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 - 고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태 인문 기행
김재웅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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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는 인간의 연대기가 없다. 왕조의 몰락도, 한 문장가의 영광도 나이테에 이름을 새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오래된 숲 앞에서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을 떠올린다. 누군가 나무를 심었고, 누군가는 그늘을 빌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지를 잘라내거나 쓰러진 나무의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숲의 역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손을 거쳐 자라난다. 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은 신라 말의 문인 최치원이 남긴 문장과 행적을 나무의 생태적 시간 속에 펼쳐 놓는다. 당나라에서 명성을 얻은 문장가, 신라의 개혁을 꿈꾼 지식인, 가야산으로 향한 은둔자. 역사에 기록된 몇 개의 이름 사이로 향나무와 박달나무, 느티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난다.

봉암사의 박달나무 앞에서 저자는 최치원과 일연, 단군신화의 시간을 한데 불러 모은다.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인물과 이야기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역사적 사실의 복원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박달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실제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며, 나무의 수명만으로 과거의 진위를 판별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장소에 쌓인 기억은 반드시 물질적 연속성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름은 비석에 새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지며, 때로는 나무 한 그루가 그 기억들을 다시 호출하는 계기가 된다. 저자의 답사에는 이처럼 기록의 빈틈을 현장의 감각으로 더듬으려는 시도가 있다. 나무의 종류와 생태를 살피는 시선 곁에 오래된 문헌과 지역의 전승이 나란히 놓인다. 역사적 장소는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만큼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함양 상림에는 인간의 의지가 숲의 형태로 이어진 시간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홍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이다. 물길을 다스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의 재난에 대응하는 행정적 실천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한 관리의 임기를 훌쩍 넘어섰다. 상림의 나무들은 자라고 죽고 다시 뿌리를 내리며 오랜 세월 숲의 형태를 이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일찍이 한스 요나스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강조했던 것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의 조건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림의 조성을 오늘날의 생태윤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품은 시간의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계속될 세계를 위해 지금 무엇을 마련할 것인가. 숲은 한 시대의 필요에서 태어나 다른 시대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자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돌봄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에까지 도달한다.

