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
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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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부터 결혼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들고, 힘든 날 서로의 등을 내어주는 일에는 본래 결혼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결혼으로 향해야 온전해지고, 결혼에 이르러야 비로소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안희제의 『사랑과 안정』은 결혼을 둘러싼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랑과 안정이라는 두 단어를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 안에 포개어왔는지 보여준다. 사랑과 결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당연한 듯 놓여 있던 연결고리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양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결혼을 꿈꾸는 마음에는 낭만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생활비와 돌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결혼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지만, 그 사람이 나의 가족이고 나의 집이며 어려운 순간에도 책임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종류의 안도감을 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쉽게 대체되는 시대일수록 오래 머무르겠다는 약속을 품은 관계에 마음이 기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순간 하나가 되어, 결혼이라는 형태를 향하게 된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 된다.

하지만 안정이 결혼이라는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문밖에 서 있는 삶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좋은 직업을 얻고, 돈을 모으고, 집을 마련하고, 적절한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삶. 우리는 이것을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지만 그 평범함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결혼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관리하며, 남성에게는 경제적 능력과 책임감이, 여성에게는 외모와 나이, 출산과 돌봄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누구도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결혼하지 않는 삶을 불안해하고, 누구도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았는데 이미 정해진 생애의 순서를 따라가게 된다. 가장 단단한 규칙은 명령의 목소리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생각과 욕망인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한 뒤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위에 사회가 오래도록 정해온 역할이 포개진다. 사랑은 때때로 그 역할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언어가 된다.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사랑하니까 양보하고, 사랑하니까 돌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운 말 뒤에서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한 몫으로 굳어진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오래된 사회의 관습은 사라지는 대신 사랑의 얼굴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책임질 경제력을 증명해야 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경력을 조정해야 한다. 특히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계산하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사랑이 두 사람의 세계를 넓히는 힘이 되려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자원으로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안정이라는 말의 자리를 조금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안정은 정말 배우자 한 사람에게서만 얻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곁을 내어주는 친구,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관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해주는 사람, 아픈 날 말없이 찾아와주는 사람. 삶을 지탱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랫동안 사랑과 돌봄과 책임과 주거와 경제적 연대를 한데 묶어온 탓에, 그 밖의 관계들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을 뿐이다.

관계의 가치는 이름보다 그 안에서 서로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내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사랑의 증명이 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때로는 등을 내어주고, 필요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는 것 역시 사랑의 한 형태다. 돌봄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을 잃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일이라면, 돌봄은 희생의 다른 이름이 아닌 서로를 살아 있게 하는 관계의 방식이 된다. 좋은 관계 속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기대면서 각자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진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독립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안정』의 마지막에는 관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던 사랑과 결혼과 가정과 안정 사이에 다른 길들이 생겨난다. 친구와 가족 사이에도 돌봄이 있고, 연인 사이에도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거리가 있으며, 이름 붙이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견디게 하는 책임과 애정이 존재한다. 안정은 한 사람의 어깨에 모든 무게를 올려두는 대신 여러 관계 사이에서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갖는 일일 수 있다.

‘관계의 기하학’이라는 말은 그래서 이 책의 사유를 잘 보여준다. 삶은 하나의 직선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고, 또 다른 사람의 곁을 지켜주면서 수많은 선과 면을 만들어간다. 그 모든 관계가 반드시 같은 모양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사람이 작아지지 않는 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잃지 않는 일, 서로의 불안을 혼자 견디게 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안정될 필요가 없다. 안정 역시 한 사람의 어깨 위에만 세워질 이유가 없다. 서로의 삶을 지탱하면서도 각자의 삶이 더 넓어질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 어쩌면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이라고 부르며 찾아 헤맨 것은 그런 관계였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그리고 결혼이라는 이름 너머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 『사랑과 안정』은 사랑과 안정 사이에 너무 오래 놓여 있던 하나의 등식을 천천히 풀어내며, 그 자리에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수많은 관계의 형태를 그려낸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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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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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전부터 괴물을 상상해왔다. 켄타우로스와 좀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인간을 닮은 기계와 외계인까지.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괴물의 모습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 존재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외형의 기괴함이나 공포의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 설정한 기존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점이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에서 괴물이 출현한다. 수레카 데이비스의 『괴물의 탄생』은 괴물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경계를 어떻게 설정해왔는지를 살핀다.

이 책에서 괴물은 기존의 분류 체계를 벗어나는 존재, 곧 ‘범주를 깨뜨리는 존재’다. 무엇이 괴물인가를 결정하려면 먼저 무엇이 정상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고대의 괴물 지도와 자연사에서 인종과 국가, 성별과 신체, 프릭쇼, 신과 마녀, 기계와 외계인으로 이동하는 구성은 경계 설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의 질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를 발견하면 인간은 먼저 그것을 분류하고 이름 붙인다. 따라서 괴물의 역사는 정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상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기준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변화하는 사회적 규범이다. 정상적인 몸이 정해지면 비정상적인 몸이 생기고, 인간의 범주가 정해지면 인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존재가 생겨난다.

