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의 아버지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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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인간이라는 종을 당연함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을 뒤집어 보여주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전제들을 흔들어 놓는다. 『아버지들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한 고생물학자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그 죽음이 가리키는 방향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인류의 기원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가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베르베르는 가장 오래된 질문을 가장 흥미로운 방식으로 되살려낸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인류의 첫 조상을 찾기 위해 과거를 파고든다. 하지만 과거를 향해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인간은 늘 앞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싶을 때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강물이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듯, 인간 역시 자신이 흘러나온 곳을 이해할 때 비로소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다른 생명체들도 흔적을 남기지만, 자신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지나온 시간을 해석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는 것. 인류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학문적 탐구에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노력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진화의 정점이라 믿어 왔다. 자연을 해석하고, 문명을 건설하고, 우주를 탐사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베르베르는 그 확신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수백만 년 전 평원 위를 떠돌던 원시 인류와 오늘날의 인간 사이에는 놀라울 만큼 많은 공통점이 남아 있다. 두려움을 피하고, 생존을 갈망하며, 자신보다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다. 인류는 세계를 이해할수록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설명하는 능력은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별함에 대한 확신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겸손이다.

작가 인터뷰에서 베르베르는 최초의 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맹수의 위협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에게 세상은 공포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조금씩 두려움을 극복해 왔다. 불을, 도구를,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의 위험만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까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삶, 더 안전한 내일,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한 상상. 생존만으로 하루를 채워야 하는 존재에게 사유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이 별과 신화, 미래와 희망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견딜 만큼의 여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힘의 역사보다 상상력의 역사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태초를 향한 탐색인 동시에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류의 첫 조상을 찾는 여정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일이며, 더 나아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 된다. 과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된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위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먼 곳으로 향하기는 어렵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살인 사건과 음모, 추리와 반전 속에 철학적 통찰을 숨겨 놓는다. 인간이라는 종을 다시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 그리고 그 의심 끝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소설.

먼 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일수록 가끔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게 된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그런 시선을 과거의 가장 깊은 곳까지 데려가는 소설이다. 인간은 왜 인간이 되었는지 궁금한 사람, 인류의 역사와 진화의 비밀에 매혹되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믿음을 잠시 내려놓아 보고 싶은 이들에게 잘 어울린다. 추리 소설의 속도감 속에서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함께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한다. 태초를 향한 탐색은 결국 현재를 이해하는 일이 되고, 인간의 기원을 좇던 발걸음은 어느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돌아보게 만든다. 가장 오래된 과거를 향한 여정 속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서출판 열린책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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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
스즈키 도시타카 지음, 김소연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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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늘 지저귄다. 아침이면 창밖 나뭇가지에서, 공원 산책길에서, 이름 모를 숲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그 소리를 언어라고 생각한 적은 드물다. 새의 울음은 계절을 알리는 배경음 정도로 여겨졌고, 자연은 인간이 바라보는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세계는 인간의 언어를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다. 말하고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연은 침묵하는 대상이 되었고 다른 생명들은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스즈키 도시타카는 그 오래된 믿음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한다. 새의 소리를 설명하기보다 먼저 들으려 했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살폈다. 숲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20년 동안 박새를 관찰한 끝에 발견한 것은 단순한 행동 패턴이 아니었다. 위험을 알리고, 동료를 부르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신호를 조합하는 새들의 언어였다. 새에게도 새의 언어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인 동시에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 사실은 새로운 정보 하나를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이 언어이고 무엇이 지성이며, 누구에게 세계를 해석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오래된 기준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그 발견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새에 대한 새로운 정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인간이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이성적인 존재, 가장 뛰어난 존재로 규정하며 세계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언어 역시 그 특별함을 증명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박새의 언어가 드러나는 순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선명하게 그어 두었던 경계선은 흐려진다. 인간만이 의미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존재라는 믿음도 함께 흔들린다. 특별함을 증명하려는 시선이 강할수록 세계는 점점 단순해지고, 반대로 다른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세계는 훨씬 넓고 복잡해진다. 우리는 오랫동안 세계를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 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와의 만남은 설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는 해석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자연은 한 번도 침묵한 적이 없다. 숲에는 늘 수많은 신호가 오가고, 새들은 오래전부터 서로의 안부와 위험을 전하며 살아왔다. 다만 그 소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침묵이라고 믿었던 것은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태도였다. 듣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 의미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낯선 언어 앞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상대의 한계가 아닌 자신의 한계다. 들을 수 있는 만큼만 세상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의미를 부여해 온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새의 언어를 다루면서도 결국 듣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말하는 능력보다 귀를 기울이는 태도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아침마다 들리던 새소리가 전과는 다르게 들린다. 여전히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의미 없는 소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의 언어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던 시선은 조금 낮아진다. 그 순간 풍경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하나둘 존재로 돌아온다. 숲은 더 이상 침묵하는 배경이 아니고, 새소리는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다. 세계는 인간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무대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들이 겹쳐 흐르는 합창에 가깝다. 다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 노래를 알아듣지 못한 채 지나쳐 왔을 뿐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목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동안 자연은 풍경이 되었고, 다른 생명들은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인간만이 언어를 가진 존재라고 믿어온 사람, 숲과 새를 좋아하면서도 그 소리를 계절의 배경음쯤으로 지나쳐온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못했던 시간들을 천천히 되짚게 될 것이다. 언어와 소통의 본질에 관심 있는 사람, 그리고 익숙한 세계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계의 경계를 한 뼘 넓혀주는 독서가 되어줄 것이다. 스즈키 도시타카는 새의 언어를 밝혀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오래된 습관까지 함께 비춘다. 오늘, 나무 아래로 걸어가 “치지지지” 하고 울어보자. 동료를 부를 때 내는 박새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누가 아는가. 그 소리를 들은 박새 한 마리가 기꺼이 오늘의 동료가 되어줄지.

