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ㅣ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3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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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불이 꺼진 복도, 인기척 없는 골목, 오래된 폐가와 낯선 숲. 그러나 정말 무서운 순간은 어둠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을 때보다, 너무 익숙해서 안전하다고 믿었던 풍경의 얼굴이 어느 순간 달라져 있을 때 찾아온다. 매일 지나던 주차장과 학교, 누군가의 놀이를 위해 만들어진 방,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워진 거주구역까지.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은 우리가 평범한 이름으로 불러온 공간들에 낯선 그림자를 드리운다.

공포문학의 힘은 이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을 뒤집는 데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언캐니(Unheimlich)’에는 묘한 역설이 담겨 있다. 가장 섬뜩한 것은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마음을 놓았던 것이 낯설게 변하는 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공포문학에서 집은 반드시 폐가일 필요가 없고, 학교는 폐교일 필요도 없다. 익숙한 장소가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뀌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이 만들어내는 공포 역시 특별한 세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의 틈으로 스며들어 평범했던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지금 걷고 있는 복도에도, 창밖으로 바라보는 골목에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문 뒤에도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감각.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소를 오늘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 일상은 더 이상 완전히 안전한 얼굴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 읽을까. 두려운 것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면, 공포 문학을 소비하는 행위는 그 본능과 정반대에 놓인 이상한 행동처럼 보인다. 무서운 장면에서 눈을 가리면서도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소름이 돋으면서도 이야기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미국의 철학자 노엘 캐럴은 공포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공포 예술의 중요한 매력이라고 보았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섭고, 무섭기 때문에 더욱 알고 싶어진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공포문학은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장르라기보다 형태 없는 불안을 경험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불안은 대개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언제 끝날지도 알기 어렵다. 반면 이야기 속 공포에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 있고, 독자는 원한다면 책장을 덮어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죽음과 상실, 폭력과 고립,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경험하는 것. 우리가 공포를 소비하는 이유에는 어쩌면 이 거리감이 놓여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안전한 자리에서 공포를 경험한다는 것이 공포문학이 가진 독특한 역설적 매력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보여주는 공포의 얼굴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홉 편의 이야기를 한 권에 놓고 바라보면, 무엇보다 공포가 머물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괴담과 민속적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공포가 들어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공포의 문법 위에 동시대의 불안이 겹쳐진다. 감염과 변이, 기술과 가상현실, 노동 현장의 사고와 폭력, 관계 속의 집착과 통제, 인간의 힘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우주적 재앙까지 공포의 재료가 된다.

현대 문화에 스며든 기묘함과 불안을 탐구한 영국의 문화이론가인 마크 피셔가 말한 ‘기묘한 것(Weird)’과 ‘기괴한 것(Eerie)’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변화가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피셔가 말하는 기묘함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존재하는 감각이며, 기괴함은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놓이는 감각과 연결된다. 현대의 공포는 이러한 낯섦을 더 이상 특정한 괴물의 모습으로만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기술 속에도, 도시의 구조 속에도, 인간의 몸 안에도, 그리고 인간이 발을 딛지 못한 우주에도 공포가 자리한다. 공포의 대상이 많아졌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품은 불안의 종류도 그만큼 복잡해졌다는 뜻이자, 인간이 두려워하는 세계의 형태 역시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공포문학의 확장을 단순히 장르적 외연의 확장이라고만 부르기는 아쉽다. 더 많은 소재와 더 넓은 배경을 갖게 되었다는 것보다 중요한 변화는 공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졌다는 것에 있다. 귀신과 원혼만이 공포의 주인공이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기술, 관계와 노동, 생명과 우주 자체를 공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한국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한국적인 괴담의 형태로만 가두지 않고 SF와 판타지, 오컬트와 코스믹 호러의 문법으로 변주한다. 이 책의 아홉 편이 서로 다른 결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포가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시에서는 사회의 구조가 개인을 위협하고, 기술은 인간이 통제한다고 믿었던 세계에 새로운 존재 방식을 만들어내며, 우주에서는 인간의 지식과 감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숭고’가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압도하는 거대한 대상 앞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면, 코스믹 호러가 보여주는 공포 역시 그 압도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지식도 문명도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인간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공포가 등장해도 결국 이야기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살아남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무언가를 알고 싶고,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어 하는 존재. 공포문학이 무서운 이유는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괴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욕망하고, 집착하고, 외면하고,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괴물은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낯선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공포는 너무나 익숙하다. 공포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비추는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내일의 괴물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공포의 이야기도 계속 새로운 얼굴을 얻을 것이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은 그렇게 서로 다른 아홉 개의 밤을 펼쳐놓는다. 그 밤에는 익숙한 도시의 풍경도 있고, 오래된 기억과 전설도 있으며, 인간이 아직 제대로 닿지 못한 우주도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평범했던 세계는 조금씩 낯설어진다. 공포문학은 그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우리가 매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평범함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두었던 불안을 잠시 꺼내어 빛 아래 놓는다. 그래서 공포를 읽는 밤은 두려움에 잠식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된다.

