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 꽃도 필요 없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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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기까지 제법 많은 것을 헤아린다. 잃어버린 것과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 어떻게 해도 달라질 기미가 없는 사정들을 차례로 세어보다가 어느 순간 계산을 그만둔다. 그러나 마음의 셈법은 영 엉터리여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던 사람이 하찮은 일에 발끈하고 아무런 기대도 없다던 사람이 내일의 일을 궁금해한다. 체념에도 잔돈이 생기는 것이다. 삶에 대한 미련은 대개 이런 식으로 정확한 액수를 숨긴다.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인간은 자기 몫의 하루를 꼬박꼬박 소비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관도 꽃도 필요 없다』에는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불안정한 노동과 노후의 불안, 오래된 관계의 변화, 계획에서 벗어난 미래와 가족의 책임. 다섯 편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사정들을 품고 있지만, 그 사정들이 흘러가는 방향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인물들은 대단한 결심 없이 이상한 선택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뜻밖의 말을 건넨다. 삶이란 원래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듯, 작가는 그들의 어설픈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비극적인 사정 속에서 불쑥 우스운 장면이 튀어나오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의 뒤편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배어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소설에서 인물의 성격은 대개 그가 처한 사정만큼이나 그 사정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오래 묵은 감정은 적당한 이름을 얻기도 전에 말이나 행동으로 새어 나온다. 작가는 이 어긋난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 심리의 원인을 추적해 행동의 의미를 확정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벌어지고 감정이 뒤늦게 따라오는 인간의 불규칙한 리듬을 살린다. 인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지지만, 그 정보만으로 인물의 전부를 소유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사정을 안다는 것과 그 사람을 안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끼어 있다.

특히 이 소설집에서 비극과 희극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에도 생활의 구체적인 계산이 따라붙고, 심각한 사연은 뜻밖의 우회로를 거쳐 엉뚱한 장면에 도착한다. 그 모습은 때로 우습고 때로 처연하다. 작가가 구사하는 유머에는 웃음의 대상을 쉽게 지정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인물의 행동이 우스운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사정이 우스운지, 혹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독자의 처지가 우스운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희극의 형식 안으로 들어온 불행은 잠시 낯선 표정을 짓는다. 웃음이 터진 자리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정들이 널려 있다. 독자는 웃음의 뒷맛에 섞인 씁쓸함까지 삼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작품 곳곳에서 감지되는 ‘아무래도 좋다’라는 태도에는 일정한 온도가 없다. 어떤 순간에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체념이고, 어떤 순간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요구를 잠시 밀어내는 방어이며, 또 어떤 순간에는 무엇이든 반드시 의미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처럼 들린다. 이 말은 마음의 상태를 정확히 진술하기보다 그 상태를 잠정적으로 처리하는 데 쓰인다. 인간은 감정을 일일이 분류하며 살 수 없으므로, 때때로 여러 사정을 하나의 말 아래 대충 밀어 넣는다.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에는 그렇게 처리된 마음의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 안에는 이미 식어버린 욕망도 있고, 아직 손대기 어려운 상처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생존의 경험에서 빌려온 서툰 낙관이다. 지금까지의 생존이 앞으로의 안녕을 보증해 줄 리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력에서 다음 하루를 살아갈 이유를 빌려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의 생존을 증거 삼아 현재를 통과한다. 이 허술한 추론에는 인간의 끈질김과 취약함이 함께 들어 있다. 어떻게든 되겠다는 말은 어떻게든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감춘 채 낙관의 문법을 빌린다. 그 느긋한 어조에는 내일의 불안을 잠시 속여 넘기려는 궁여지책이 배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긍정은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발화된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도 피곤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루치의 신용이다.

물론 그 신용에는 사회가 떠넘긴 빚도 섞여 있다.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과 아직 미래를 선택해야 할 나이의 사람이 비슷한 체념을 배운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씁쓸하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지만,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여유는 불균등하게 배분된다. 어떤 사람은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당장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가능성을 지운다. 그 차이가 개인의 결심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질 때, 생존은 지나치게 손쉬운 미덕이 된다. 때로 체념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이 된다. 아사쿠라 가스미의 인물들은 바로 이 모호한 영역에서 살아간다. 그들의 무심함에는 상처가 있고, 그들의 집착에는 생의 의지가 있으며, 그들의 우스운 행동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뒤따른다.

