 포괄한다. 가정과 교육환경을 통해 습득한 문화적 자원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의 기준이 되면서, 계급의 차이는 개인의 취향과 재능의 차이로 받아들여진다. 학교는 그 차이를 평가하고 자격으로 공인함으로써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관여한다. 어떤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교양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도달하기 어려운 자격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적 격차는 개인의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고,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가 다시 보편적인 기준으로 승인된다.

노예 출신 극작가 테렌티우스의 사례는 이러한 권력의 작동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뛰어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진정한 저자인지 의심받는 이유가 되었다는 일화에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이 응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은 성취를 통해 증명되지만, 어떤 사람의 성취는 그가 속한 신분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 그의 사례에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그 글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자격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장벽이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의 언어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문장을 완성하는 능력 외에도 그 문장을 쓴 사람에 대한 기존의 판단을 통과해야 한다. 언어의 소유권은 문자 자체를 익히는 일보다 복잡한 사회적 승인 과정을 포함한다. 스웨덴의 청소노동자 마이아 에켈뢰브가 버려진 종이 위에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에서 글쓰기의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종이와 책상이 갖추어진 방을 상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창작자의 모습과, 노동의 틈에서 버려진 종이를 찾아 글을 쓰는 사람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은 창작에 필요한 물질적 독립을 상징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방을 가질 가능성부터 제한되어 있었다. 에켈뢰브의 글쓰기는 문학적 재능을 둘러싼 낭만적인 상상에 현실의 무게를 더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확보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노동 이후에도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려는 행위가 그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기록이 문학으로 읽히기 시작할 때,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던 삶도 새로운 가시성을 얻는다. 노동자의 피로와 빈곤, 여성의 욕망과 소수자의 경험은 오랫동안 기록할 가치가 있는 세계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을 통해 사회에서 무엇이 보이고 들리며, 누가 발언할 자격을 갖는지가 결정되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는 이를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회의 질서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자리와 역할을 배분하며, 어떤 이들의 말은 공적인 발언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이들의 말은 소음처럼 취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은 기존의 감각적 질서를 재편하여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공동의 세계 안으로 불러들일 가능성을 지닌다. 한 사람의 사적인 경험이 문장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공적인 경험으로 확장된다. 다만 기록된 모든 목소리가 동등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출판과 유통, 비평과 교육의 제도는 여전히 어떤 언어를 더 널리 전달할 것인지 선택한다. 글쓰기의 가능성이 확대된 이후에도 그 글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건은 별도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더욱 중요하게 읽히는 부분은 저자가 글쓰기의 권리와 글쓰기의 지향을 구분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문자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이 작가로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획득한 언어를 다시 지배적인 가치에 봉사하도록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제되었던 사람이 중심에 진입하는 일과 중심을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바꾸는 일에는 서로 다른 윤리적 결단이 요구된다. 저자가 말하는 '옳은 글'은 바로 이러한 차이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얻은 사람이 그 목소리를 통해 누구의 삶을 드러내고 어떤 질서를 의심하는가. 글쓰기의 자유는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그 표현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관한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나 '옳은 글'이라는 기준에는 조금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의 경험을 드러내고 지배 질서를 비판하는 문학의 가치는 분명하지만, 문학적 성취를 윤리적 올바름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언어와 형식, 해석의 다의성은 때때로 작가가 명시적으로 표방한 사회적 입장보다 복잡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문자 권력의 위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올바름의 기준을 절대화한다면, 문학이 지닌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 역시 제한될 수 있다. 권위를 의심하는 태도는 저항적인 글쓰기의 가치와 한계를 살피는 과정에서도 유효해야 한다.

이러한 긴장은 저자의 문장에서도 느껴진다. 머리말과 맺음말에서는 유사한 주장이 반복되고, 강조를 위해 앞선 진술을 다시 풀어 쓰는 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그 반복이 저자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한편, 사유가 더 깊이 전개될 수 있는 자리에서 논의의 밀도를 느슨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문장력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문장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독자의 기준 역시 성찰의 대상이 된다. 사회적으로 승인된 언어의 규범을 의심하는 일과 문학적 표현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일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문장을 평가하는 행위 자체에도 문화적 권위가 개입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학적 판단을 권력의 산물로 환원할 수도 없다. 이 책의 문체에서 느낀 아쉬움은 오히려 언어의 자유와 미학적 판단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과거보다 훨씬 널리 보급되었지만, 언어를 둘러싼 불평등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누군가는 풍부한 독서 환경과 교육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는 그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언어의 능력이 개인의 자질로만 설명될 때, 그 능력을 형성한 사회적 조건은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교육과 문화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에 따라 새로운 언어적 위계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자유를 논하려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선언과 함께, 누구에게 실제로 쓸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지도 살펴야 한다.

문학사의 이름들은 오랜 세월을 건너 살아남았지만, 그 이름을 둘러싼 현실까지 함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우화와 동화라는 익숙한 분류 안에서 이솝과 안데르센을 기억하는 동안, 그들의 작품에 스며든 시대의 불평등은 쉽게 잊힌다. 『표준어 바깥에서』가 복원하려는 것은 작가들의 숨겨진 생애인 동시에 그들의 문장이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다. 한 작가를 기념하는 일에는 그의 작품을 읽는 행위뿐 아니라 그 작품이 어떤 세계를 비판하고 어떤 삶을 가시화했는지 다시 살피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문학이 누구의 언어를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였는가를 묻는 일은, 우리가 지금 누구의 언어를 문학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틈새의시간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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