✏️도서출판 오팬하우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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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그 너머로 -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블랙홀까지 우주를 가로지르는 아찔하고 흥미로운 지적 모험
닐 디그래스 타이슨.린지 닉스 워커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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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앞에서는 시선을 오래 머물게 된다. 블랙홀과 암흑물질, 시공간과 양자역학 같은 단어들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아득한 거리감을 만든다. 이해하고 싶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세계. 그래서 우주를 다룬 책은 늘 두 가지 감정을 함께 안겨주곤 했다. 알고 싶다는 욕망과 끝내 다 알 수 없으리라는 예감. 『무한 그 너머로』는 그 간격을 메우려 애쓰기보다, 그 사이에 머무르는 즐거움을 보여주는 책이다. 복잡한 천체물리학을 설명하면서도 독자를 앞질러 달려가지 않는다. 같은 속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건넨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이름 모를 별자리에 이름을 붙이고, 밤마다 같은 자리를 지나는 별빛에서 질서를 발견하려 했다.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별을 신화로 설명하던 시대에서 수식으로 설명하는 시대로 넘어왔을 뿐,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같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오래된 호기심을 따라간다. 지구를 떠나 태양계를 지나고, 은하와 블랙홀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과정인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지의 세계를 동경해왔는지 보여주는 기록처럼 읽힌다. 알려진 세계의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는 일은 인간이 가장 오래 지속해온 습관 가운데 하나였다. 지도에 빈 공간이 남아 있던 시대에도, 밤하늘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늘 시선보다 먼 곳을 향해 걸어갔다.

우주의 규모를 숫자로 설명할 수는 있다. 몇 광년 떨어져 있고, 몇 억 년 전에 태어났으며, 얼마나 거대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지 계산할 수도 있다. 그 정교한 언어는 과학자들의 몫이지만, 경탄은 누구에게나 허락된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감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탄은 설명 이전에 도착한다. 밤하늘에 쏟아진 별을 바라볼 때, 허블 망원경이 촬영한 은하 사진을 마주할 때, 인간은 먼저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알고 싶다는 마음은 그 다음에 따라온다. 지식은 경이의 결과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거대한 것을 마주할 때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순간 비로소 크기를 잃는다. 우주가 가르쳐주는 것은 수많은 사실만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 그리고 그 좁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배움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태양과 행성, 성운과 블랙홀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끝없이 확장시켜온 존재들이었다. 아직 닿지 못한 세계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와 꿈을 품게 만든다. 별자리에 이름을 붙이고 신화를 만들었던 것도, 우주를 배경으로 수많은 소설과 영화를 탄생시켰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설명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인간은 미지를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왔다. 그래서 과학의 역사는 발견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서사가 태어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우주는 인간에게 가장 거대한 연구 대상인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원천이었다.