다섯 편을 묶는 것은 공통된 교훈보다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일정한 거리감이다. 파견 사무소와 커피숍, 낡은 맨션과 풀밭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건의 무대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장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 타인의 시야에서는 사소한 풍경으로 지나간다. 소설은 그 시야의 차이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인물의 사정은 구체화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독자에게 인물의 속사정을 들여다볼 자리를 내주면서도 그를 완전히 판정할 권한까지 넘기지는 않는다. 연민과 판단이 쉽게 결탁하는 자리에서, 이 문학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하나의 개성으로 보존한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라는 제목에는 장례식의 엄숙함을 슬쩍 비트는 말맛이 있다. 관과 꽃은 죽음을 수습하고 애도하는 데 쓰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비용과 절차, 남겨질 사람들의 수고이기도 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활의 형편이 끼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에는 장례의 형식을 거부하는 고집과 그 형식에 들일 여력마저 헤아려야 하는 현실이 동시에 묻어난다. 필요 없다는 선언이 언제나 충분히 가진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일 수는 없다. 때로는 원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오래 줄여온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에 붙이는 가격표처럼 들린다. 그런데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말은 이상할 만큼 구체적이다. 정말 아무래도 좋다면 굳이 두 가지를 골라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은 세상일을 대강 포기하면서도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죽음이라는 가장 확정적인 사건 앞에서도 취향과 성미, 사소한 고집이 고개를 든다. 장례의 장식을 덜어내려는 제목에서 도리어 살아 있는 사람의 생활감이 짙어지는 까닭이다. 관과 꽃이 빠진 자리에는 한평생 무언가를 염려하고 계산하고 거절해 온 사람의 습관이 놓인다. 죽음을 다루는 문장이 이렇게까지 생활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고, 그 우스움에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삶의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감당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어떤 날에는 기꺼이 지불하고, 어떤 날에는 가진 것을 몽땅 털어도 모자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한다. 그 말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 없이, 잠시 계산을 멈추기 위해서. 아사쿠라 가스미는 그 짧은 중단과 다시 시작되는 생활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체념하고, 그 체념을 조금씩 어기면서 살아간다. 관도 꽃도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도 아직 하루치의 생활이 있다.

✏️도서출판 열림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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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도 사랑을 아는데 -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작은 생명들
김응빈 지음 / 사회평론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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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이 부여한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선의를 기대하지도 않고,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연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해 왔다. 꽃의 개화를 기다림으로, 낙엽의 추락을 이별로, 서로 기대어 자라는 나무를 우정으로 읽는다. 미생물의 세계에도 인간의 언어가 스며들 수 있을까. 세균에게 사랑을 묻는 김응빈의 제목은 생물학과 감정 사이에 제법 엉뚱한 통로를 낸다.

『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에서 미생물들은 한없이 부지런하고 대체로 계산적이다. 나무의 뿌리 주변에 모여든 세균은 식물과 물질을 주고받고, 곰팡이와 미세조류는 각자가 가진 능력을 결합해 살아간다. 식물이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유기물은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미생물의 활동은 식물이 영양분을 이용하는 데 관여한다.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질 때 관계는 지속되지만, 환경이 달라지면 그 양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들에게 협력이란 아름다운 성품의 발현보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활동이다. 인간이 그 모습을 보고 우정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미생물들은 그저 살아갈 방법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의 셈법이 언제나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곰팡이가 다른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 다른 감각을 요구한다.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약물이지만, 그것이 발견된 생물학적 맥락에는 미생물 사이의 경쟁이 있다. 한쪽의 생존에 유리한 작용이 다른 쪽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도 자연에서는 얼마든지 벌어진다. 인간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물질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같은 물질을 마주한 미생물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린다. 생태계의 어느 장면을 아름답다고 부르고 어느 장면을 잔혹하다고 판단할 것인지는 결국 관찰자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공생을 이야기할 때 인간이 떠올리는 평화로운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함께 살아간다는 말은 대개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생물학적 공생은 인간의 도덕적 감정과 별개로 성립한다. 기생과 경쟁, 협력과 의존은 생명체들이 서로의 존재에 관여하는 여러 방식이다. 생존을 위한 관계에는 상대를 이롭게 하는 작용도, 해를 끼치는 작용도 존재한다. 자연의 복잡함을 이해하려면 그 안에서 인간이 보고 싶은 윤리적 장면만 골라내는 습관부터 살펴야 한다. 미생물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화합의 이상향보다 서로 다른 생명들이 동일한 환경을 점유하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접촉과 마찰이다.

