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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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의 『기억의 무늬』는 안면인식장애를 지닌 한 인물의 미제 사건 추적을 통해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전복한다. 프랑스의 패션학교에서 공부하는 카미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신 옷감의 질감과 걸음걸이, 신발의 형태, 향수의 종류, 손때가 묻은 자리처럼 타인이 쉽게 지나치는 감각적 정보로 사람을 구분한다. 작가는 카미의 관찰을 놀랄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인간이 타인을 인식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인 얼굴을 대신해 다른 감각들이 들어선다. 카미에게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촉감이고, 걸음의 리듬이며, 몸에 밴 냄새다.

이러한 감각의 전환은 곧 기억의 문제로 이어진다. 카미에게 사람의 표정은 ‘결코 열어 볼 수 없는 책’(179쪽)과 같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때 말만 듣지 않는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눈빛,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짐작한다. 하지만 카미에게 그 책은 처음부터 닫혀 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옷을 입는 습관과 걸음걸이, 몸에 밴 냄새와 손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읽어낸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얼굴 너머의 감각까지 읽어낼 때, 카미에게 사람의 윤곽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카미의 감각은 시각이 닿지 못하는 세계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기억의 무늬』 속 기억은 머릿속에 보관된 과거의 기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된 옷과 가구, 천의 주름과 닳은 자리,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체취에도 과거가 남아 있다. 사람은 떠나면서 자신의 모습을 지워가지만,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에는 생활의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낡은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매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이 작품에서 아기침대와 독특한 질감의 천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사물은 말하지 않지만, 말보다 오래 기억한다.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어떤 냄새나 촉감이 오래전의 한순간을 현재로 데려오는 것처럼, 손끝에 남은 감각은 시간이 지운 장면을 다시 불러낸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사물 사이에도 흔적을 남기며 이어진다.

그렇다면 기억은 얼마나 정확해야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미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완벽하게 재현한 장면이 아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특정한 감촉과 몇 개의 이미지,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의 조각이다. 그는 그 조각을 하나씩 더듬으며 과거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기억은 사건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하는 사람의 현재가 과거에 스며들고, 하나의 감각에 붙어 있던 의미 역시 달라진다. 처음에는 공포를 불러왔던 흔적이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 기억 속 해석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때의 감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카미의 손끝에 남은 것은 분명 실제였고, 새로운 사실이 더해질 때마다 같은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카미가 오랫동안 붙잡아온 기억은 진실을 가리는 동시에, 그 진실을 향해 나아갈 단서가 된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실이 더해질수록, 같은 흔적에도 다른 의미가 깃든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는 사랑이 놓여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진 속 얼굴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옷에 밴 체취와 오래된 가구, 손길이 닿았던 물건처럼 아주 사소한 흔적들이 한 사람의 부재를 대신한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져가는 흔적을 붙잡으려는 행동은 사랑이 무엇을 향하는 감정인지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면 그 사람이 남긴 것을 돌보는 일, 사라지는 냄새를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려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흔적을 지켜내는 일. 사랑은 때때로 이런 모습으로 남는다. 동시에 사랑에는 죄책감도 따라붙는다. 너무 오래 자신을 탓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망설이게 된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상대의 삶에 들어갈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사랑은 다정하기만 하지 않다. 그 안에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단,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멀리서 바라보는 시간이 함께 놓여 있다. 때로 사랑은 다가가는 용기보다 물러서야 하는 이유를 더 오래 품기도 한다.

결국 카미가 발견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미 존재했던 감각의 의미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원망했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가진 다른 감각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지 못해서, 더 느낄 수 있다는 것”(300쪽)이라는 깨달음은 단순한 위로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감각을 결핍으로 여겨왔던 카미가 그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다. 볼 수 없었던 세계에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었고, 그 흔적들은 결국 기억으로 이어졌다.

