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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아르고스』라는 제목은 그리스 신화 속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은 이 소설에서 인공지능 물류 통제 시스템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해의 한 스마트 물류센터에서 노동자들의 움직임과 생산량을 끊임없이 측정하는 아르고스는 인간의 이름이나 감정, 피로와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처리된 물량과 속도다. 효율을 위해 설계된 시스템 앞에서 인간은 하나의 신체가 되고, 신체는 다시 하나의 수치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더욱 날카롭게 겨누는 것은 기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만이 아니다. 아르고스의 시선이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오는 순간, 감시는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되는 통제가 아니게 된다. 더 빨리 일하고, 더 오래 버티고,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요구를 인간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아르고스는 하나의 시스템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고스』가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장면은 노동자들이 억지로 잠을 빼앗기는 모습만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잠을 포기하고 더 오래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잠은 인간이 선택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여가가 아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가까운 본능이며,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영원히 거부할 수 없는 신체의 요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마저 노동시간으로 환산된다. 잠을 덜 자는 만큼 더 일할 수 있고, 더 일하는 만큼 더 벌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순간, 인간의 몸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장치로만 취급된다. 노동자가 자신의 수면을 자발적으로 내놓는다는 사실은 그래서 자유의 증거라기보다 자본의 논리가 얼마나 깊숙이 내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에 가깝다. 한병철이 말한 성과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 이 소설에서는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외부의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에게 가장 효율적인 관리자는 더 이상 관리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설의 배경인 물류센터는 단순한 노동 현장을 넘어 현대 사회의 속도를 압축해놓은 공간으로 읽힌다. 오늘 주문한 물건이 내일 도착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시대, 소비자는 빠른 배송을 편리함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속도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누군가에게는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 소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밤을 지새우는 노동이 된다. 정말 모든 것이 그렇게 빨라야 하는가. 하루를 기다릴 수 없는 욕망은 언제부터 당연해졌으며, 타인의 삶을 그만큼까지 소모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편리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르고스』는 특정 기업이나 특정 국가의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넓은 차원에서, 인간이 효율과 속도를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렇게까지’라는 말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노동의 현장에서 결국 문제 되는 것은 노동시간의 길이만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빨라야 하고,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고, 이렇게까지 벌어야 하고, 이렇게까지 편리해야 하는 사회를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만들어왔는가 하는 문제다.
주인공 재일의 존재는 이러한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인간을 상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빚을 갚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혈청을 개발하려는 그의 욕망은 분명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르고스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남지 않는다. 아르고스가 노동자를 생산량으로 계산한다면 재일은 사람의 몸에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계산한다. 한쪽은 물류의 효율을 위해 인간을 숫자로 바꾸고, 다른 한쪽은 돈을 위해 인간의 신체를 자원으로 바꾼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소설은 재일을 손쉽게 선악의 구도로 판단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거래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괴물은 인간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효율과 생존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부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수아가 보여주는 ‘잠’과 ‘꿈’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과 생산의 관점에서 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고, 꿈은 더더욱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러나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인간이 기계와 구별되는 가장 본질적인 영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르고스가 모든 것을 측정하려 할수록 측정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선명해진다. 감정, 피로, 기억, 꿈, 그리고 잠. 그것들은 생산성의 관점에서는 비용으로 계산될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삶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다. 결국 이 소설에서 잠을 되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피로를 해소한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의 몸을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이야기가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품은 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고대 가야의 무덤과 첨단 물류센터, 이주노동자들의 비닐하우스가 한 공간 안에서 맞닿아 있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는 묘한 연속성이 생긴다. 누군가는 죽은 뒤에도 거대한 무덤 속에서 잠들고, 누군가는 살아 있는 동안 잠들지 못한다. 누군가의 편안한 안식은 다른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세워지고, 오늘의 편리함 역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유적과 현재의 물류 시스템이 한 공간에 포개지는 설정은 그래서 단순한 기묘함을 넘어선다. 인간이 시대를 거치며 무엇을 발전시켜왔는지, 그리고 그 발전의 과정에서 무엇을 반복해서 희생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르고스』가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AI의 미래라기보다 인간의 현재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통제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익숙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보다 더 불편한 것은, 이미 인간 스스로가 효율과 속도라는 기준을 받아들여 자기 몸과 시간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고스는 인간을 감시하는 기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얼마나 빨리 처리했는지, 얼마나 많이 해냈는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을 하나의 성과표처럼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아르고스를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하나의 기계를 멈춘다고 해서 그 기계가 만들어낸 세계의 논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기계가 다시 켜지고, 다른 방식의 효율이 요구되며,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시간을 내어놓을 수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기계와 인간 사이의 단순한 승패가 아니라, 무엇을 효율적으로 만들 것인가보다 무엇을 효율의 이름으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를 묻는 일이다.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내일이 있는가. 누군가의 시간을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편리함을 정말 편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르고스의 눈은 백 개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눈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보고 측정하느라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인지도 모른다. 『아르고스』는 AI가 인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미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비춘다.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인간이 끝없이 속도를 높여가는 동안, 정말 멈춰야 할 것은 기계의 속도인지, 아니면 그 속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의 욕망인지. 소설이 던지는 가장 불편한 물음은 바로 그곳에 남는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