그 접촉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는 의외로 인간 자신의 몸이다. 장과 피부, 구강에 서식하는 미생물은 인간의 생리적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내미생물의 대사산물은 숙주의 생리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면역계는 다양한 미생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하고 조절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다른 생명체들의 활동이 복잡하게 관여한다. 몸속의 미생물들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인간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활동의 주도권까지 독점하지는 못한다. 생물학자 스콧 길버트와 동료 연구자들은 2012년 발표한 논문 「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에서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규정해 온 생물학의 오랜 관습을 재검토한다. 그들의 논의에서 개체란 자신의 세포만으로 완결되는 단위가 아니라, 다른 종의 생명체들과 생리적 기능을 나누며 유지되는 복합적인 존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세포와 미생물의 세포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 경계가 생명 활동의 단절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면역계 역시 외부의 모든 존재를 일률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허용할 것인지 조절하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신체의 안정성이 유지된다. 인간은 흔히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경계를 확고하게 그으려 하지만, 생물학적 개체의 경계는 물질과 신호가 끊임없이 오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몸 안에 사는 미생물을 모두 낯선 침입자로 여긴다면, 인간의 건강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살아 있는 몸이 수많은 생명의 활동으로 유지된다면, 죽은 몸 역시 다른 생명들의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죽은 생명체의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에서도 미생물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 퇴비화는 이 생물학적 작용을 장례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례다. 죽은 몸을 구성하던 물질이 미생물의 활동을 거쳐 변화하고, 일부는 다른 생명체가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순환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 관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연의 물질적 과정에서는 그 몸을 이루던 성분들이 다른 형태로 이동한다. 삶의 종결과 물질의 순환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성립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한 사람을 구성했던 물질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분해자는 인간이 버려졌거나 사라졌다고 여기는 물질을 다른 생물학적 과정에 편입시킨다. 낙엽이 썩고 죽은 나무가 분해되는 동안 물질은 형태를 바꾸며 이동한다. 한 생명체의 몸은 그 자신만의 역사로 완성되지 않는다.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물질들이 잠시 하나의 개체를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에는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길이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순환이 죽음의 상실을 위로하거나 사라진 존재를 되돌려 주지는 않는다. 생태계의 물질적 지속과 한 인간의 부재는 서로를 상쇄하지 않은 채 나란히 존재한다.

인간의 감정으로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이러한 생명의 활동을, 김응빈은 유머와 비유를 통해 익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균에게 ‘혼밥’이라는 말을 붙이고 미생물들의 생존을 인간의 일상처럼 이야기하는 태도에는 연구 대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 특유의 친밀함이 배어 있다. 전문적인 용어를 익숙한 장면에 연결하는 설명은 독자가 생물학적 현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서도 미생물의 생존이 인간의 감정과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감각적인 책의 디자인까지 더해져 낯선 학문의 문턱이 한층 낮아진다. 이토록 감성적인 미생물학자라니.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는 문장에서 인간의 생활과 관계를 향한 관심까지 발견하게 되는 경험은 제법 특별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언어가 반가운 까닭은 미생물이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좀처럼 친숙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알고, 몸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다. 저자는 이러한 낯섦 사이에 인간의 언어를 들여놓는다. 세균의 협력을 사랑이라 부르고, 먹이를 얻는 방식을 식사에 빗대는 순간 현미경 너머의 생명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웃처럼 가까워진다. 생물학적 현상에 일상의 어휘를 입히는 방식은 낯선 세계를 익숙한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이며, 독자가 미생물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마련한 다정한 초대이기도 하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존재들에게 생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그 작은 상상력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저자는 유쾌한 문장들로 증명한다.