최치원의 정치적 생애를 떠올리면 이 숲의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읽힌다. 당나라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귀국한 그는 신라의 쇠락을 목격했고, 시무 십조를 올려 개혁을 모색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질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가 꿈꾼 변화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문장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이 마주한 것은 문장의 능력만으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교적 출처관에서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은 개인의 처세를 넘어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판단이었다. 최치원의 행적에도 그러한 고민이 배어 있는 듯하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뒤에도 그는 산천을 유람하고 학문과 문학을 이어 갔다. 세상을 향했던 정신이 자연 속에서 다른 리듬을 얻는 과정이었다. 다만 그의 은둔을 정치적 좌절의 필연적 귀결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의 선택에는 역사적 상황과 개인의 기질, 당대의 사상적 풍토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량산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승, 임경대에서 마주하는 낙동강의 물길, 동백섬의 해안 풍경은 정치와 학문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최치원의 삶을 펼쳐 보인다.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는 문인의 풍류에는 자연을 감각하는 일과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 함께 놓여 있었다. 유교의 학문과 불교의 수행, 도가적 자연관이 서로 접촉했던 신라 말의 사상적 환경도 이러한 풍류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산을 오르고 물을 바라보는 동안 인간의 사유는 책상 위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바람의 방향과 물의 흐름은 인간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나무는 자신의 생장에 필요한 시간만큼 계절을 통과한다. 그 질서를 바라보는 일에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수반된다. 풍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면, 자연을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 해석하기에 앞서 그 고유한 리듬을 감각하는 능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인사 학사대의 전나무 앞에서는 한 인간의 마지막 행적을 둘러싼 침묵이 짙어진다. 최치원의 말년은 정확한 기록으로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가야산에 은둔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었다는 전승은 역사적 공백 위에 여러 세대의 상상력이 쌓인 결과다. 저자는 학사대의 전나무를 찾을 때마다 그 웅장한 모습에서 최치원의 기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나무를 통해 사라진 인간의 정신을 가늠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나무의 수명처럼 일정한 생물학적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기억은 전해지는 동안 변형되고,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최치원이라는 이름 역시 당대의 문장가에서 후대의 은둔자와 신선으로 거듭 해석되었다. 전나무가 환기하는 것은 한 인물의 변하지 않는 본모습보다, 그를 기억해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이 아닐까. 나무 앞에 선 현재의 시선에는 수많은 과거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 책에서 나무는 자주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양주의 녹나무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은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의 모습과 연결되고, 해인사의 전나무는 그의 기상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의 성품과 대응시키는 방식은 오래된 문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무의 존재가 인간을 위한 상징으로만 좁혀지는 순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녹나무의 씨앗은 문장가의 명성을 위해 퍼져 나가지 않으며, 전나무는 누군가의 정신을 보존하려고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인간의 해석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고유한 생의 질서가 있다. 저자가 청량산에서 줄기 일부가 고사한 느티나무를 살피고, 오랜 나무를 보호해 온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각별하다. 나무를 인간의 역사와 연결하는 상상력 곁에 실제 생명을 향한 관찰과 돌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오래 기억될지 알 수 없다. 한때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 했던 최치원의 문장은 비석과 문집에 전해지고, 그가 백성을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생명을 길러 낸다. 그러나 문헌의 보존과 숲의 생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이어 간다. 문헌은 과거의 언어를 후대에 전달하고, 숲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명의 관계를 계속 만들어 낸다. 김재웅은 그 두 시간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다. 상림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맡긴 미래를, 학사대에서는 자연을 통해 되살리는 과거를 마주한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에 무엇을 심고 어떤 것을 돌보았는가에 따라 후대가 물려받을 세계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 인간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숲은 자란다. 그 숲의 내일에는 우리가 오늘 선택한 삶의 방식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도서출판 책과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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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밖 감정
성해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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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의 경계선은 언제부터 삶의 가능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에는 기회와 성공이 특정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는 오랜 인식이 배어 있다. 어느 도시에서는 저녁 식사 후 가볍게 들를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다른 도시에서는 하루의 일정과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된다. 같은 책을 좋아하고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그 마음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거주지에 따라 달라진다. 문화적 풍요가 특정한 장소에 집중될수록 취향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도시를 지칭하는 동시에 기회와 가능성의 척도로도 작동한다.

여섯 작가가 참여한 『서울 밖 감정』은 서울을 향한 서로 다른 감정의 궤적을 따라간다. 서울을 떠난 사람과 서울에 들어온 사람,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도시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들의 기억에는 동경과 모멸, 자유와 외로움,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있다. 한 도시를 향한 감정이 이토록 복잡한 까닭은 공간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단일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질서는 개인의 욕망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축적된 경험은 다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놓는다.

성해나의 <탑승 시 손을 흔드시오>에서 버스는 지역 간 불균형을 드러내는 가장 일상적인 사물이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어야 멈추는 버스와 승객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차하는 버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생활의 규칙이 존재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버스를 놓쳐도 곧 다른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한 번의 놓침이 하루의 일정을 뒤흔든다. 불편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익숙함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동시에 더 나은 조건을 상상할 기회마저 좁힌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도에 따라 개인이 사용하는 시간과 선택의 범위도 달라진다는 사실은 지역의 격차를 단순한 편의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

공간이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방식은 주거에서도 발견된다. 이기호의 <두 번째 만남>에는 구기동의 열악한 자취방과 결로 문제를 둘러싼 분쟁, 법정에서 들었던 ‘가난한 작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경제적 형편이 타인의 언어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순간, 가난은 생활의 조건을 넘어 존엄을 침범하는 경험이 된다. 김현의 <장면들>에서 집은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지하와 반지하를 거쳐 서울 밖에 마련한 집에 손님방이 생기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던 공간은 타인을 맞이하는 장소로 확장된다. 주거의 여유는 면적이나 소유의 문제를 넘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과 연결된다. 대학 시절 병원 실습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고시원은 몸 하나를 눕히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하루의 긴장을 풀어야 할 방에서 오히려 숨이 막히던 경험은 집이 인간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안온함을 돌아보게 한다. 공간의 크기는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감각은 마음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에게는 휴식조차 어려운 방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초대할 여유가 허락된다. 집의 형태가 곧 삶의 형태를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허용되는 일상의 폭은 분명 다르다.