셋째 밤이 찾아왔다.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다른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괴물의 얼굴보다 그 앞에서 떨고 있는 인간의 얼굴일 것이다. 공포는 결국 우리가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무엇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비추는 가장 어두운 거울인 까닭이다.

✏️도서출판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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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옳다는 착각 - 누가 왜 가짜 과학을 만들고 퍼뜨리고 악용하는가
지바 사토시 지음, 김종현 옮김 / 부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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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 한마디가 붙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의심을 멈추는가. 출처를 확인하고 다른 가능성을 살피며 정말 그런지 한 번 더 생각하던 태도는 ‘과학적으로’라는 수식어 앞에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과학의 본질은 확신에 있지 않다.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증거를 모으고, 틀렸다면 수정한다. 그렇기에 과학은 본래 확신보다 의심에 가까운 학문이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붙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느끼고, 숫자와 그래프가 등장하면 그 안에 담긴 전제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옳다는 착각』은 바로 이 간극에서 출발한다.

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해온 지바 사토시는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유전과 인간 행동을 둘러싼 논쟁, 백신과 진화, 생물다양성과 대멸종에 관한 사례를 차례로 불러낸다.

우생학의 역사는 그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능력이나 성향에 유전적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것과, 그 사실을 근거로 어떤 인간이 더 우수하며 누구의 출산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판단이다. 사실에 관한 명제로부터 당위에 관한 결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이를 메울 별도의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과학이 사실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 사실이 곧바로 어떤 사회가 옳은지까지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언어가 인간의 가치관과 권력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리센코주의의 역사는 과학적 주장이 정치적 이념과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특정한 이론이 권력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가설을 넘어 국가가 승인한 ‘옳은 과학’이 되고, 반대되는 연구와 학문은 배제될 수 있다.

더 까다로운 문제는 과학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특정 유전자와 폭력성 사이에 관계가 발견되면 ‘폭력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고, 어떤 생물학적 특성과 행동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나면 그것이 개인의 성향이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하지 않는 순간 복잡한 인간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 속에 갇힌다. 다른 견해의 근거에는 엄격한 검증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연구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 역시 하나의 편향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심은 꽤 번거롭다. 한 번 더 출처를 찾아야 하고,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야 하며,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결론 앞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내놓은 근거만 의심하면서,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연구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것 역시 과학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이런 태도가 필요한 이유는 오늘날 과학적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다. AI와 SNS를 통해 연구 결과와 통계, 전문가의 견해가 하루에도 수없이 흘러들어온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짧은 문장 하나가 복잡한 연구의 과정과 불확실성을 지워버린 채 유통되기도 한다. 한 연구의 결과가 하나의 사실로 압축되고, 하나의 사실이 다시 확신으로 변하는 동안 그 사이에 존재했던 조건과 한계는 사라진다.

과학의 신뢰성은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과학에서 재현 가능성은 중요한 검증 장치이며, 심리학 분야의 대표적인 재현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 100건을 다시 검증한 결과 원래 연구보다 효과의 크기가 절반 정도로 감소했고,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가 재현된 연구는 36%에 그쳤다. 과학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내부에 남겨둔 채 앞으로 나아가는 지식 체계다.

따라서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적 주장 앞에서 의심을 거두는 일이 아니다. 한 번의 연구보다 반복되는 검증을, 강한 확신보다 충분한 근거를, 내가 듣고 싶은 결론보다 그 결론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피는 태도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다. 때로는 답을 얻는 것보다 답을 잠시 보류하는 편이 더 정확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동안 과학은 권위의 언어에서 다시 탐구의 언어로 돌아온다. 어쩌면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과학적인 자세는 무엇이든 쉽게 믿지 않는 법일 것이다.