‘기억의 무늬’라는 제목은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형태를 닮았다. 기억은 선명한 사진처럼 남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닳고, 어떤 부분은 흐려지고, 어떤 부분에는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만졌던 것, 입었던 것, 사랑했던 것에는 시간이 남는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보다 그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을 오래 간직한다. 백희성은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 이 감각을 촘촘하게 새겨 넣는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추적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사랑을 향한다. 어떤 기억은 눈보다 손끝에 오래 남고, 어떤 사랑은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통해 계속 살아간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많은 것들이 남는다. 한때 몸을 감싸던 옷의 질감, 매일 손이 닿던 가구의 표면,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냄새까지. 『기억의 무늬』는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한 사람의 존재를 더듬어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감각으로 세계를 읽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평범한 사물에 깃든 시간과 기억을 발견하는 이야기에 마음을 두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손끝을 따라가 볼 만하다. 미스터리의 긴장 속에서 기억과 진실의 관계를 생각하고 싶은 독자, 상실과 죄책감 속에서도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지 바라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잘 어울린다.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추적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일은 그 사람의 모습을 되살리는 데만 있지 않다. 그가 만졌던 것과 사랑했던 것, 남겨놓은 작은 흔적들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도 기억은 깃든다. 그리고 때로 그 흔적들은 시간이 지운 얼굴보다 더 오래 한 사람을 말해준다.

✏️소정의 원고료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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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블루스 ㅣ B사이드 아카이브 1
슬리만 카데르 지음, 이수원 옮김 / 니케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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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본은 책의 내용과 무관한 결함이다. 모서리가 찍히거나 페이지가 접혔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션 블루스』를 읽으며 이 사소한 결함이 작품 속 ‘결핍’과 묘하게 겹쳐 보였던 것은 그래서다. 사회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흠집을 매긴다. 출신과 국적, 가난과 직업을 이유로 누군가를 더 낮은 자리로 밀어내고, 그 흔적을 능력의 부족처럼 취급한다. 파리 변두리에서 성장한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아들 왐 역시 그런 분류에서 자유롭지 않다. 카리브해의 초호화 유람선 오션킹에 올라 그가 처음 맡은 일은 가장 낮은 단계의 잡역부 ‘조커’. 그러나 작품은 왐의 결핍을 극복해야 할 흠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출신과 환경이 어떻게 사회적 위치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주며, 그 위치에 붙은 이름이 인간의 가능성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오션킹은 이 작품의 배경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모형이다. 수천 명의 관광객이 햇빛과 바다를 소비하는 동안 그 아래에서는 훨씬 많은 노동자가 배를 유지한다. 객실을 청소하고, 하수관을 뚫고, 수영장과 기관실을 관리하고, 공연이 끝난 자리를 정리하는 일처럼 관광객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는 노동이 유람선의 화려한 풍경을 지탱한다. 여기서 ‘바다 위’와 ‘바다 아래’는 단순한 공간의 차이를 넘어 계급적 위치를 가리킨다. 누구에게는 바다가 휴양의 풍경이지만 누구에게는 하루 종일 닿지 못하는 천장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더욱 냉정한 것은 그 노동의 분배마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적과 인종, 출신에 따라 맡게 되는 일이 달라지고, 유럽인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의 업무를 맡는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출신 노동자들은 주방과 세탁, 청소 같은 업무에 집중된다. 오션킹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인 동시에, 출생과 국적이 직업과 계급으로 번역되는 축소된 사회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수많은 편리함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깨끗한 공간에는 청소하는 사람이 있고, 정돈된 식탁에는 그것을 준비한 사람이 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하루의 뒤편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오션 블루스』는 그 결과만 소비하던 시선을 과정으로 돌려놓는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소설적 르포르타주’라는 성격이 선명해진다. 르포르타주는 현실의 현장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식이며, 이 작품의 현실성은 작가 슬리만 카데르의 이력과 맞물려 있다.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아들로 파리 근교에서 성장한 작가는 실제로 카리브해의 호화 유람선에서 잡역부로 일했다. 그의 경험은 책 속 노동을 추상적인 사회 비판의 언어에서 현실의 감각으로 끌어내린다. 강력한 살충제, 막힌 하수관, 쌓여가는 음식 재료, 공연 뒤에 남은 오물 같은 구체적인 사물과 육체의 감각이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작가는 노동자를 불쌍한 존재로 전시하는 대신, 화려한 관광 산업이 유지되는 과정을 그 내부에서부터 보여준다. 더구나 왐의 거칠고 경박한 언어와 빠르게 치고 나가는 문장은 이 세계를 지나치게 엄숙한 비극으로 만들지 않는다. 웃음은 현실을 희석하기보다 그 현실을 견디는 사람의 감각을 보존한다. 르포르타주가 현실을 기록하는 장르라면, 카데르는 그 현실에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입힌다. 그래서 오션킹의 밑바닥은 통계나 보고서 속 숫자로 남지 않고, 냄새와 소음과 땀과 욕설이 뒤섞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조커’라는 직책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적인 이름이다. 조커는 유람선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잡역부다. 정해진 전문 업무 없이 사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투입되는 자리이기에, 사회적 위계만 놓고 보면 가장 불안정한 위치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불안정성이 왐에게는 이동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나의 업무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배의 여러 영역을 경험하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카드 게임의 조커가 특정한 패에 고정되지 않고 다른 카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듯, 왐 역시 하나의 자리로 규정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시작한 사람이 오히려 가장 많은 위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바꾸어간다는 점에서 조커는 단순한 직책명이 아니라 이 작품이 바라보는 인간의 형상을 상징한다.