분류는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배제를 가능하게 한다.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그들 같은 구분은 어느 순간 단순한 차이를 설명하는 언어를 넘어선다. 한쪽에 정상과 문명의 자리를 부여하면 다른 쪽에는 결핍과 위험, 열등함의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더 세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징그러움’과 ‘혐오’다. 책에 수록된 과거의 괴물 삽화 가운데는 본능적으로 불쾌감이나 이질감을 일으키는 이미지가 있다. 낯선 신체의 비율, 과장된 얼굴, 인간과 동물의 특징이 뒤섞인 형상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적인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혐오 감정에 관한 진화심리학 연구에서는 불쾌감과 회피를 유발하는 감정이 병원체나 감염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 면역체계와 관련된다고 설명한다.

다른 존재를 보고 이질감이나 징그러움을 느끼는 것과 그 존재를 혐오하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감정은 자동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 감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낯설다’는 판단이 ‘이상하다’로, 다시 ‘비정상이다’와 ‘위험하다’로 확장되는 과정에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기준이 개입한다. 감정이 사회적 판단으로 전환되는 순간 개인의 감각은 타인을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특정한 몸이나 집단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는 언어가 반복될 때 혐오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면서 인간을 정의하고, 문명인을 야만인과 구별하면서 문명의 의미를 정하며, 정상인을 비정상인과 구별하면서 정상의 위치를 확보한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외부를 함께 만들어낼 때 더욱 선명해진다. 괴물은 이 외부를 가시화하는 장치다.

이러한 구조는 과거의 신화와 자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는 미지의 땅과 낯선 신체, 종교적 상상력이 괴물의 주요한 배경이었다면 현대에는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로봇과 외계 생명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괴물의 역사가 계속되는 까닭은 인간이 여전히 경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괴물 미래주의’는 하나의 정상만을 기준으로 삼아 타자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재검토하는 대안이다. 서로 다른 몸과 정체성, 문화와 능력이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전제를 내려놓는다면 괴물이라는 범주의 필요성도 약해진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괴물에 관한 책이면서 인간의 분류 체계에 관한 책이다. 괴물의 얼굴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괴물을 만들어내는 분류의 방식은 반복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괴물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온 기준을 검토하는 일이다. 인간의 범주를 더 넓게 설정할수록 괴물의 영역은 줄어든다. 당신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괴물의 이름표를 떼어내 보자.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낯선 타자가 아닌 우리가 아직 부르는 법을 배우지 못한 또 하나의 존재다.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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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숍앤센터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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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에서 버려진 기관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면,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생명체 ‘프랑’. 여덟 개의 팔과 네 개의 코, 겹눈처럼 인간의 신체 질서에서는 벗어난 형상을 지녔고 머릿속에는 뇌 대신 칩이 들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존재다. 설재인의 『셸리 숍앤센터』는 이 낯선 생명체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욕망에 맞춰 형태가 결정되며,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며,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버려질 수도 있는 생명이다. 유기된 프랑들이 입양 혹은 죽음을 기다리는 ‘셸리 센터’라는 공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기술과 생명을 소비하는 욕망이 아무런 충돌 없이 한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사랑받을 가치와 버려질 가치까지 인간의 판단에 따라 나뉜다. 프랑의 기괴한 몸은 단순한 장르적 장치로만 머물지 않고, 그 몸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까지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

바디 호러의 공포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몸이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신체가 낯선 방식으로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하나의 온전한 몸이라는 믿음은 무너진다. 팔과 다리, 장기와 감각기관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유한 일부라는 생각도 흔들린다. 서로 다른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한 존재 안에 결합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의 몸을 가진 것일까. 몸이 인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믿어왔다면, 프랑은 그 믿음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바디 호러의 낯섦은 신체의 변형 자체보다 우리가 몸을 통해 존재를 판단해온 방식으로 옮겨간다.

그 질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노엘이다. 프랑이면서 인간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노엘에게 외형은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소속을 보장하지 않고, 프랑이라는 사실 역시 다른 프랑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결국 노엘에게 남는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보다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몸의 모양, 기억과 감정,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는 의식. 인간을 구성한다고 믿어온 조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인간이라는 분류가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이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의 형태와 쓰임을 정하며,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이름까지 붙인다. 프랑의 삶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누구에게 사랑받을지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 역시 이 세계에서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애정은 소유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버림받은 생명은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 보내진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힘과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언제나 함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과 생명을 소유하는 권리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프랑을 둘러싼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타인, 보호해야 할 생명과 이용할 수 있는 생명을 구분하면서 세계를 정리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판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정상인지 결정하는 순간 정상의 바깥에 놓이는 존재가 생기고, 누군가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는 순간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존재 역시 만들어진다. 노엘이 프랑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모습은 이러한 질서가 인간과 프랑 사이의 경계에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인간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는 노엘에게도 ‘프랑다운 모습’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요구된다. 타자는 언제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집단 안에서도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계가 그어진다. 프랑의 몸을 기괴하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그 질서 안에 놓인다. 낯선 몸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보다, 그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의 가치와 자격까지 판단해버리는 태도가 더 깊은 폭력을 품는다.