✏️도서출판 부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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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애장판)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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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의 지쿠호는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폐광촌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난은 매일의 굶주림이었고, 폭력은 너무 가까워 피할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다정한 곳이 아니었다. 우사미 마코토의 『어리석은 자의 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1965년, 1985년, 2015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며 한 시대의 비극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사람의 삶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연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것은 가난보다도 ‘절망’이다. 가난이 오늘의 결핍이라면 절망은 내일의 부재다. 인간이 견뎌야 하는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견딜 이유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어느 순간부터 견뎌야 할 하루의 연속으로 축소된다. 저자는 사건이 발생한 순간만 바라보지 않고 그 이전에 놓인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1985년의 무사시노와 2015년의 현재를 지나며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비추는 구조를 만든다. 폐광촌과 저택,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 공간은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지지만, 이 소설에서 시간을 잇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이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존하는 존재가 아닌 기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이름과 얼굴은 단순한 신분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이라고 믿는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전의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빌리면 인간의 ‘나’는 처음부터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관계를 엮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한 단어로 압축하는 것이 ‘독’이다. 작품 속 난바 선생은 독과 약의 경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이야기한다. 생명을 해치는 물질도 쓰임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분노와 상실, 죄책감과 원망처럼 삶에 스며든 감정들은 그 자체로 선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흘려보내느냐에 있다.

우사미 마코토가 ‘미스터리의 여제’라는 수식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지점에서 다시 보인다. 정교하게 배치된 시간과 인물, 감춰진 정보와 뒤늦게 연결되는 사건들은 장르적 긴장감을 만들어내지만, 작가가 궁극적으로 집요하게 따라가는 대상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통과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쓰며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결국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미스터리는 여기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형식이 된다. 범죄의 비밀을 풀어내는 일과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하나의 선 위에서 움직인다.

1965년의 폐광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반세기를 건너 현재에 닿기까지, 우사미 마코토가 그려내는 것은 거대한 운명보다 인간의 선택이 남긴 흔적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발생한 일이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건너가고, 기억이 다시 선택을 만들며, 그 선택이 또 다른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렇게 과거는 죽지 않고 사람 사이를 이동한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상처를 갖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상처를 어떤 형태로 다음 사람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의 독』은 범죄의 비밀을 풀어가는 미스터리이면서,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디까지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소설이다. 독을 품은 인간을 심판하는 대신 그 독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따라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에게 남은 선택의 몫을 돌려준다. 세상은 이미 우리 안에 여러 가지 독을 심어놓았지만, 그것을 어떤 삶으로 바꾸어낼지는 여전히 각자의 몫이라고.

✏️도서출판 블루홀식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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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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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라는 제목은 그리스 신화 속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은 이 소설에서 인공지능 물류 통제 시스템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해의 한 스마트 물류센터에서 노동자들의 움직임과 생산량을 끊임없이 측정하는 아르고스는 인간의 이름이나 감정, 피로와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처리된 물량과 속도다. 효율을 위해 설계된 시스템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신체가 되고, 신체는 다시 하나의 수치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더욱 날카롭게 겨누는 것은 기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만이 아니다. 아르고스의 시선이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오는 순간, 감시는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되는 통제가 아니게 된다. 더 빨리 일하고, 더 오래 버티고,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요구를 인간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아르고스는 하나의 시스템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고스』가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장면은 노동자들이 억지로 잠을 빼앗기는 모습만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잠을 포기하고 더 오래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잠은 인간이 선택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여가가 아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가까운 본능이며,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영원히 거부할 수 없는 신체의 요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마저 노동시간으로 환산된다. 잠을 덜 자는 만큼 더 일할 수 있고, 더 일하는 만큼 더 벌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순간, 인간의 몸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장치로만 취급된다. 노동자가 자신의 수면을 자발적으로 내놓는다는 사실은 그래서 자유의 증거라기보다 자본의 논리가 얼마나 깊숙이 내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에 가깝다. 한병철이 말한 성과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이 소설에서는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외부의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에게 가장 효율적인 관리자는 더 이상 관리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설의 배경인 물류센터는 단순한 노동 현장을 넘어 현대 사회의 속도를 압축해놓은 공간으로 읽힌다. 오늘 주문한 물건이 내일 도착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시대, 소비자는 빠른 배송을 편리함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속도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누군가에게는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 소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밤을 지새우는 노동이 된다. 정말 모든 것이 그렇게 빨라야 하는가. 하루를 기다릴 수 없는 욕망은 언제부터 당연해졌으며, 타인의 삶을 그만큼까지 소모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편리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르고스』는 특정 기업이나 특정 국가의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넓은 차원에서, 인간이 효율과 속도를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렇게까지’라는 말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노동의 현장에서 결국 문제 되는 것은 노동시간의 길이만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빨라야 하고,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고, 이렇게까지 벌어야 하고, 이렇게까지 편리해야 하는 사회를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만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다.