사회는 인간을 출신과 직업, 국적과 계급으로 분류하지만 삶은 그 분류표만큼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작품은 그 가능성을 손쉬운 성공담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왐의 이동에는 노동과 능력만큼이나 우연과 운이 작용하고, 위로 올라간 뒤에도 그 자리가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공을 개인의 의지로만 설명하는 서사가 지워버리는 것은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누구나 같은 출발선에 서지 않으며,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같은 곳에 도착하지도 않는다. 갑판의 높이가 인간의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생각보다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이 유람선의 풍경 아래에 놓여 있다.

파본된 책은 완벽한 상태의 책에서 밀려난 흔적을 지닌다. 그렇다고 그 책의 가치까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션 블루스』가 바라보는 사람의 삶도 그와 닮았다. 사회가 결함으로 분류한 출신과 가난, 실패와 결핍은 한 사람을 설명하는 조건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흔적을 가진 채 어디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오션킹 역시 그렇다. 햇빛을 받는 사람과 그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계급적 차이가 있지만,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갑판 위의 화려함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를 움직이는 수많은 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타고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내가 서 있는 갑판 아래에 누가 있는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조금 찍힌 책 한 권이 오히려 그 책만의 흔적을 갖게 되듯, 인간의 삶 역시 흠을 지운 뒤에야 온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바다를 건너면서도 서로 다른 갑판에 서 있는 사람들. 『오션 블루스』는 그 높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결국 하나의 배를 움직이는 것은 그 차이 아래 묵묵히 이어지는 수많은 삶이라는 사실을 기록한다.

바다 위에는 햇빛이 있고, 그 아래에는 그 햇빛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오션 블루스』는 화려한 유람선의 갑판에서 시선을 거두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노동은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나뉘고, 사람의 출신은 직업의 이름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이 책은 보이지 않는 노동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이민과 계급의 경계를 문학으로 읽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실제 유람선 노동 경험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가 거친 농담과 속도감 있는 문장 속에서 펼쳐지는 만큼, 르포르타주와 소설의 경계가 궁금한 독자나 정해진 성공의 궤도에서 벗어난 성장담을 찾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누구나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같은 갑판에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조차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우연과 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유쾌하면서도 집요하게 기록한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사람의 자리를 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자리는 정말 자신의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한 권이다.