도시가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물질적인 환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선우의 <너도 어서!>에서 서울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앞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도시다. 더 높은 학력과 소득, 더 좋은 직장과 집을 향한 욕망은 개인의 열망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준은 이미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목소리가 반복될수록 인간은 자신의 속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의 감각이 창작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작가의 고백은 도시의 욕망을 쉽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가 형성한 열망이라 해도 그것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성취에는 개인의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호정의 <새소리>는 그와 다른 방향에서 도시의 자유를 살핀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혼자만의 공간을 얻은 뒤 찾아온 고요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도시의 익명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키지만,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는 거리 또한 제공한다. 관심이 언제나 배려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말조차 상대에게는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는 그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정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 태도도 포함된다. 외로움과 자유가 서로의 곁에 놓일 수 있다는 현호정의 인식은 공동체의 친밀함을 무조건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이던 시선을 다시 살피게 한다.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기억 속에서 더욱 복잡해진다. 김화진의 <둘로 나뉘어 있다는 감각>에서 남태령역과 선바위역은 서울의 자신과 안양의 자신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가 된다. 같은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뿐인데, 특정한 역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이 속한 세계가 달라진다고 느낀다. 그가 동경하던 문화적 공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서울로 이주한 뒤에도 소속의 감각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거주지는 바뀔 수 있어도 그곳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여전히 일상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환경심리학자 스캐넬과 기퍼드(Scannell & Gifford, 2010)는 논문 〈장소애착의 정의: 삼차원적 구성 체계(Defining Place Attachment: A Tripartite Organizing Framework)〉에서 장소애착을 인간과 심리적 과정, 장소라는 세 차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장소에 대한 애착은 개인과 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미, 감정과 기억을 비롯한 인지적 경험,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형성된다. 따라서 같은 장소를 경험하더라도 그곳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장소와 맺는 관계 또한 축적된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연이 지천이었던 나의 고향에서는 나무와 하늘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등하굣길이나 밤 산책에서 무심히 올려다보던 하늘은 다른 도시에서 생활하게 된 뒤에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향의 밤을 밝히던 주황색 가로등은 낯선 도시의 흰 불빛 아래에서 오래전의 색채로 되살아난다. 저녁이면 고요한 거리로 밥 짓는 소리와 냄새가 흘러나왔고, 밤이 깊어지면 눈이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사위가 잠잠한 나의 고향. 도시의 밤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과 소음으로 이어질 때, 고향의 밤은 하루의 생활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서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떠난 장소는 기억 속에서 새롭게 읽힌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고향의 풍경뿐 아니라 그 풍경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장소는 눈에 보이는 풍경뿐 아니라 빛의 색과 소리, 냄새와 침묵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내면에 새겨진다.

그러나 주황빛 가로등 아래에서 누렸던 고요가 그곳의 모든 시간을 다정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과 친숙했던 생활에는 촘촘한 인간관계가 있었고, 더 넓은 도시에서는 자연과의 거리가 멀어진 대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여지가 생겼다. 친밀함이 안정감을 제공하는 만큼 개인을 평가하는 시선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며, 익명성은 외로움을 동반하면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낼 기회를 허락한다. 어느 장소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유의 형태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장소로 돌아간다고 해서 과거와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 역시 시간 속에서 변화해왔으므로.