주인공 재일의 존재는 이러한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인간을 상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빚을 갚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혈청을 개발하려는 그의 욕망은 분명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르고스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남지 않는다. 아르고스가 노동자를 생산량으로 계산한다면 재일은 사람의 몸에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계산한다. 한쪽은 물류의 효율을 위해 인간을 숫자로 바꾸고, 다른 한쪽은 돈을 위해 인간의 신체를 자원으로 바꾼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소설은 재일을 손쉽게 선악의 구도로 판단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거래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괴물은 인간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효율과 생존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부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수아가 보여주는 ‘잠’과 ‘꿈’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과 생산의 관점에서 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고, 꿈은 더더욱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러나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인간이 기계와 구별되는 가장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르고스가 모든 것을 측정하려 할수록 측정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선명해진다. 감정, 피로, 기억, 꿈, 그리고 잠. 그것들은 생산성의 관점에서는 비용으로 계산될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삶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다. 결국 이 소설에서 잠을 되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피로를 해소한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의 몸을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이야기가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품은 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고대 가야의 무덤과 첨단 물류센터, 이주노동자들의 비닐하우스가 한 공간 안에서 맞닿아 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는 묘한 연속성이 생긴다. 누군가는 죽은 뒤에도 거대한 무덤 속에서 잠들고, 누군가는 살아 있는 동안 잠들지 못한다. 누군가의 편안한 안식은 다른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세워지고, 오늘의 편리함 역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유적과 현재의 물류 시스템이 한 공간에 포개지는 설정은 그래서 단순한 기묘함을 넘어선다. 인간이 시대를 거치며 무엇을 발전시켜왔는지, 그리고 그 발전의 과정에서 무엇을 반복해서 희생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르고스』가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AI의 미래라기보다 인간의 현재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통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익숙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보다 더 불편한 것은, 이미 인간 스스로가 효율과 속도라는 기준을 받아들여 자기 몸과 시간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고스는 인간을 감시하는 기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얼마나 빨리 처리했는지, 얼마나 많이 해냈는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을 하나의 성과표처럼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아르고스를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하나의 기계를 멈춘다고 해서 그 기계가 만들어낸 세계의 논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기계가 다시 켜지고, 다른 방식의 효율이 요구되며,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놓을 수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기계와 인간 사이의 단순한 승패가 아니라, 무엇을 효율적으로 만들 것인가보다 무엇을 효율의 이름으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를 묻는 일이다.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내일이 있는가. 누군가의 시간을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편리함을 정말 편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르고스의 눈은 백 개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눈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보고 측정하느라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인지도 모른다. 『아르고스』는 AI가 인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미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비춘다.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인간이 끝없이 속도를 높여가는 동안, 정말 멈춰야 할 것은 기계의 속도인지, 아니면 그 속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의 욕망인지. 소설이 던지는 가장 불편한 물음은 바로 그곳에 남는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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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킴
에바 틴드 지음, 허여 셀린느 옮김 / 산지니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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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출생은 얼마나 오래 한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까. 태어난 장소와 날짜, 부모의 이름, 처음 불린 이름까지도 누군가의 기록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정체성이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에바 틴드의 『민 킴』은 입양인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소설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한 인간의 삶을 둘러싼 기록과 서사의 권한을 묻는 작품이다.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가 과거를 기록하고, 누가 한 사람의 삶에 하나의 설명을 부여하는가.

한국에서 해외입양은 이미 지나간 역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숫자로 보면 그 역사는 놀라울 만큼 거대하다.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된 한국 아동은 약 15만~20만 명으로 추산되며, 1970년대에만 4만 6천 명, 1980년대에는 6만 6천 명 이상이 해외로 보내졌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해외입양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더 나은 환경으로 보내는 일, 혹은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물하는 일로 설명되었다. 서사는 매끄러웠다. 아이는 버려졌고, 누군가 구했고, 아이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 서사 안에서는 아이가 무엇을 잃었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민 킴』이 오래 바라보는 곳은 바로 그 매끄러운 서사가 덮어버린 자리다. 입양은 한 사람의 삶에 새로운 가족을 더하는 동시에 이전의 관계와 이름, 언어와 기록을 끊어놓는 사건이기도 하다. 두 가지 사실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사랑받으며 자랐다는 사실과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감각, 좋은 양부모와 깊은 상실은 한 사람 안에서 얼마든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그 복잡한 시간을 ‘행복한 입양’과 ‘불행한 입양’으로 나누는 순간, 한 인간의 삶은 다시 타인이 이해하기 편한 이야기로 축소된다.