삶은 대개 가까운 것들로 채워진다. 오늘의 일정, 해결해야 할 문제, 반복되는 걱정들. 그러나 우주를 생각하는 순간 시선은 아주 멀리까지 뻗어나간다. 그 광대한 공간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지만, 동시에 그 광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멀리 있는 별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정확한 크기로 바라보게 만든다. 크게 느껴졌던 근심은 조금 가벼워지고,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들은 의외의 무게를 얻는다. 밤하늘은 아무 대답도 건네지 않지만, 그 침묵으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때로 불안보다 평온에 가깝다. 『무한 그 너머로』는 오래 잊고 있던 경이의 감각을 다시 꺼내 보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기쁨을 되돌려주는 책이다.

세상은 자꾸 가까운 것들만 바라보게 만든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시선은 어느새 발밑에 머문다. 그런 순간 『무한 그 너머로』는 고개를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한다. 과학은 어렵지만 SF는 사랑하는 사람, 밤하늘 아래에서 설명하기 힘든 경외를 느껴본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크기와 위치를 곱씹는 인문 독자, 삶이 너무 좁은 반경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우주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시간인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크기를 새롭게 가늠해보는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는 일이 결국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전해준다.

✏️도서출판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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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불안과 싸우지 말 것 - 두려움을 다스리고 나를 알아차리는 불교 심리학 공부
페터 베르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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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마음속 소란을 숨긴 채 살아간다. 페터 베르는 불안을 밀어내는 대신 바라보라고, 벗어나려 애쓰기보다 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라고 권한다. 이 얼마나 낯설고 역설적인 제안인가.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 말이 지닌 깊이가 드러난다. 불안은 늘 문밖으로 내쫓아야 할 손님처럼 취급되어 왔다. 그 감정이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 귀 기울이기보다 서둘러 침묵시키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공황장애 경험을 바탕으로 불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관찰자의 시선보다 통과자의 체온이 배어 있다. 수많은 심리학 책들이 증상과 해결책을 설명하는 데 머무른다면, 이 책은 고통을 겪어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언어로 독자를 맞이한다. 저자가 불안을 개인의 결함이 아닌 신호로 바라보는 태도는 무척 흥미롭다. 불안은 지금의 생을 다시 살펴보게 만드는 안내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음이 보내는 경고음을 끄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 무엇이 그 소리를 만들어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삶은 때때로 가장 아픈 방식으로 우리를 깨운다. 애써 외면했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은 채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고, 오래 미뤄둔 마음은 불안이라는 형태를 빌려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고통을 피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슬픔은 잊으려 하고, 외로움은 바쁨으로 덮어 버리며, 두려움은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우회로가 허락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충분히 슬퍼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 슬픔이 있고, 끝까지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힘을 잃는 두려움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불안을 피할수록 그것은 더 넓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불안을 직면할 때 비로소 마음은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한다. 어떤 감정들은 해결보다 통과를 요구한다. 괴로움은 존재의 예외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과 함께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조건이다. 비를 피할 수 없는 계절이 있듯 마음에도 피할 수 없는 날씨가 있다. 고통 자체보다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책 전반에는 심리학과 뇌과학, 진화심리학, 불교심리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힘은 지식의 양이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불교 심리학은 괴로움 자체보다 괴로움에 대한 집착과 저항을 주목한다. 저자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감정을 통제하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마음은 조금씩 숨을 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감정은 좀처럼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사랑도 모두 붙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밀어내려 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세상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인데도 사람은 자꾸만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우려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품어낼 수 있는 넉넉함이다. 그래서 마음의 평온은 무언가를 움켜쥐는 힘보다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힘에서 비롯된다.

