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다 거짓이야
대니얼 나예리 지음, 김래경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사람을 어디까지 살게 할 수 있을까. 대니얼 나예리의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 질문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열두 살 소년 호스로는 이란을 떠나 두바이와 이탈리아의 난민 캠프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낯선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그가 살아온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향도, 가족도, 자신을 둘러싼 언어도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호스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년의 일상 사이로 페르시아의 오래된 설화가 끼어들고, 가족의 과거가 나타났다가 다시 역사와 신화로 건너간다. 한 소년의 난민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백 년 전의 왕과 사랑에 빠진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책 안에서 겹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하는 일도, 가족의 역사를 되짚는 일도 반듯한 순서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호스로의 기억 역시 그렇다. 조각난 시간과 희미한 장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와 스스로 상상한 장면들이 뒤섞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 이 낯선 형식은 결국 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천일야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죽음을 앞둔 왕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동안 그녀의 목숨도 끝나지 않는다. 호스로 역시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한 사람은 왕에게, 다른 한 사람은 교실의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 모두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셰에라자드에게 이야기는 죽음을 하루씩 미루는 방법이었다면, 호스로에게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정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아무도 자신의 고향을 보지 못했고, 자신의 기억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삶을 대신 증언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는 이야기로 자신을 세계 안에 세운다. 그래서 호스로에게 이야기를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말할 것을 잃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할 마지막 언어까지 잃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기억의 오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호스로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가족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기억이 어긋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이어 붙인다. 어린 시절 확실하게 믿었던 한 장면의 진실조차 나중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이 작품의 독특한 제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원제는 『Everything Sad Is Untrue』. 그 뒤에는 ‘A True Story’라는 문구가 붙는다. 슬픈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호스로가 겪은 슬픔은 분명 현실이다. 고향을 잃은 일도, 가족이 흩어진 일도, 난민으로 살아가는 일도, 낯선 땅에서 차별받는 일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일까. 아마 슬픔이 영원히 삶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 책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깔끔하게 가려내는 이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준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일 수 있다. 조금 틀린 기억이라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삶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기억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이야기를 만든다.

호스로가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다니엘’로 불리게 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하나가 바뀌는 순간, 그가 살아온 세계의 일부도 함께 낯설어지는 듯하다. 이란에서의 삶과 가족, 언어와 음식,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씩 뒤로 물러난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장소 하나를 잃는 일을 넘어 그곳에서의 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스로는 이야기 속에서 고향을 다시 만든다. 이스파한의 풍경과 가족의 역사, 오래된 전설을 들려주는 동안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잠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야기 속에서는 잃어버린 이름도, 오래된 기억도 다시 불릴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슬픔을 신화로 바꾼다는 말은 현실을 아름답게 꾸며내는 일이 아니다. 이란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난민으로 살아온 시간도, 낯선 땅에서 마주한 차별과 폭력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호스로는 그 슬픔을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꾼다. 출판사가 말한 ‘가혹한 역사를 등지고 쏘아 올린 눈부신 자유의 신화’라는 표현도 이 지점에서 이해된다. 신화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나머지를 함께 담기 위해 만들어진다. 슬픔을 이야기로 바꾸는 순간, 과거는 더 이상 자신을 짓누르기만 하는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된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언제나 희망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은 때때로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엄은 이미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호스로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다시 이야기하고,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빈자리까지 품은 채 이야기한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 소년이 낯선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식.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은 자신에게서 빼앗긴 삶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다.

『슬픔은 다 거짓이야』라는 제목은 그래서 슬픔을 부정하는 말로 읽히지 않는다. 슬픔은 분명 진실이다. 다만 슬픔이 삶의 마지막 문장이라는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 호스로가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과거는 다시 목소리를 얻고, 사라진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되찾는다.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놓지 못하고, 잃어버린 고향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계속 말할 수 있다면, 상실 이후에도 삶은 다른 문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그 작은 가능성이다. 슬픔을 잊지 않으면서도 슬픔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것.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 것. 인간은 슬픔을 없애며 살아갈 수 없어서,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며 다시 살아갈 자리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가 가진 가장 오래된 힘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끝나버린 삶을 되돌리는 힘이 아니라, 끝났다고 믿었던 삶에서 다시 한 문장을 시작하는 힘.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어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사라진 삶의 자리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포개지는 『천일야화』의 구조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서사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기억의 빈틈 속에서도 무엇이 진실한 이야기인지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상실 이후에도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지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슬픔을 지워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에, 이 책은 조금 다른 생의 방식을 건넨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그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 잃어버린 것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것.

✏️도서출판 해피북스투유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