결국 『서울 밖 감정』의 여섯 산문이 함께 보여주는 것은 장소와 인간이 서로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서울이라는 중심은 기회와 자원의 배분을 통해 삶의 조건을 바꾸고, 개인은 그 안에서 욕망과 좌절, 애정과 소외를 경험한다. 그러나 한 장소의 의미는 그곳에 주어진 조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지에 따라 소속의 감각도 달라진다. 그곳에서 누리는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관심과 책임 역시 장소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서울의 안과 밖을 가르는 선은 지도 위에 선명하게 그어져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그 경계를 따라 나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서울은 도달하고 싶은 세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떠나야만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던 장소다. 같은 도시에서도 누군가는 기회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장소에 대한 판단은 삶의 어느 시기에, 어떤 조건으로 그곳을 통과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 자신을 가두었던 거리가 훗날에는 돌아가고 싶은 풍경이 되고, 그리워하던 도시의 불빛이 어느 날에는 피로의 색으로 번진다. 장소는 그대로여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안과 밖을 다시 그려나간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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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꽃도 필요 없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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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기까지 제법 많은 것을 헤아린다. 잃어버린 것과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 어떻게 해도 달라질 기미가 없는 사정들을 차례로 세어보다가 어느 순간 계산을 그만둔다. 그러나 마음의 셈법은 영 엉터리여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던 사람이 하찮은 일에 발끈하고 아무런 기대도 없다던 사람이 내일의 일을 궁금해한다. 체념에도 잔돈이 생기는 것이다. 삶에 대한 미련은 대개 이런 식으로 정확한 액수를 숨긴다.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인간은 자기 몫의 하루를 꼬박꼬박 소비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관도 꽃도 필요 없다』에는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불안정한 노동과 노후의 불안, 오래된 관계의 변화, 계획에서 벗어난 미래와 가족의 책임. 다섯 편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사정들을 품고 있지만, 그 사정들이 흘러가는 방향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인물들은 대단한 결심 없이 이상한 선택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뜻밖의 말을 건넨다. 삶이란 원래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듯, 작가는 그들의 어설픈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비극적인 사정 속에서 불쑥 우스운 장면이 튀어나오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의 뒤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배어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은 대개 그가 처한 사정만큼이나 그 사정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오래 묵은 감정은 적당한 이름을 얻기도 전에 말이나 행동으로 새어 나온다. 작가는 이 어긋난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 심리의 원인을 추적해 행동의 의미를 확정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벌어지고 감정이 뒤늦게 따라오는 인간의 불규칙한 리듬을 살린다. 인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지지만, 그 정보만으로 인물의 전부를 소유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사정을 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안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끼어 있다.

특히 이 소설집에서 비극과 희극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에도 생활의 구체적인 계산이 따라붙고, 심각한 사연은 뜻밖의 우회로를 거쳐 엉뚱한 장면에 도착한다. 그 모습은 때로 우습고 때로 처연하다. 작가가 구사하는 유머에는 웃음의 대상을 쉽게 지정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인물의 행동이 우스운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사정이 우스운지, 혹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독자의 처지가 우스운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희극의 형식 안으로 들어온 불행은 잠시 낯선 표정을 짓는다. 웃음이 터진 자리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정들이 널려 있다. 독자는 웃음의 뒷맛에 섞인 씁쓸함까지 삼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작품 곳곳에서 감지되는 ‘아무래도 좋다’라는 태도에는 일정한 온도가 없다. 어떤 순간에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체념이고, 어떤 순간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요구를 잠시 밀어내는 방어이며, 또 어떤 순간에는 무엇이든 반드시 의미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처럼 들린다. 이 말은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진술하기보다 그 상태를 잠정적으로 처리하는 데 쓰인다. 인간은 감정을 일일이 분류하며 살 수 없으므로, 때때로 여러 사정을 하나의 말 아래 대충 밀어 넣는다.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에는 그렇게 처리된 마음의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 안에는 이미 식어버린 욕망도 있고, 아직 손대기 어려운 상처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생존의 경험에서 빌려온 서툰 낙관이다. 지금까지의 생존이 앞으로의 안녕을 보증해 줄 리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력에서 다음 하루를 살아갈 이유를 빌려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의 생존을 증거 삼아 현재를 통과한다. 이 허술한 추론에는 인간의 끈질김과 취약함이 함께 들어 있다. 어떻게든 되겠다는 말은 어떻게든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춘 채 낙관의 문법을 빌린다. 그 느긋한 어조에는 내일의 불안을 잠시 속여 넘기려는 궁여지책이 배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긍정은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발화된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도 피곤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루치의 신용이다.

