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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평점 :
천명관의 소설에는 늘 삶의 밑바닥이 등장한다. 가난하고, 어리석고, 욕망에 휘둘리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인물들. 그러나 작가는 한 번도 인간을 냉소의 대상으로 그려본 적이 없다. 가장 초라한 자리에서도 인간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력이 남아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확신보다는,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간다는 감각이 오래 남는다.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코디언』 역시 그런 작품이다. 전쟁이 지나간 서울의 판자촌, 세상에서 가장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들여다본다.
소설 속 아이들은 가진 것이 없다. 부모도, 집도, 미래도 없다. 폭력과 굶주림, 상실과 공포가 일상이 된 세계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나 작품은 비참함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천명관은 가장 추운 장소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뒤, 그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온기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상처를 지닌 아이들이 기대고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아코디언의 음색을 닮아 있다. 슬픔과 익살, 분노와 환희가 함께 숨 쉬는 악기. 서로의 부족함이 서로의 빈자리를 메우고, 혼자였다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들이 함께였기에 하루를 더 건너간다. 인간은 스스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손길과 시선 속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간다.
혈연은 가족을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언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마음, 그의 삶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심 또한 가족을 이루는 힘이기 때문이다. 동이는 누구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아이였지만, 가장 큰 어른이 된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어쩌면 누군가의 삶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가 아닐까. 책임은 의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의 세계를 기꺼이 짊어지는 행위에 가깝다.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그의 기쁨뿐 아니라 상처와 불안, 미래의 무게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임은 인간을 속박하기보다 오히려 넓혀준다. 타인을 품는 순간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사회는 흔히 인간을 능력과 성취로 평가하지만, 삶의 가장 본질적인 장면들은 대개 누군가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순간 인간은 비로소 혼자 살아남는 존재에서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로 바뀐다.
그런 의미에서 『아코디언』은 희망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다만 그 희망은 흔히 떠올리는 밝고 낙관적인 형태가 아니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 더 나은 내일은 쉽게 약속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어떤 이는 폭력의 상처를 평생 짊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아닌 서로를 향한 신뢰에 가깝다. 삶은 종종 견딜 수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지지만, 누군가와 같은 무게를 나누어 들 때 인간은 생각보다 멀리 걸어간다. 서로의 체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눈부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오늘을 함께 건너갈 사람을 잃지 않는 일이다. 희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니까. 삶을 지탱하는 것은 찬란한 전망이나 거창한 약속보다 함께 나누는 죽 한 그릇과 서로를 향해 건네는 작은 믿음일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그 믿음은 때로 죽보다 오래 생을 지탱하고, 집보다 깊은 안식처가 된다.
아코디언은 바람이 드나들어야 소리를 낸다. 한 번 수축하고, 다시 팽창하는 움직임 속에서 비로소 음악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상실과 사랑, 절망과 기쁨, 죽음과 생명이 번갈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아코디언』은 가장 척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잃지 않는 소설이다. 세상이 사람을 버리는 순간에도 사람은 사람을 품을 수 있다. 천명관은 전쟁과 가난의 풍경 너머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장면들. 『아코디언』이 들려주는 음악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다. 폐허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숨결, 그리고 그 숨결이 만들어낸 한 편의 합주. 죽은 자와 산 자의 체온을 모두 품은, 슬프고도 따뜻한 음악.
가난과 욕망, 폭력과 사랑이 뒤엉킨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생명력을 길어 올려온 천명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버려진 존재들의 곁에 머문다. 『고래』를 사랑했던 독자라면 익숙한 듯 낯선 그의 문장 속에서 다시 한번 거칠고도 뜨거운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가족이 반드시 혈연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사람, 사람에 대한 신뢰를 쉽사리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 거대한 영웅담보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끌리는 사람에게도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아코디언은 바람이 드나들어야 비로소 소리를 낸다. 『아코디언』 역시 마찬가지다. 상처와 결핍, 상실과 사랑이 스며들고 빠져나가는 자리에서 한 편의 음악이 태어난다. 1950년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서울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선율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래전 판자촌 골목에서 시작된 음색은 시간을 건너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진동한다.
✏️도서출판 창비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