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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우붓 사우나
김재희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삶이 무너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조용히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익숙하던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을 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고, 오랜 시간 공들여 가꾼 터전을 떠나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날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지나며 자주 스스로를 실패한 존재라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정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은 화려한 재기의 서사가 아닌 어쩌면 가장 평범하고 현실적인 생존의 이야기이다. 사우나에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이 쌓여 간다. 손님이 찾아오고,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가족들은 웃다가도 다투고 서운해하다가도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나 극적인 기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알고 있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 함께 밥을 먹는 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일. 인간은 생각보다 소박한 것들에 의해 내일로 건너간다. 삶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대개 한순간에 찾아오지만, 삶을 다시 엮어가는 과정은 놀라울 만큼 더디다.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수행하며, 누군가와 식탁을 공유하는 행위. 그런 반복은 언뜻 변화 없는 정체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간의 풍랑 속에서 자신을 붙들어 매는 닻이 된다. 사람은 비범한 순간보다 평범한 일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세워 올리니까.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굳어 있던 근육이 천천히 풀어지듯,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는 흔히 곧바로 치유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지만, 실제의 삶은 조금 다르다. 어떤 기억은 오래 남고, 어떤 아픔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익숙한 밥 냄새, 같은 공간을 함께 견디는 사람들의 존재가 사람을 다시 따뜻하게 만든다. 우리는 거대한 희망보다 작은 온기에 더 오래 기대어 살아간다. 그러나 온기가 상처를 지워주지는 않는다. 상실 또한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다만 체온을 되찾은 사람은 같은 무게를 조금 다른 자세로 감당하게 된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던 몸도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듯이.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힘은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을 품은 채 다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온도에 있다.
가족은 가장 편안한 안식처인 동시에 가장 많은 상처가 오가는 공간이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쉽게 실망하고, 가까운 만큼 서운함도 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등을 돌리지 못한다. 사랑은 언제나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불평하면서도 밥을 차리고, 다투면서도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사소한 행동들 속에 숨어 있다. 이 작품이 그려내는 가족애는 눈물겨운 희생이나 이상적인 화목함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가족은 서로를 가장 많이 아프게 하면서도 가장 늦게 떠나는 사람들이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충분히 용서하지 못한 채 같은 식탁에 앉는 관계. 그래서 가족의 사랑은 특별한 사건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더욱 선명한 형태를 갖는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차가운 계절이 찾아온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진 듯한 날들도 있다. 그런 시간 앞에서 필요한 것은 다시 따뜻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발리 우붓 사우나』는 삶을 바꾸는 기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식어버린 하루를 조금 덜 차갑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운 계란 냄새가 배어 있는 찜질방 한구석처럼, 특별하지 않지만 오래 기억되는 온기. 그리고 그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은 내일도 여전히 곁에 머물 것 같은 체온의 예감이 아닐까. 뜨거운 물이 몸의 냉기를 밀어내듯, 누군가의 다정함은 삶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오래 머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빌려 계절을 건너고, 또 다음 날을 살아간다.
대한에서 동지까지, 절기는 한 해를 둥글게 감싸며 흘러간다. 『발리 우붓 사우나』는 상가 지하의 작은 사우나를 무대로 그 시간 속을 살아내는 가족의 생활을 담아낸 소설이다. 사우나의 뜨거운 탕이 몸의 냉기를 단번에 몰아내지는 못해도 다시 움직일 힘을 주듯, 이 책 역시 대단한 기적이나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삶의 방향을 잃어본 사람,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과 서운함을 함께 겪어본 사람, 화려한 성공담보다 생활의 온기를 좋아하는 사람, 계절의 변화를 천천히 음미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절기가 계절을 감싸듯, 사우나의 증기가 몸을 데워주듯 이 이야기는 서두르지 않고 독자 곁에 머문다. 그리고 뜨거운 탕에서 나오듯 조금 가벼운 걸음으로 책장을 덮게 된다. 내일을 향해 한 걸음쯤 더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도서출판 책과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