이 소설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의 삶조차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비행기에서 출발하고 같은 나라에서 온 두 아이에게도 전혀 다른 시간이 주어진다. 하나의 범주가 개인의 삶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입양인’이라는 말은 하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가족과 기억, 사랑과 폭력, 침묵과 저항이 겹겹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이름은 유난히 무겁다. 이름은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사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한 인간을 분류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김남숙은 에바가 되고, 김미인은 꿀마이가 된다. 한 이름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과 이전 삶의 단절이 함께 들어온다. 그리고 ‘민 킴’이라는 이름은 그 단절 이후에 다시 자기 자신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던 이름을 다시 현재의 언어로 가져오는 일이다. 누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렀는가에서,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로 이동하는 순간. 그때 이름은 출생의 증거를 넘어, 한 사람의 삶을 누가 부를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된다. 정체성의 주도권이 타인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옮겨오는 장면.

기록은 더욱 냉정하다. 종이 위에 적힌 생년월일과 출생지, 부모의 이름은 객관적인 사실처럼 보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되기 쉽다. 한국의 해외입양을 둘러싼 최근 조사에서는 실제 출생 배경과 다른 신원이나 허위 서류를 뒤늦게 알게 된 입양인들의 사례가 잇따라 드러났다. 그렇다면 기록은 기억보다 진실한가. 서류에 적힌 이름이 기억 속의 이름보다 우선할 수 있는가. 출생의 기록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과거에 접근할 권리를 잃는다면, 한 인간에게서 빼앗긴 것은 정보 몇 줄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출발점을 스스로 확인할 권리다. 현재 한국의 국제입양 관련 법률에서도 입양인이 자신의 입양정보 공개를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더 이상 개인적인 그리움이나 사적인 호기심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민 킴』은 ‘뿌리를 찾는 이야기’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뿌리를 찾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던 과거가 정말 나의 과거였는가. 그리고 그 과거를 누가, 어떤 필요에 의해, 어떤 언어로 만들어놓았는가. 에바 틴드는 이 질문을 소설의 형식 안으로 가져온다. 시와 문서, 편지와 대화, 실제적인 기록과 문학적 언어가 한 작품 안에서 교차한다. 삶을 말하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윤리가 따라붙는다. 한 사람의 고통을 대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또다시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말해지지 않았던 삶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행위다.

이 지점에서 『민 킴』은 입양에 관한 소설을 넘어선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타인이 붙여놓은 설명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 기억하는 나, 사회가 분류하는 나, 서류가 증명하는 나, 타인이 이해한 나. 그 설명들이 쌓여 한 사람의 이름이 되고 전기가 된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작 자신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면, 아무리 정확한 기록이라 해도 그것은 온전한 삶을 설명하지 못한다. 에바 틴드의 다른 작품인 『뿌리』에서 기원을 찾아 떠나는 인간을 통해 어디에 머물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했다면, 『민 킴』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자리로 들어간다. 어떤 이야기로 살아갈 것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보다, 그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를 누가 써왔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민 킴』을 읽고 나면 이름을 보는 방식부터 조금 달라진다. 이름은 출생증명서 한 귀퉁이에 적힌 고유명사가 아니며, 타인이 나를 불러온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한 번 지워진 이름을 되찾는 일은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그 이름을 다시 발음할 권리를 갖는 일이다.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종이에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삶은 기록되는 과정에서 잘려나가고, 어떤 사람은 타인이 만든 문장 속에서 평생 자신을 찾아야 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한 인간에게 자기 삶의 문장을 돌려주는 일.

에바 틴드가 이 책에서 해낸 일은 과거를 깨끗하게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원이 불가능한 자리까지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라진 이름과 남겨진 이름, 기억하는 사람과 기록하는 사람, 사랑과 상실이 서로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면서, 이미 쓰여진 삶의 문장 사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워 넣는다. 『뿌리』에서 기원을 향해 움직이던 시선은 『민 킴』에서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그 기록을 만든 손을 바라본다. 삶은 출생증명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먼저 써놓은 문장을 그대로 물려받는 순간에도 끝나지 않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완벽한 과거가 아니라, 내 삶을 설명하는 문장에 누구의 이름으로 서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그리고 『민 킴』은 그 서명을 되찾는 이야기다.

✏️도서출판 산지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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