인간이 미생물의 생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낯선 생명에게 관심을 갖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우리는 자연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발견하려 하고, 때로는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 한다. 익숙한 감정과 언어를 빌려 다른 생명의 활동을 상상하는 동안,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생존의 조건들이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나무의 뿌리와 미생물의 활동, 인간의 장내 생태계, 죽은 생명체를 분해하는 작은 존재들의 노동은 한 개체의 삶이 얼마나 많은 외부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 관계를 사랑이라 부를 것인지는 인간의 언어가 결정할 문제다. 다만 그 관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인간의 감정과 무관하게 성립한다.

『세균도 사랑을 아는데』의 다정함은 미생물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표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오래 관찰하고, 그 낯선 생존의 원리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기려는 저자의 태도에도 다정함이 있다. 인간이 세균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균의 삶을 이해하려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관계의 형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생명들은 인간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잠시 빌려 미생물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그 단어에 미처 담지 못했던 복잡한 생존의 모습까지 발견하는 것.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그 낯선 왕복에 있다.

✏️도서출판 사회평론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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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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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한철의 개화를 위해 긴 계절을 견디고, 가장 찬란한 순간에 스스로의 소멸을 예고한다. 피어 있는 시간보다 흩날리는 순간이 오래 기억되는 까닭도 그 유한성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결코 지지 않는 벚꽃이 있다. 계절의 질서를 거스르며 영원한 개화를 꿈꾸는 꽃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즈키 유코의 『지지 않는 벚꽃』은 이 익숙한 자연의 이미지에 섬뜩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들지 않는다는 말에 깃든 생명력과 불멸의 약속이 어느 순간 두려움의 언어로 뒤바뀐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누군가에게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절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여대생이 스토킹 피해를 호소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지연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이른다. 경찰의 부실한 대응을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조직은 거센 비난에 휩싸인다. 현경 홍보과 직원 모리구치 이즈미는 기사의 출처를 두고 오랜 친구이자 현경 출입 기자인 쓰무라 지카를 의심한다. 그러나 지카는 결백을 주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살아 있는 동안 건넨 의심은 죽음 이후 해명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기억이 된다.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함께 자신의 판단을 되돌아보려는 절박함이 스며 있다. 사적인 죄책감에서 비롯된 발걸음은 점차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질서와 마주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는 동안, 사건을 해결해야 할 제도와 그 제도에 속한 인간의 양심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동체는 수많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 개인에게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 사회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선택들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이익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그러나 희생을 결정하는 사람과 희생을 감당하는 사람이 분리될 때, 대의라는 말은 위험한 편의를 획득한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의 불행을 감수한다는 계산 속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단위로 축소된다. 숫자가 커질수록 판단은 합리적으로 보이고, 숫자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 포함된 인간의 삶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언제나 세계 전체의 상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지는 생을 타인의 목적을 위한 비용으로 산정한다면, 정의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스스로 훼손한다. 일찍이 칸트는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단순히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며, 어떤 효용의 계산으로도 그 고유한 가치를 온전히 환산할 수 없다. 어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까지 처분할 권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희생의 계산은 때때로 누구의 악의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조직의 일상 속에서 완성된다. 조직은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고, 구성원이 교체된 뒤에도 기존의 명령과 관행을 이어 간다. 누군가는 지시를 따르고, 누군가는 절차를 준수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권한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판단을 유보한다. 각각의 행동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 결과로 설명되지만, 그 역할들이 결합해 만들어 낸 결과에는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관료제의 위험을 논하며 주목했던 것도 이처럼 책임의 소재가 흐려지는 통치의 구조였다. 그는 관료제를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통치’라고 표현하며, 명령과 결정의 주체가 불분명해질수록 시민이 책임을 물을 상대조차 찾기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권력이 여러 직위와 규정 사이에 흩어져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전체적으로 판단할 의무에서 쉽게 물러선다. 절차는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느 순간 판단을 대신하는 권위가 된다. 그 안에서 양심은 조직의 질서를 방해하는 사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고, 침묵은 충성의 형식을 얻는다.