물론 그 신용에는 사회가 떠넘긴 빚도 섞여 있다.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과 아직 미래를 선택해야 할 나이의 사람이 비슷한 체념을 배운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씁쓸하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지만,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여유는 불균등하게 배분된다. 어떤 사람은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당장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가능성을 지운다. 그 차이가 개인의 결심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질 때, 생존은 지나치게 손쉬운 미덕이 된다. 때로 체념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 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인물들은 바로 이 모호한 영역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무심함에는 상처가 있고, 그들의 집착에는 생의 의지가 있으며, 그들의 우스운 행동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뒤따른다.

다섯 편을 묶는 것은 공통된 교훈보다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일정한 거리감이다. 파견 사무소와 커피숍, 낡은 맨션과 풀밭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건의 무대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장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타인의 시야에서는 사소한 풍경으로 지나간다. 소설은 그 시야의 차이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인물의 사정은 구체화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인물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자리를 내주면서도 그를 완전히 판정할 권한까지 넘기지는 않는다. 연민과 판단이 쉽게 결탁하는 자리에서, 이 문학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하나의 개성으로 보존한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라는 제목에는 장례식의 엄숙함을 슬쩍 비트는 말맛이 있다. 관과 꽃은 죽음을 수습하고 애도하는 데 쓰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비용과 절차, 남겨질 사람들의 수고이기도 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활의 형편이 끼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에는 장례의 형식을 거부하는 고집과 그 형식에 들일 여력마저 헤아려야 하는 현실이 동시에 묻어난다. 필요 없다는 선언이 언제나 충분히 가진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일 수는 없다. 때로는 원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오래 줄여온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에 붙이는 가격표처럼 들린다. 그런데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은 이상할 만큼 구체적이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면 굳이 두 가지를 골라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은 세상일을 대강 포기하면서도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죽음이라는 가장 확정적인 사건 앞에서도 취향과 성미, 사소한 고집이 고개를 든다. 장례의 장식을 덜어내려는 제목에서 도리어 살아 있는 사람의 생활감이 짙어지는 까닭이다. 관과 꽃이 빠진 자리에는 한평생 무언가를 염려하고 계산하고 거절해 온 사람의 습관이 놓인다. 죽음을 다루는 문장이 이렇게까지 생활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고, 그 우스움에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삶의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감당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어떤 날에는 기꺼이 지불하고, 어떤 날에는 가진 것을 몽땅 털어도 모자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한다. 그 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 없이, 잠시 계산을 멈추기 위해서.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 짧은 중단과 다시 시작되는 생활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체념하고, 그 체념을 조금씩 어기면서 살아간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도 아직 하루치의 생활이 있다.

✏️도서출판 열림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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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도 사랑을 아는데 -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작은 생명들
김응빈 지음 / 사회평론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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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이 부여한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선의를 기대하지도 않고,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해 왔다. 꽃의 개화를 기다림으로, 낙엽의 추락을 이별로, 서로 기대어 자라는 나무를 우정으로 읽는다. 미생물의 세계에도 인간의 언어가 스며들 수 있을까. 세균에게 사랑을 묻는 김응빈의 제목은 생물학과 감정 사이에 제법 엉뚱한 통로를 낸다.

『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에서 미생물들은 한없이 부지런하고 대체로 계산적이다. 나무의 뿌리 주변에 모여든 세균은 식물과 물질을 주고받고, 곰팡이와 미세조류는 각자가 가진 능력을 결합해 살아간다. 식물이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유기물은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미생물의 활동은 식물이 영양분을 이용하는 데 관여한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질 때 관계는 지속되지만, 환경이 달라지면 그 양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에게 협력이란 아름다운 성품의 발현보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인간이 그 모습을 보고 우정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미생물들은 그저 살아갈 방법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의 셈법이 언제나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곰팡이가 다른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 다른 감각을 요구한다.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약물이지만, 그것이 발견된 생물학적 맥락에는 미생물 사이의 경쟁이 있다. 한쪽의 생존에 유리한 작용이 다른 쪽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도 자연에서는 얼마든지 벌어진다. 인간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물질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같은 물질을 마주한 미생물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린다. 생태계의 어느 장면을 아름답다고 부르고 어느 장면을 잔혹하다고 판단할 것인지는 결국 관찰자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공생을 이야기할 때 인간이 떠올리는 평화로운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함께 살아간다는 말은 대개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생물학적 공생은 인간의 도덕적 감정과 별개로 성립한다. 기생과 경쟁, 협력과 의존은 생명체들이 서로의 존재에 관여하는 여러 방식이다. 생존을 위한 관계에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작용도, 해를 끼치는 작용도 존재한다. 자연의 복잡함을 이해하려면 그 안에서 인간이 보고 싶은 윤리적 장면만 골라내는 습관부터 살펴야 한다. 미생물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화합의 이상향보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동일한 환경을 점유하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접촉과 마찰이다.