✏️도서출판 니케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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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
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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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어디에 머무를까. 분명 무언가를 느끼고 있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는데 막상 입을 열거나 펜을 들면 손에 잡히는 것은 몇 개의 단어뿐인 순간이 있다. 마음속에서는 선명했던 장면이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흐려지기도 한다. 생각은 언어보다 먼저 태어난다고 믿어왔지만, 오가와 사토시의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를 읽으며 그 믿음이 조금 달라진다. 어쩌면 생각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감정과 경험의 덩어리이고, 그것에 하나씩 언어를 부여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장을 만드는 일에 앞서 흐릿한 마음의 풍경에 윤곽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화’는 단순히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기술이 아니다.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구체화하고, 다시 바라보는 방법을 보여준다. 특히 추상화와 개별화를 오가는 사고법은 소설가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계까지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생각이 구체적인 이야기로 변해가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하나의 경험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한 뒤 다시 구체적인 장면으로 내려오는 과정.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건너가는 이 움직임 속에서 창작은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사이에 숨어 있던 관계를 발견하는 작업이 된다. 세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현실 곳곳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다. 창작의 시작에는 특별한 영감보다 세계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발견한 생각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있을까.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와 독자가 마주할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작가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장면도 독자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세계다. 작가는 인물의 과거를 알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지만 독자는 첫 문장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놓기보다, 독자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헤아리며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건네는 일이다. 같은 문장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고, 같은 사건도 무엇을 먼저 알고 무엇을 나중에 아느냐에 따라 독자가 경험하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결국 소설에서 정보의 배치는 곧 독자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인 동시에 독자가 이야기를 발견해갈 순서를 조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순간, 소설은 삶과 닮아온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말한다고 해서 언제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맥락과 상대가 알고 있는 맥락은 다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 담아둔 경험은 서로 다르다. 결국 소통이란 같은 생각을 갖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가깝다. 오가와 사토시가 소설을 소통의 문제로 바라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작가는 혼자 남지 않는다. 아직 만나지 않은 독자를 상상해야 하고,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낯선 사람의 눈으로 다시 살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문장은 특별한 표현을 골라내는 능력에서 태어나기보다, 내 생각이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도착할지를 오래 고민한 끝에 만들어진다. 문체 역시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잘라내어 건네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책을 읽을수록 오가와 사토시라는 소설가가 소설을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생각해왔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하는 대상은 줄곧 소설인데, 그 안에서 세계의 규칙을 만드는 법부터 인물의 과거와 현재, 정보의 배치, 문체, 아이디어, 복선과 독자의 읽기까지 수많은 문제를 하나의 사고 체계 안에서 연결한다. 특히 ‘복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은 소설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놓는다. 흔히 복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작가가 특별한 의미를 숨겨둔 몇몇 문장을 가리키지만, 오가와 사토시는 소설 속 모든 문장이 이후의 사건과 연결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복선을 따로 구분하는 일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이 놓인 순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뒤이어 나타나는 사건과 함께 계속 달라진다. 그러니 소설 속 모든 문장은 하나의 가능성을 품고 독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는 작가가 모든 의미를 미리 정해두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과 사건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며 읽어가는 과정 속에서 계속 모습을 바꾼다. 작가가 이야기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독자는 그 설계 안에서 의미를 다시 구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은 창작론을 읽고 있다는 감각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조를 찾아내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야 한다.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업무를 전달할 때도, 친구에게 마음을 설명할 때도, 한 권의 책을 읽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소개할 때도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야 하고, 그다음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훈련한 사고가 삶의 여러 장면에서 쓰일 수 있는 이유다. 창작의 기술 속에는 복잡한 현실에서 핵심을 찾아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사고의 기본적인 움직임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시 쓰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책을 사랑하고 오랫동안 읽어온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읽는 동안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막상 빈 종이를 펼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좋은 이야기를 쓰려면 먼저 완벽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펜을 드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생각을 기다린 뒤 쓰기 시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쓰는 과정 자체를 사고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쓰고 고치고 다시 바라보는 동안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생각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창작의 시작에 필요한 것은 완성된 이야기보다 아직 언어를 얻지 못한 어떤 감각을 끝까지 바라보려는 마음일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발견하는 것은 이야기만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사람인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인지, 어떤 이야기를 오래 바라보고 싶은 사람인지도 조금씩 드러난다. 책 속에서 오가와 사토시가 끊임없이 소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한 편의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오래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는 생각을 담아두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생각의 모양을 바꾸는 도구이기도 하다. 흐릿했던 감각에 이름이 생기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순간,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는 소설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찾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들고, 나와 다른 세계를 가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 결국 창작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 머물던 세계를 타인의 세계로 옮겨가는 긴 여행이다. 그 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보다 오래 바라보고 정확하게 생각하며 끝까지 언어를 찾는 태도일 것이다. 책을 읽은 뒤 다시 펜을 들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건넨 가장 좋은 창작론을 이미 경험한 셈이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 하나가 마음속에 있다면, 이제 그것을 조금씩 불러내어도 좋겠다. 쓰기 시작하는 순간, 오래 찾던 자신의 이야기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행선지를 따라가는 일만은 아니다. 한 문장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사이,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는 순간이 생긴다. 그때 비로소 감상은 생각의 모양을 갖추고, 생각은 말이 될 준비를 한다. 소설을 읽고도 무엇을 느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사람,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자신의 독서 경험을 글로 옮기려 하면 막막해지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어디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책은 소설가를 위한 기술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 또렷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읽은 문장들은 책을 덮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재료가 되어 다시 우리 안에서 조합된다.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는 그 조합의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막연했던 감상을 하나의 문장으로 건져 올리는 법을 이야기한다.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소설이 어떻게 다시 쓰이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도서출판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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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하는 고고학자 - 고대 인류 문명의 모습과 소리, 냄새, 맛을 재현하는 과학자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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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토기 하나, 그을린 돌 하나, 오래된 뼈 한 조각에도 누군가의 하루와 문명이 숨어 있다. 고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린 시절 한 번쯤 품어보았을 낭만이 떠오른다. 땅속에 묻힌 유물을 찾아내고, 오래전 사라진 문명의 비밀을 밝혀내는 사람들. 샘 킨의 『실험하는 고고학자』는 그 낭만적인 상상을 조금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유물을 찾아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유물이 어떤 손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몸을 거쳐 사용되었는지 직접 실험하며 과거에 다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고학자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삽이 아니라 호기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약 7만 5천 년 전 아프리카에서 1500년대 멕시코까지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책은 돌을 깨고, 음식을 만들고, 배를 띄우고, 무기를 던지고, 치료법과 생활 기술을 재현하는 실험들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명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남겨진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흔적이 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해보려는 태도다.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과학적인 방법을 만날 때, 과거는 박물관의 유리장 안에 놓인 유물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옮겨간다.

