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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오래전에 떠나온 집의 방 하나를 떠올려 보라.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한 형태로 살아남는다. 오래된 집의 벽지와 가구의 마모된 표면, 빛이 바랜 사진과 서랍 깊숙이 방치된 물건들은 지나간 시간의 일부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흔적들이 증언하는 과거는 온전한 생애의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은 소중해서 보관되었고, 어떤 것은 버릴 기회를 놓쳤으며, 또 어떤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아남았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현재의 의식이 선택한 장면들이 뒤얽혀 있다.
브라이언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부모의 죽음 이후 남겨진 세계를 탐색하는 기록이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성인이 된 무렵 아버지를 잃은 그는 가족이 살았던 집과 유품, 사진을 통해 유년기의 시간을 다시 더듬는다. 그러나 이 책은 상실의 경위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회고록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집, 사물들, 사진, 몸들, 장소들이라는 다섯 가지 매개를 따라 흩어진 기억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문학과 철학, 시각예술에 관한 비평을 교차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건너뛰며 예기치 않은 순간과 감각을 따라 움직인다. 오래전에 맡았던 냄새 하나가 잊었던 계절을 불러내고, 낯익은 물건의 질감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감정을 되살린다. 기억은 현재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서로 다른 시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시간과 의식의 문제를 탐구한 앙리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완전히 소멸한 시간이 아니다. 지나간 경험은 현재의 지각과 행위 속에서 선택적으로 현실화되며, 기억은 그때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겨울은 지금도 공기의 온도와 냄새로 되살아난다. 유난히 추운 지역이었지만, 방 안을 후끈하게 데워 놓고 창문을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만큼 열어 두곤 했다. 틈으로 흘러든 겨울 공기를 마시며 잠들기 위해. 밤새 냉기의 향을 맡기 위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공기는 따뜻한 방 안에서도 특유의 냄새와 차가움을 잃지 않는다.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 열어 밤사이 쌓인 눈을 바라보고, 찬 공기가 방 안을 채우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시절의 겨울은 달력 속에서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몸은 아직 그 공기의 온도를 알고 있다.
딜런이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중첩이 드러난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은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아버지의 부재, 남겨진 형제들이 유품과 재산의 처분을 두고 겪었던 갈등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집은 한때의 안식처이면서 고통의 지속을 목격한 장소였다. 집을 버리고 떠나던 아침에야 자신이 그곳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깨달았다는 고백(80쪽)은 공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 시간의 층위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어떤 장소를 떠난 뒤에야 그곳에서 자신이 견뎌 온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을 인간의 기억과 상상력이 응축되는 친밀한 공간으로 사유했다. 그러나 딜런의 집에는 친밀함과 적의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유년기의 공간을 그리움으로만 회상하는 관습은 이곳에서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가족이 함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행복한 기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오래 거주했다는 이유로 한 장소를 무조건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의 벽과 방들은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을 오랫동안 수용한다. 과거의 공간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는 그곳에서 경험한 애정만큼이나 그 안에서 겪었던 고통과 불화를 인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딜런이 집을 떠나는 행위는 물리적인 이주인 동시에, 오랫동안 자신을 규정해 온 가족의 역사와 거리를 확보하는 사건으로 읽힌다.
집에 남겨진 사물들 역시 복잡한 문제를 품고 있다. 딜런은 과거를 의미 있는 물건들의 아카이브 안에 온전히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경계한다. 남겨진 물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과거에 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지보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아버지의 책과 어머니의 기도서, 오래된 사진은 부모가 실재했다는 물질적 증거이지만 그들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독서인이라면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에서 구입 당시의 장소와 날씨, 그날의 감정까지 떠올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책에는 구매한 날짜나 당시의 기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그 책을 발견했던 서점의 풍경과 책을 고르던 순간의 감각이 뒤따라오곤 한다. 사물이 간직한 시간의 상당 부분은 사물의 표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몇 점의 유품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는 그 물건이 전하지 못하는 시간을 상상으로 메워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사진은 사물과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증언한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에 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그 시간을 통과했는지까지 증명하지는 못한다. 딜런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에는 이러한 간극이 응축되어 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아직 누군가의 부모로만 규정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었고, 아들의 기억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관계와 욕망이 존재했다. 가족사진은 친밀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 친밀함이 얼마나 제한된 이해 위에 성립하는지를 드러낸다. 가까운 사람을 오래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삶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확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탐구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이 증명하는 과거의 실재성과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사유했다. 딜런의 『어두운 방에서』는 이러한 사진의 시간성을 가족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사진 속 부모의 모습이 아무리 또렷하게 보존되어 있더라도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깊이까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머니의 질병으로 변형된 몸에 관한 기억은 이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고통의 흔적과 그 고통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의 경험 사이에는 타인이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일에는 그 사람을 자신의 기억으로만 이해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딜런에게 어머니는 병을 앓던 사람이자 자신을 돌보았던 사람이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 세 아들과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욕망, 부모라는 역할로 설명되지 않는 독립적인 생애가 있었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관계의 역사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낸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거리를 성급하게 해소하려는 순간 타인의 삶은 기억하는 사람의 서사 속으로 흡수되기 쉽다. 딜런이 훗날 자신의 책을 돌아보며 부모가 실제로 무엇을 겪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회고한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실의 의미도 변화한다. 어린 시절의 상실을 성인이 된 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슬픔으로 가득했던 기억 속에 부모의 고통을 위한 자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 애도는 한 번의 이해로 완결되는 경험이 아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해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그 변화는 때로 자신이 간직해 온 기억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딜런의 글쓰기가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문학과 예술에 관한 비평으로 확장하는 방식에 있다. 그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의 매끄러운 가족사로 정리하는 대신, 다른 작가와 예술가들이 시간과 상실을 다루어 온 방식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시킨다. 비평은 개인적인 고통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를 마련한다.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행위는 이미 지나간 사건에 구조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경험들 사이에 관계를 형성한다.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한다. 딜런에게 글쓰기는 사라진 가족의 역사를 탐색하는 작업이자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읽는 과정이 된다.
암실에서는 빛에 노출된 흔적이 현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의 암실에서도 과거의 장면들은 현재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어두운 방에서』의 글쓰기는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현상하는 작업과 닮아 있다. 사물은 우연히 살아남고, 사진은 한순간의 존재를 보존하며, 장소는 그곳을 떠난 사람의 감각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잃어버린 사람과 시간은 남겨진 흔적을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며, 기억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어두운 방은 그렇게 사라진 것들의 흔적과 아직 해석되지 않은 자신의 역사가 함께 현상되는 장소가 된다.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