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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애장판)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8월
평점 :
1965년의 지쿠호는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폐광촌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난은 매일의 굶주림이었고, 폭력은 너무 가까워 피할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세상은 처음부터 다정한 곳이 아니었다. 우사미 마코토의 『어리석은 자의 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1965년, 1985년, 2015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오가며 한 시대의 비극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사람의 삶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연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것은 가난보다도 ‘절망’이다. 가난이 오늘의 결핍이라면 절망은 내일의 부재다. 인간이 견뎌야 하는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견딜 이유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삶은 어느 순간부터 견뎌야 할 하루의 연속으로 축소된다. 저자는 사건이 발생한 순간만 바라보지 않고 그 이전에 놓인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1985년의 무사시노와 2015년의 현재를 지나며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비추는 구조를 만든다. 폐광촌과 저택,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 공간은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지지만, 이 소설에서 시간을 잇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이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존하는 존재가 아닌 기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이름과 얼굴은 단순한 신분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이라고 믿는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전의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빌리면 인간의 ‘나’는 처음부터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관계를 엮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한 단어로 압축하는 것이 ‘독’이다. 작품 속 난바 선생은 독과 약의 경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이야기한다. 생명을 해치는 물질도 쓰임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분노와 상실, 죄책감과 원망처럼 삶에 스며든 감정들은 그 자체로 선악을 결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흘려보내느냐에 있다.
우사미 마코토가 ‘미스터리의 여제’라는 수식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지점에서 다시 보인다. 정교하게 배치된 시간과 인물, 감춰진 정보와 뒤늦게 연결되는 사건들은 장르적 긴장감을 만들어내지만, 작가가 궁극적으로 집요하게 따라가는 대상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통과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쓰며 자신이 정말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결국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미스터리는 여기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형식이 된다. 범죄의 비밀을 풀어내는 일과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하나의 선 위에서 움직인다.
1965년의 폐광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반세기를 건너 현재에 닿기까지, 우사미 마코토가 그려내는 것은 거대한 운명보다 인간의 선택이 남긴 흔적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발생한 일이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건너가고, 기억이 다시 선택을 만들며, 그 선택이 또 다른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렇게 과거는 죽지 않고 사람 사이를 이동한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상처를 갖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상처를 어떤 형태로 다음 사람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의 독』은 범죄의 비밀을 풀어가는 미스터리이면서,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디까지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소설이다. 독을 품은 인간을 심판하는 대신 그 독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따라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에게 남은 선택의 몫을 돌려준다. 세상은 이미 우리 안에 여러 가지 독을 심어놓았지만, 그것을 어떤 삶으로 바꾸어낼지는 여전히 각자의 몫이라고.
✏️도서출판 블루홀식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