그 접촉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는 의외로 인간 자신의 몸이다. 장과 피부, 구강에 서식하는 미생물은 인간의 생리적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내미생물의 대사산물은 숙주의 생리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면역계는 다양한 미생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하고 조절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다른 생명체들의 활동이 복잡하게 관여한다. 몸속의 미생물들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인간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활동의 주도권까지 독점하지는 못한다. 생물학자 스콧 길버트와 동료 연구자들은 2012년 발표한 논문 「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에서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규정해 온 생물학의 오랜 관습을 재검토한다. 그들의 논의에서 개체란 자신의 세포만으로 완결되는 단위가 아니라, 다른 종의 생명체들과 생리적 기능을 나누며 유지되는 복합적인 존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세포와 미생물의 세포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 경계가 생명 활동의 단절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면역계 역시 외부의 모든 존재를 일률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허용할 것인지 조절하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신체의 안정성이 유지된다. 인간은 흔히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경계를 확고하게 그으려 하지만, 생물학적 개체의 경계는 물질과 신호가 끊임없이 오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몸 안에 사는 미생물을 모두 낯선 침입자로 여긴다면, 인간의 건강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살아 있는 몸이 수많은 생명의 활동으로 유지된다면, 죽은 몸 역시 다른 생명들의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생명체의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도 미생물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 퇴비화는 이 생물학적 작용을 장례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례다. 죽은 몸을 구성하던 물질이 미생물의 활동을 거쳐 변화하고, 일부는 다른 생명체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순환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 관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연의 물질적 과정에서는 그 몸을 이루던 성분들이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삶의 종결과 물질의 순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성립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한 사람을 구성했던 물질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분해자는 인간이 버려졌거나 사라졌다고 여기는 물질을 다른 생물학적 과정에 편입시킨다. 낙엽이 썩고 죽은 나무가 분해되는 동안 물질은 형태를 바꾸며 이동한다. 한 생명체의 몸은 그 자신만의 역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물질들이 잠시 하나의 개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에는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길이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순환이 죽음의 상실을 위로하거나 사라진 존재를 되돌려 주지는 않는다. 생태계의 물질적 지속과 한 인간의 부재는 서로를 상쇄하지 않은 채 나란히 존재한다.

인간의 감정으로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이러한 생명의 활동을, 김응빈은 유머와 비유를 통해 익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균에게 ‘혼밥’이라는 말을 붙이고 미생물들의 생존을 인간의 일상처럼 이야기하는 태도에는 연구 대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 특유의 친밀함이 배어 있다. 전문적인 용어를 익숙한 장면에 연결하는 설명은 독자가 생물학적 현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서도 미생물의 생존이 인간의 감정과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감각적인 책의 디자인까지 더해져 낯선 학문의 문턱이 한층 낮아진다. 이토록 감성적인 미생물학자라니.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인간의 생활과 관계를 향한 관심까지 발견하게 되는 경험은 제법 특별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언어가 반가운 까닭은 미생물이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좀처럼 친숙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알고, 몸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다. 저자는 이러한 낯섦 사이에 인간의 언어를 들여놓는다. 세균의 협력을 사랑이라 부르고, 먹이를 얻는 방식을 식사에 빗대는 순간 현미경 너머의 생명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웃처럼 가까워진다. 생물학적 현상에 일상의 어휘를 입히는 방식은 낯선 세계를 익숙한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이며, 독자가 미생물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마련한 다정한 초대이기도 하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존재들에게 생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그 작은 상상력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저자는 유쾌한 문장들로 증명한다.