살아가는 동안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을 때도,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도 불안은 늘 곁에 머물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불안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불안은 삶의 열기가 가장 짙어지는 자리에서 함께 태어난다. 『자신의 불안과 싸우지 말 것』은 마음을 단숨에 고쳐 주는 처방전이 아니다. 대신 오래 외면해 온 내면을 향해 문을 열어 보라고 손짓한다. 불안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두려움은 삶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 앞길을 비춰줄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을 멈추게 하는 법을 배우지만, 괴로움과 함께 머무는 법은 좀처럼 배우지 못한다. 모든 괴로움이 해결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탁한 물이 저절로 가라앉기를 기다리듯, 어떤 감정은 밀어내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보다 마음을 몰아붙이는 법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괜찮아지기 위해 애쓰느라 정작 자신의 괴로움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람에게도. 또한 명상과 불교가 말하는 마음의 풍경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그것을 잘라내야 할 잡초처럼 여겨 왔다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불안을 몰아내는 기술보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고,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보다 그 의미를 살펴보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쉼 없이 자신을 고쳐야 한다고 믿어 온 사람이라면, 이 책이 내어주는 고요한 자리에 잠시 앉아 볼 만하다.

✏️도서출판 갈매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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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소년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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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상처는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다. 상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때로는 상대를 잃어버리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죽음을 숨긴 채 34일을 견딘 열네 살 소년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충격적인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시선은 사건의 진실보다 그 진실에 이르게 된 시간들에 머문다. 세상은 소년이 무엇을 했는지 묻지만, 소설은 그보다 먼저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밀어 넣었는지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 아이의 비행도, 한 부모의 실패도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붙들고 버티던 두 사람의 고단한 생존기다.

사랑과 폭력은 이 작품 속에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랑이 두려움과 불안, 결핍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상대의 행복보다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돌봄이 아닌 관리가 되고 이해가 아닌 감시가 된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은 때때로 가장 교묘한 자기기만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본래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감정이지만, 불안에 사로잡힌 사랑은 상대를 통제함으로써 안도감을 얻으려 한다. 그 순간 사랑은 소유의 형태를 띠게 된다. 타인을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착각 가운데 하나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감정이지만, 소유는 상대를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두려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상대의 성공을 응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실패를 보상받고 싶어 하고, 상대의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의 불안을 덜어내고 싶어 한다. 그런 욕망은 대개 애정이라는 포장지 속에 숨겨진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악의를 품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잔인해서가 아니라 연약해서 서로를 다치게 한다. 두려움에 휘둘리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며, 사랑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불안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인간은 상대를 바꾸려 들고, 그 순간 사랑은 상처를 남기기 시작한다.

누군가 괜찮냐고 물을 때마다 괜찮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체념. 구조받지 못한 슬픔은 그렇게 침묵이 된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슬픔은 개인의 내부에서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 자라난다. 그것은 침묵이 되고 거짓말이 되고 분노가 된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표현되지 못한 슬픔은 마음속 어딘가에 머물며 다른 방법을 찾는다. 때로는 체념이 되고, 분노가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적의가 된다. 인간은 잊음으로써 고통을 극복한다고 믿지만, 많은 감정은 사라지는 대신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마음은 견디기 어려운 감정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표류 소년』은 사랑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있었기에 더욱 비극적이었던 이야기다.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떠날 수 없고, 상처 입히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관계. 현실의 사랑은 종종 두려움과 욕망, 집착과 죄책감을 함께 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만이 아니다. 상대를 향한 기대와 불안, 희생과 집착이 지나치게 쌓인 자리에서도 사랑은 쉽게 본래의 모습을 잃는다. 사랑은 언제나 다정하지만은 않다. 두려움과 욕망이 스며든 순간,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가장 위험한 표류는 아무도 그것을 표류라고 알아보지 못할 때 시작된다.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같은 자리를 맴도는 동안, 인간은 생각보다 먼 곳까지 떠내려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왜 때로는 서로를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궁금했던 사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경쟁과 성취의 언어가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깊이 잠식할 수 있는지 느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표류 소년』은 바다 위를 떠도는 한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가 같은 물살에 휩쓸려버린 두 사람의 기록이다. 사랑은 언제나 구명보트가 되어주지 않는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해 던진 구조 신호가 파도에 뒤엉켜 상처가 되기도 한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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