조직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은 외부의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가 곧 조직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지면, 책임을 밝히는 절차보다 책임을 감추는 기술이 먼저 발달한다. 이때 조직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자신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혼동한다.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스스로의 존속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면, 보호받아야 할 시민은 언제든 그 제도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지지 않는 벚꽃』의 서늘함은 이러한 가치의 전도에서 비롯된다. 공적인 권한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행사되는 동안에는 질서의 근거가 되지만, 그 권한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힘으로 변모한다. 견제받지 않는 지속성은 안정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경직을 정당화한다.

그렇기에 이즈미가 진실을 추적하는 행위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겹쳐 있다. 친구를 의심했던 기억, 죽음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 자신이 속한 조직을 향한 신뢰와 의혹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충돌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사과할 수 있고, 오해를 풀 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관계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킨다. 지카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이즈미에게 단순한 후회를 넘어선 윤리적 부담을 부여한다. 타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순간과 이제는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는 애도의 한 방식이 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그가 살아 있어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라진 사람의 삶이 부당하게 해석되거나 망각되지 않도록 하는 일 역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일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사실을 밝혀내는 데에는 증거와 추론이 필요하지만, 그 사실에 합당한 책임을 부과하려면 제도의 승인과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진실이 아무리 명백해 보여도 그것을 공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려워진다. 더욱이 진실을 판단하고 책임을 부과하는 권한이 사건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조직 안에 집중되어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절차 자체가 새로운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 범인의 발견은 흔히 혼란스러웠던 세계가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그러나 유즈키 유코는 진실의 발견만으로 회복되지 않는 현실의 무게를 응시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간격은 개인에게 깊은 무력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정의를 향한 윤리적 요구는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이즈미의 행보가 지닌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거대한 조직 앞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양심에 따른 선택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단의 책임까지 포기한다면, 조직의 질서는 구성원들의 침묵을 통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면서도 그 규칙이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완전히 대신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소속된 곳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곳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충돌할 때, 인간은 자신이 어떤 가치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양심은 언제나 명료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올바른 선택이 개인에게 안전한 길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윤리적 주체의 존엄이 드러난다.

다시 벚꽃을 떠올린다. 꽃은 시들고, 가지는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어떤 생명도 영원한 개화를 허락받지 못한다. 자연에서 소멸은 다음 생을 위한 조건이지만, 권력은 종종 자신의 지속을 위해 타인의 유한한 시간을 요구한다. 지지 않는 벚꽃의 영속성에는 그 아래에서 소진된 무수한 생의 시간이 겹겹이 축적되어 있다.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면서도 스스로를 강인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무너지지 않는 질서가 반드시 정의로운 질서인 것은 아니며,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속의 정당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때로 정의를 지탱하는 힘은 거대한 제도의 영속성보다 자신의 판단에 책임지려는 한 사람의 유한한 삶에서 비롯된다. 어떤 꽃은 시들지 않기 위해 타인의 봄을 앗아간다. 그 영원한 개화 아래, 누군가의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도서출판 문예춘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어떤 질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생명을 먼저 허문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 권력의 영속성이 누구의 유한한 삶을 대가로 삼는지 헤아리게 하는 소설이다. 국가와 조직의 권력이 개인의 존엄과 충돌하는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 제도의 안쪽에 축적된 침묵과 책임의 실종을 추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벚꽃의 기이한 생명력을 오래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조직의 명예가 인간의 생명보다 앞서는 곳에서는 침묵마저 하나의 의무로 둔갑한다. 유즈키 유코는 범죄의 진상을 좇는 서사에 조직의 자기보존이라는 서늘한 논리를 포개어, 공적인 질서가 윤리적 정당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진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시간이 되돌아오거나, 훼손된 정의가 제자리를 찾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규명과 책임의 실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사유하고 싶은 독자, 소속된 세계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양심이 충돌하는 순간을 경험해 본 독자에게 이즈미의 행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닌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조직보다 짧게 살아가지만, 그 유한한 시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조직이 지키려는 가치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다. 양심에는 때로 대가가 따른다. 영원히 피어 있으려는 꽃 아래에서 먼저 사라진 이들의 계절을 헤아리는 일, 『지지 않는 벚꽃』은 그 윤리적 책임을 한 편의 미스터리 속에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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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
케빈 애슈턴 지음,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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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쓰인 소설 속 인물이 죽었을 때, 그를 애도하는 독자의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 인물의 이름과 생애, 그가 겪은 불행까지 모두 누군가의 상상에서 태어났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의 운명을 염려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문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종이 위에 배열된 문자들이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삶에 체온을 부여하는 것이다. 허구라는 인식은 감정의 진실성을 훼손하지 못한다. 인간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고,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기억처럼 오래 간직한다. 허구의 인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구성하며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케빈 애슈턴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추적한다. 저자는 최초의 모닥불에서 동굴 벽화와 문자, 인쇄술과 전기 통신을 거쳐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이 거듭 변모해 온 과정을 살핀다. 여기서 이야기는 문학작품이나 신화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고, 지나간 사건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는 일까지 인간은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수행한다. 애슈턴은 언어가 이야기를 탄생시켰다는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 이야기를 나누려는 필요가 언어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진화적 가설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킨 기술인 동시에 그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인간은 경험한 모든 순간을 동일한 무게로 기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 중 일부를 선택하고, 서로 떨어져 있던 장면들을 연결하며, 그 사이에 원인과 결과를 배치한다. 우연한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오래전의 실패는 현재의 선택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현재의 시선에 따라 재배열되며, 인간은 그렇게 구성된 기억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한다. 인지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구분한 서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 방식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논리적 사고가 일반적인 법칙과 검증 가능한 관계를 추구한다면, 서사적 사고는 사건에 개입한 사람의 의도와 행동, 그들이 처한 맥락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동일한 사건도 누구의 시선으로 서술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한다.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경험 사이에 의미의 통로를 만든다.