오래된 돌 하나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돌을 깨서 도구를 만들어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일 것이다. 나에게는 산책하다가 주워온, 단면이 날카롭게 깨진 돌이 하나 있다. 택배를 뜯는 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돌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지만, 이것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노동이 필요했을까. 책 속 실험고고학자들은 바로 이런 의문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과거의 기술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들어보고, 사용해보고, 실패하면서 유물에 남은 형태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제작 과정과 사용의 감각을 살핀다. 그러면 박물관의 유물에 붙어 있던 설명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것이 드러난다. 기술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편리해 보이는 도구 하나에도 몸의 감각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쌓여 있었다. 유물의 형태를 인간의 노동으로 되돌려놓는 순간, 과거의 인간은 막연한 ‘원시인’이나 특정 문명의 이름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실패를 견디며 방법을 찾아냈던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때 실험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과거에 관한 지식을 검증하는 방법이 된다. 고대의 방식으로 빵을 굽고 맥주를 만들며, 폴리네시아의 항해 기술을 살피고, 로마의 생활 기술을 재현하고, 오래된 치료법을 시험하는 과정에서는 성공만큼 실패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상했던 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과거에 대한 설명 역시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는 과정에서 책이나 유물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노동의 양과 기술의 정교함이 드러나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역사적 설명 속에 얼마나 많은 추론과 가정이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지식은 이미 완성된 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과 그 흔적을 해석하는 수많은 시도 위에 세워져 있다. 실험은 그 가설을 실제 세계에 가져와 움직여보는 일이며, 실패까지 포함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조정하는 과정이다.