인간이 미생물의 생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낯선 생명에게 관심을 갖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우리는 자연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발견하려 하고, 때로는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 한다. 익숙한 감정과 언어를 빌려 다른 생명의 활동을 상상하는 동안,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생존의 조건들이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나무의 뿌리와 미생물의 활동, 인간의 장내 생태계, 죽은 생명체를 분해하는 작은 존재들의 노동은 한 개체의 삶이 얼마나 많은 외부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것인지는 인간의 언어가 결정할 문제다. 다만 그 관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인간의 감정과 무관하게 성립한다.

『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의 다정함은 미생물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표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오래 관찰하고, 그 낯선 생존의 원리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기려는 저자의 태도에도 다정함이 있다. 인간이 세균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균의 삶을 이해하려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관계의 형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잠시 빌려 미생물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그 단어에 미처 담지 못했던 복잡한 생존의 모습까지 발견하는 것.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 낯선 왕복에 있다.

✏️도서출판 사회평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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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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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한철의 개화를 위해 긴 계절을 견디고, 가장 찬란한 순간에 스스로의 소멸을 예고한다. 피어 있는 시간보다 흩날리는 순간이 오래 기억되는 까닭도 그 유한성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결코 지지 않는 벚꽃이 있다. 계절의 질서를 거스르며 영원한 개화를 꿈꾸는 꽃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즈키 유코의 『지지 않는 벚꽃』은 이 익숙한 자연의 이미지에 섬뜩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들지 않는다는 말에 깃든 생명력과 불멸의 약속이 어느 순간 두려움의 언어로 뒤바뀐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누군가에게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절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여대생이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지연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이른다. 경찰의 부실한 대응을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조직은 거센 비난에 휩싸인다. 현경 홍보과 직원 모리구치 이즈미는 기사의 출처를 두고 오랜 친구이자 현경 출입 기자인 쓰무라 지카를 의심한다. 그러나 지카는 결백을 주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살아 있는 동안 건넨 의심은 죽음 이후 해명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기억이 된다.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함께 자신의 판단을 되돌아보려는 절박함이 스며 있다. 사적인 죄책감에서 비롯된 발걸음은 점차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질서와 마주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는 동안, 사건을 해결해야 할 제도와 그 제도에 속한 인간의 양심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동체는 수많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 개인에게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 사회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선택들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그러나 희생을 결정하는 사람과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이 분리될 때, 대의라는 말은 위험한 편의를 획득한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의 불행을 감수한다는 계산 속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단위로 축소된다. 숫자가 커질수록 판단은 합리적으로 보이고, 숫자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 포함된 인간의 삶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언제나 세계 전체의 상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지는 생을 타인의 목적을 위한 비용으로 산정한다면, 정의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스스로 훼손한다. 일찍이 칸트는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단순히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어떤 효용의 계산으로도 그 고유한 가치를 온전히 환산할 수 없다. 어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까지 처분할 권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희생의 계산은 때때로 누구의 악의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조직의 일상 속에서 완성된다. 조직은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고, 구성원이 교체된 뒤에도 기존의 명령과 관행을 이어 간다. 누군가는 지시를 따르고, 누군가는 절차를 준수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권한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한다. 각각의 행동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 설명되지만, 그 역할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결과에는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관료제의 위험을 논하며 주목했던 것도 이처럼 책임의 소재가 흐려지는 통치의 구조였다. 그는 관료제를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통치’라고 표현하며, 명령과 결정의 주체가 불분명해질수록 시민이 책임을 물을 상대조차 찾기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권력이 여러 직위와 규정 사이에 흩어져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전체적으로 판단할 의무에서 쉽게 물러선다. 절차는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느 순간 판단을 대신하는 권위가 된다. 그 안에서 양심은 조직의 질서를 방해하는 사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고, 침묵은 충성의 형식을 얻는다.