이러한 능력이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될 때 이야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힘을 얻는다. 모닥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집단의 기억을 형성했고, 그림과 문자는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이야기가 전승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인쇄술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던 기록과 전파의 권한을 흔들었으며, 전기 통신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사건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중요한 것은 전달 속도와 규모의 변화가 인간관계와 권력의 배치까지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가 있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널리 전파되는지, 무엇이 공동체의 역사로 인정받는지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역시 무수한 사건 중 선택되고 보존된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기록되지 못한 삶은 쉽게 잊히고, 반복해서 전달된 이야기는 어느새 한 시대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의 역사는 결국 누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었는가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에는 근본적인 취약성이 공존한다. 인간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우연 속에서도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이 성향은 이해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지만, 충분한 근거가 없는 설명에도 설득력을 부여한다. 심리학자 멜라니 그린과 티머시 브록은 2000년 학술지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 「The Role of Transportation in the Persuasiveness of Public Narratives」에서, 이야기에 깊이 몰입한 사람일수록 서사의 내용에 부합하는 믿음을 강하게 형성하고 이야기 속의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상대적으로 적게 발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사적 몰입은 상상 속 세계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의 일관성과 감정적 호소력은 때로 사실의 정확성보다 먼저 인간의 판단에 작용하며, 익숙한 믿음에 부합하는 서술일수록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진다. 문학적 허구와 허위정보는 모두 이야기의 설득력을 활용하지만, 독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설은 허구라는 약속 아래 상상력을 작동시키지만, 거짓 정보는 사실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허구의 인물을 향한 감정적 몰입과 현실에 관한 주장을 사실로 승인하는 판단에는 서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감정적 설득력이 사실의 진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인간의 상상력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이용될 수 있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이러한 문제를 이전과 다른 규모로 확대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의 생산자이자 청중이 되었으며, 알고리즘은 어떤 이야기가 더 자주 노출되고 널리 퍼질지를 결정하는 데 깊이 관여한다. 발언의 기회가 확대된 만큼 주목받을 기회까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인 감정과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복잡한 사실보다 빠르게 확산되는 환경에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정보조차 보이지 않는 선별 과정을 거쳐 받아들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여기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 실제 기록처럼 제시되고, 인간이 작성하지 않은 문장이 누군가의 진술처럼 유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그 발전에 참여했던 저자는 기술의 기능적 성취를 넘어,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 성찰한다. 기술을 만들어내는 능력과 그 기술이 초래할 결과를 이해하는 능력 사이에는 언제나 숙고가 필요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애슈턴은 이야기의 미래를 비관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타인의 삶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분명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기록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로 다른 공동체의 경험이 연결되며, 기존의 권위가 독점하던 설명에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보다, 자신의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는 지적 성실함일 것이다.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판단하고, 익숙한 설명에도 다른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조차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은 이야기를 향한 애정과 충분히 공존한다. 오래된 소설 속 인물의 슬픔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마음과, 눈앞에 제시된 현실의 설명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태도는 인간이 오랜 시간 길러온 상상력과 이성의 서로 다른 쓰임이다. 모닥불 곁에서 타인의 경험에 귀 기울이던 인간은 이제 손바닥 위에서 수없이 많은 세계를 마주한다.