역사책에는 연도와 사건이 남고, 박물관에는 도구와 유물이 남는다. 그러나 그 물건을 사용했던 사람의 손에 전해졌던 진동이나, 불 앞에서 흘렸을 땀, 갓 구운 빵의 냄새, 낯선 바다 위에서 느꼈을 두려움까지 기록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눈으로만 한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다. 먹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아파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실험고고학이 복원하는 것은 기술의 기능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했던 몸의 경험이기도 하다. 책이 고대 문명의 소리와 냄새, 맛까지 되살리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사를 시각적인 기록에서 오감의 경험으로 넓히는 순간, 문명이라는 단어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생활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와 더불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만들며 어떤 감각 속에서 하루를 보냈는지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를 되살리는 일에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부분이 남는다. 이 책에서 실제 고고학 실험에 관한 이야기와 작가가 상상한 짧은 역사적 이야기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 역시 그런 한계를 보여준다. 실험은 “이것이 실제로 가능했는가”를 묻고, 상상은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를 그려본다.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불러낼 수 없다. 남겨진 흔적을 살피고, 가능한 방법을 실험하고, 그 사이의 빈 곳을 조심스럽게 상상하면서 사라진 세계의 모습에 다가갈 뿐이다. 고고학이 다루는 것은 결국 사라진 세계의 잔해이므로, 그 세계에 대한 설명에는 필연적으로 해석이 개입된다. 그래서 이 책의 실험은 과거를 확정하는 방법이라기보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더 단단한 근거 위에 올려놓는 방법으로 읽힌다. 과학과 상상은 서로 멀리 떨어진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라진 시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는 서로의 빈 곳을 메우며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은 오래된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되살아나는 것은 물건보다 사람이다. 돌도끼를 만든 손, 빵을 굽던 손, 바다를 바라보던 눈, 상처를 치료하던 손길, 몸에 문신을 새기던 피부. 유물은 그들의 삶에서 아주 작은 일부만을 남겼지만,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문명의 역사는 다시 인간의 역사로 좁혀진다. 피라미드나 로마의 도로, 폴리네시아의 항해와 아즈텍의 의례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곳에,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몸과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명도 결국은 수많은 사람이 반복해서 움직인 하루들 위에 세워진다. 실험고고학은 바로 그 하루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를 거대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손과 발, 음식과 도구, 피로와 감각이 있는 생활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호기심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동안 세상은 편리해지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 줄어든다. 어린 시절에는 돌 하나만 주워도 이것저것 궁금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그냥 돌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해진다. 질문하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험고고학자들은 아주 오래된 돌 하나 앞에서도 멈춰 선다. 누가 만들었을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정말 이런 방식으로 사용했을까. 직접 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궁금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몸을 움직이고, 실패를 반복한다. 고고학자의 낭만을 오래된 유물이나 잃어버린 문명에서 찾는다면 이 책이 보여주는 낭만은 조금 다르다. 그것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흔적 앞에서 멈춰 서는 마음,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 다시 의문을 품는 태도, 사라진 시간을 향해 호기심을 보내는 사람의 자세에 있다.

『실험하는 고고학자』는 그렇게 과거를 탐험하는 책인 동시에, 현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을 되돌려놓는 책이다. 깨진 돌 하나에도 누군가의 손이 있었고, 오래된 음식 하나에도 한 사람의 하루가 있었으며, 지금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는 도구에도 처음 그것을 만들었던 누군가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과거는 먼 곳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오래된 돌 하나를 손에 쥐고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서 어떻게 태어났을지 상상하는 순간, 지나간 시간은 박물관의 유리 너머에서 조금씩 걸어 나온다. 고고학과 역사에 오래된 문명의 낭만을 품어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과학을 공식과 숫자보다 직접 해보고 실패하며 알아가는 이야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실험들이 꽤 근사한 모험이 되어줄 것이다. 특히 도구와 음식, 몸과 노동처럼 거대한 역사 뒤에 가려진 생활의 흔적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한 시대가 전혀 다른 질감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돌멩이 하나에도 이유를 붙이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왜?”를 붙였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이 책이 되살리는 것은 오래된 문명만이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익숙해진 탓에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능력까지 함께 꺼내 보여주는 책이다.