조직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은 외부의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가 곧 조직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지면, 책임을 밝히는 절차보다 책임을 감추는 기술이 먼저 발달한다. 이때 조직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자신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혼동한다.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스스로의 존속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면, 보호받아야 할 시민은 언제든 그 제도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지 않는 벚꽃』의 서늘함은 이러한 가치의 전도에서 비롯된다. 공적인 권한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행사되는 동안에는 질서의 근거가 되지만, 그 권한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힘으로 변모한다. 견제받지 않는 지속성은 안정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경직을 정당화한다.

그렇기에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행위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겹쳐 있다. 친구를 의심했던 기억, 죽음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 자신이 속한 조직을 향한 신뢰와 의혹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충돌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사과할 수 있고, 오해를 풀 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관계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다. 지카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이즈미에게 단순한 후회를 넘어선 윤리적 부담을 부여한다. 타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순간과 이제는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는 애도의 한 방식이 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그가 살아 있어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라진 사람의 삶이 부당하게 해석되거나 망각되지 않도록 하는 일 역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일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사실을 밝혀내는 데에는 증거와 추론이 필요하지만, 그 사실에 합당한 책임을 부과하려면 제도의 승인과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진실이 아무리 명백해 보여도 그것을 공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려워진다. 더욱이 진실을 판단하고 책임을 부과하는 권한이 사건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조직 안에 집중되어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절차 자체가 새로운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범인의 발견은 흔히 혼란스러웠던 세계가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그러나 유즈키 유코는 진실의 발견만으로 회복되지 않는 현실의 무게를 응시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간격은 개인에게 깊은 무력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정의를 향한 윤리적 요구는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이즈미의 행보가 지닌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거대한 조직 앞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양심에 따른 선택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단의 책임까지 포기한다면, 조직의 질서는 구성원들의 침묵을 통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면서도 그 규칙이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완전히 대신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소속된 곳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곳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충돌할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가치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양심은 언제나 명료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선택이 개인에게 안전한 길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윤리적 주체의 존엄이 드러난다.

다시 벚꽃을 떠올린다. 꽃은 시들고, 가지는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어떤 생명도 영원한 개화를 허락받지 못한다. 자연에서 소멸은 다음 생을 위한 조건이지만, 권력은 종종 자신의 지속을 위해 타인의 유한한 시간을 요구한다. 지지 않는 벚꽃의 영속성에는 그 아래에서 소진된 무수한 생의 시간이 겹겹이 축적되어 있다.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를 강인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무너지지 않는 질서가 반드시 정의로운 질서인 것은 아니며,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속의 정당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때로 정의를 지탱하는 힘은 거대한 제도의 영속성보다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려는 한 사람의 유한한 삶에서 비롯된다. 어떤 꽃은 시들지 않기 위해 타인의 봄을 앗아간다. 그 영원한 개화 아래, 누군가의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도서출판 문예춘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어떤 질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생명을 먼저 허문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 권력의 영속성이 누구의 유한한 삶을 대가로 삼는지 헤아리게 하는 소설이다. 국가와 조직의 권력이 개인의 존엄과 충돌하는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 제도의 안쪽에 축적된 침묵과 책임의 실종을 추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벚꽃의 기이한 생명력을 오래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조직의 명예가 인간의 생명보다 앞서는 곳에서는 침묵마저 하나의 의무로 둔갑한다. 유즈키 유코는 범죄의 진상을 좇는 서사에 조직의 자기보존이라는 서늘한 논리를 포개어, 공적인 질서가 윤리적 정당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진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시간이 되돌아오거나, 훼손된 정의가 제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규명과 책임의 실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사유하고 싶은 독자, 소속된 세계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양심이 충돌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독자에게 이즈미의 행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조직보다 짧게 살아가지만, 그 유한한 시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조직이 지키려는 가치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다. 양심에는 때로 대가가 따른다. 영원히 피어 있으려는 꽃 아래에서 먼저 사라진 이들의 계절을 헤아리는 일, 『지지 않는 벚꽃』은 그 윤리적 책임을 한 편의 미스터리 속에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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