✏️도서출판 생각의힘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류는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거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수백만 개의 화면으로 옮겨놓았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달라질 때마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변화했다. 허구의 인물에게 실제의 슬픔을 느끼고, 낯선 삶을 자신의 경험처럼 상상해온 독서가라면 그 오래된 능력의 기원을 따라가는 여정이 각별할 것이다. 기억과 경험이 어떻게 하나의 의미로 조직되는지, 인간의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는지 탐구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풍부한 사유의 재료를 제공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의 흔적이 스며 있다. 이야기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인간 정신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발명해온 형식들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이야기는 언제나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과 권력의 조건 속에서 움직여왔다. 문자와 인쇄술, 방송과 스마트폰이 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역사적 시야는 특히 매력적이다. 알고리즘이 선택한 정보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서술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시대에는 말할 자유만큼이나 듣고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전달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의미를 헤아리는 시간은 오히려 귀해진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다시 인간의 사고와 사회를 빚어온 긴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이 얼마나 거대한 인류의 시간을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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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
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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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모순에 관대하다. 어제의 신념을 오늘 번복하더라도 그 사이에 있었던 경험과 사정을 충분한 이유로 받아들인다. 반면 타인의 변화 앞에서는 쉽게 일관성을 요구한다. 자신에게 허락한 예외를 타인에게 적용하는 일에는 유난히 인색한 것이다. 같은 행위도 누가 저질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도덕적 무게를 갖는다. 자신에게는 사정이 있고 타인에게는 결함이 있다는 믿음. 그 비대칭적인 판단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윤리적 심판의 바깥에 세워두곤 한다. 도덕적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너그러운 형태로 작동하면서도, 타인을 향할 때는 엄격한 기준으로 모습을 바꾼다.