✏️도서출판 해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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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다 거짓이야
대니얼 나예리 지음, 김래경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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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사람을 어디까지 살게 할 수 있을까. 대니얼 나예리의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열두 살 소년 호스로는 이란을 떠나 두바이와 이탈리아의 난민 캠프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낯선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그가 살아온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향도, 가족도, 자신을 둘러싼 언어도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호스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년의 일상 사이로 페르시아의 오래된 설화가 끼어들고, 가족의 과거가 나타났다가 다시 역사와 신화로 건너간다. 한 소년의 난민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백 년 전의 왕과 사랑에 빠진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책 안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하는 일도, 가족의 역사를 되짚는 일도 반듯한 순서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호스로의 기억 역시 그렇다. 조각난 시간과 희미한 장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와 스스로 상상한 장면들이 뒤섞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 이 낯선 형식은 결국 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천일야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죽음을 앞둔 왕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동안 그녀의 목숨도 끝나지 않는다. 호스로 역시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한 사람은 왕에게, 다른 한 사람은 교실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 모두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셰에라자드에게 이야기는 죽음을 하루씩 미루는 방법이었다면, 호스로에게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정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아무도 자신의 고향을 보지 못했고, 자신의 기억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삶을 대신 증언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는 이야기로 자신을 세계 안에 세운다. 그래서 호스로에게 이야기를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말할 것을 잃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할 마지막 언어까지 잃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기억의 오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호스로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이 어긋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이어 붙인다. 어린 시절 확실하게 믿었던 한 장면의 진실조차 나중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이 작품의 독특한 제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제는 『Everything Sad Is Untrue』. 그 뒤에는 ‘A True Story’라는 문구가 붙는다. 슬픈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호스로가 겪은 슬픔은 분명 현실이다. 고향을 잃은 일도, 가족이 흩어진 일도, 난민으로 살아가는 일도, 낯선 땅에서 차별받는 일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일까. 아마 슬픔이 영원히 삶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 책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깔끔하게 가려내는 이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준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일 수 있다. 조금 틀린 기억이라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삶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기억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이야기를 만든다.

호스로가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다니엘’로 불리게 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하나가 바뀌는 순간, 그가 살아온 세계의 일부도 함께 낯설어지는 듯하다. 이란에서의 삶과 가족, 언어와 음식,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씩 뒤로 물러난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장소 하나를 잃는 일을 넘어 그곳에서의 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스로는 이야기 속에서 고향을 다시 만든다. 이스파한의 풍경과 가족의 역사, 오래된 전설을 들려주는 동안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잠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야기 속에서는 잃어버린 이름도, 오래된 기억도 다시 불릴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슬픔을 신화로 바꾼다는 말은 현실을 아름답게 꾸며내는 일이 아니다. 이란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난민으로 살아온 시간도, 낯선 땅에서 마주한 차별과 폭력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호스로는 그 슬픔을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꾼다. 출판사가 말한 ‘가혹한 역사를 등지고 쏘아 올린 눈부신 자유의 신화’라는 표현도 이 지점에서 이해된다. 신화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나머지를 함께 담기 위해 만들어진다. 슬픔을 이야기로 바꾸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자신을 짓누르기만 하는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된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언제나 희망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은 때때로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엄은 이미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호스로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이야기하고,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빈자리까지 품은 채 이야기한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소년이 낯선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식.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빼앗긴 삶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다.

『슬픔은 다 거짓이야』라는 제목은 그래서 슬픔을 부정하는 말로 읽히지 않는다. 슬픔은 분명 진실이다. 다만 슬픔이 삶의 마지막 문장이라는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 호스로가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과거는 다시 목소리를 얻고, 사라진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놓지 못하고, 잃어버린 고향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계속 말할 수 있다면, 상실 이후에도 삶은 다른 문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그 작은 가능성이다. 슬픔을 잊지 않으면서도 슬픔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것.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 것. 인간은 슬픔을 없애며 살아갈 수 없어서,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며 다시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가 가진 가장 오래된 힘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끝나버린 삶을 되돌리는 힘이 아니라, 끝났다고 믿었던 삶에서 다시 한 문장을 시작하는 힘.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어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사라진 삶의 자리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포개지는 『천일야화』의 구조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서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기억의 빈틈 속에서도 무엇이 진실한 이야기인지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상실 이후에도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지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슬픔을 지워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에, 이 책은 조금 다른 생의 방식을 건넨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그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 잃어버린 것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것.

✏️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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