오둔 달의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는 이러한 도덕적 확신의 작동 방식을 심리학의 언어로 탐색한다.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자신의 판단이 충분한 이성과 정당한 근거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같은 문제에 상반된 결론을 내리면 그 원인을 무지나 이기심, 감정적 충동에서 찾기 쉽다. 저자는 도덕적 판단을 비이성적 충동과 맹목적인 감정의 산물로 설명해 온 기존 도덕심리학의 통념을 재검토한다. 인간의 도덕성이 불안정하다는 진단은 판단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여러 이유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옳음의 기준이 형성되고 수정되는 과정이며,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바꿀 만한 이유를 어떻게 발견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도덕을 이미 완성된 원칙의 집합으로 상상하지만, 실제 판단은 서로 다른 가치가 관계를 맺고 조정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누구의 고통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행위를 특정한 가치와 연결하는지, 서로 충돌하는 권리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는지에 따라 옳음의 내용은 달라진다. 저자는 이를 도덕적 관심사와 연결, 조정의 문제로 설명한다. 같은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도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동일한 평등을 지지하면서도 그 실현을 위한 선택에서는 갈라질 수 있다. 서로 다른 결론이 반드시 상반된 도덕적 원칙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더라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판단은 얼마든지 갈라질 수 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기존의 믿음과 충돌하는 상황을 만나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관계를 다시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판단을 수정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도덕적 관심을 더욱 충실하게 실현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도덕적 변화는 인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다. 어린아이는 타인의 고통과 권리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성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과 개인적 경험 사이에서 판단을 조정한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제도는 다음 시대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노예 제도의 역사는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오랜 시간과 희생을 요구하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도덕적 원칙조차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해관계와 신념 속에서 부정되거나 제한되었다. 이처럼 도덕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이 자신의 시대를 얼마나 쉽게 진리의 최종적인 위치에 놓는지 알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분별하는 능력과 현재의 잘못을 알아보는 능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누군가가 오늘날 우리의 선택을 납득하기 어려워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이 진보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새로운 판단 역시 당대의 이해관계와 편견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정체성 역시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거의 판단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새롭게 이해하고, 앞으로 지키려는 가치의 의미 또한 수정해 나간다. 일관성이란 동일한 판단을 영원히 반복하는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변화하는 경험 속에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성찰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나치당에 가입했던 과거를 언급하는 대목은 이 구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잔혹한 체제에 동조할 수 있었는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판단을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불편함이 따른다. 이해가 용서로 오인될 수 있고, 원인을 설명하는 언어가 책임을 희석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악행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그 행위가 반복되는 조건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도덕적 판단에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과 그 행위가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는 일이 함께 요구된다. 설명은 책임의 면제를 보장하지 않으며, 비난 역시 이해의 필요성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인간의 악행을 연구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복잡성에 있다. 누군가를 단죄하는 언어가 선명할수록 그 사람의 선택을 형성한 현실은 오히려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어떤 판단이 형성된 이유를 이해하는 일은 그 이유가 얼마나 정당한지 검토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종종 확신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떤 판단에 도달한 경위를 설명하는 능력과 그 판단이 진실에 부합하는지는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충분히 숙고했다고 믿었던 선택도 제한된 정보와 익숙한 가치관 안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그 판단을 형성한 사고의 틀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타인에게는 편견의 산물로 읽힐 수 있으며, 스스로 공정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특정한 경험과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 이유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이해하기도 한다. 자신의 판단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근거뿐 아니라, 무엇을 근거로 인정하고 무엇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는지까지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찰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며, 모든 판단의 조건을 스스로 밝혀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확신을 검토하려는 노력은 그 확신이 지닌 한계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도덕적 변화가 가능한 인간에게는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능력과 여전히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책임이 함께 주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그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의 판단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긴장은 어느 하나의 원칙으로 간단히 해소되지 않는다. 판단을 미루는 일에도 책임이 따르고, 확신을 고수하는 일에도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와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하면서, 그 언어와 가치관이 충분한지 다시 검토해야 하는 존재다. 오둔 달이 탐색하는 도덕적 변화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늘 옳다고 여기는 판단은 과거의 경험과 숙고를 거쳐 형성되었으며, 앞으로 마주할 사실과 타인의 경험에 의해 다시 수정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그 이유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가리고 있을 가능성까지 감당하는 것. 도덕적 삶의 어려움은 어쩌면 이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도서출판 북트리거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세계를 판단하지만, 그 이유가 만들어진 과정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한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타인의 사정은 간결해지고, 자신의 사정은 더욱 복잡해지는 기묘한 불균형. 우리는 서로의 결론을 알면서도 그 결론에 이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는 그 불균형 속에서 도덕적 판단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자신의 옳음을 좀처럼 의심하지 못하는 사람, 가까운 이와의 가치관 차이 앞에서 이해보다 비난이 앞섰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확신의 근거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인간의 복잡성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유를 생략한 채 타인을 판단해왔는지 드러낸다.
서로 다른 신념이 순식간에 적대의 근거가 되고, 누군가의 잘못을 이해하려는 시도마저 옹호로 오해받기 쉬운 시대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싶은 독자, 사회적 갈등과 시대에 따른 윤리적 변화를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특히 의미 있는 책이다. 어떤 행동이 발생한 이유를 이해하는 일과 그 행동의 책임을 묻는 일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이해의 깊이가 반드시 동의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둔 달은 그 복잡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기준이 어떤 경험과 가치의 조정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살피게 한다. 타인을 향해 단호하게 기울었던 저울을 자신의 판단 앞에도 놓아보는 일. 서로의 확신이 너무 쉽게 판결문이 되는 오늘날,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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