이 소설에서 ‘인간다움’은 생물학적인 분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이 인간다움의 충분조건이라면, 인간이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고, 다른 존재의 삶을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 인정하는 능력을 인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그다음의 문제가 된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소유하는 존재와, 자신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알아보는 존재를 같은 기준으로 인간답다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인간다움은 몸 안에 고정된 어떤 본질이라기보다 타자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프랑의 존재는 인간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이용해 프랑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용도를 부여했다. 인간이 프랑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바라보는 일은 곧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고 낯선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함부로 다루지 않는 태도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다른 생명에게 이름을 붙여왔다. 그 이름에는 때로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소유와 지배도 함께 들어 있었다.

『셸리 숍앤센터』의 기괴함은 프랑의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버리는 일. 너무도 익숙하게 반복되어 온 인간의 행동들이 프랑이라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바라보일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버려진 몸의 조각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정작 낯설어진 것은 프랑의 몸이 아닌 인간의 태도다.

버려진 것은 신체의 일부다. 그러나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바라보다 보면 인간이 함께 버려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생명을 필요와 가치의 기준으로 나누는 습관,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를 쉽게 외면하는 태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아두는 오만까지.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모여 프랑이라는 존재를 이루었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재인은 기괴한 신체를 빌려 이 오래된 물음을 낯선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인간처럼 생긴 존재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 이름의 자격을 묻게 된다. 『셸리 숍앤센터』는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로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인간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프랑이 인간인가를 묻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도서출판 나무옆의자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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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벨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6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채단비 옮김 / 레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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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행복은 여전히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한 여자의 현재에서 출발해, 그녀가 평생 지키려 했던 젊음과 아름다움, 사랑의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간다. 예순 살의 글라디스 아이제나흐에게 스무 살 청년의 죽음은 단순한 범죄 사건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뒤에는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한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다른 사람의 삶까지 잠식해가는 과정이 놓여 있다.

글라디스에게 아름다움은 삶의 한 부분을 넘어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일보다 훨씬 가혹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그 시선으로 유지해온 자아까지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라디스는 자신의 나이를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딸의 나이까지 실제보다 어리게 말한다. 딸의 나이는 곧 자신의 나이를 증명하는 숫자이고, 딸의 성장은 자신이 젊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어머니에게 딸은 사랑해야 할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울이 된다. 글라디스가 견디지 못한 것은 늙은 얼굴보다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그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글라디스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여자도, 젊은 남자도, 새로운 사랑도 아니다. 그녀가 평생 맞서온 것은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이길 수도, 설득할 수도,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지나간 계절을 다시 불러낼 수 없듯 한때의 아름다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글라디스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현재에 붙잡아두려 하고, 변해가는 관계를 이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지우기 위해 딸의 시간까지 지워버리는 행동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자신의 시간을 거부하기 위해 타인의 시간을 훼손하는 것. 유한한 인간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욕망이 얼마나 기묘한 형태를 취하는지를 네미롭스키는 이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글라디스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반드시 막아야 할 벽이었다. 그 순간부터 삶은 살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일이 된다.

그녀의 사랑 역시 이 시간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라디스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욕망받는 자신, 누군가의 사랑을 독점하는 자신, 여전히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관계이지만,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자아를 확인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커진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를 붙잡으려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의 삶까지 자신의 욕망 안에 가두려는 방식으로 변한다.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동시에 잔인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두려운 만큼, 사랑받고 있는 자신을 잃는 일도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의 중심에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자리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감정에서 가장 잔인한 소유욕으로 미끄러져간다.

그런데 글라디스에게 붙여진 이름은 처음부터 그녀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제자벨(Jézabel)’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세벨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권력과 우상숭배, 파괴적인 여성성의 표상으로 읽혀온 인물이다. 네미롭스키가 불러온 제자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신의 비극 『아탈리』에서 제제벨은 죽은 뒤 딸 아탈리의 꿈에 나타난다. 죽음을 앞두고도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유령이다. 네미롭스키의 『제자벨』 역시 이 라신의 장면을 직접 호출한다. 연구자 비엔베니도 모로스 메스트레스는 『제자벨』과 『아탈리』의 관계를 분석하며, 네미롭스키의 소설이 성서의 제제벨과 라신이 다시 만들어낸 제제벨의 형상을 하나의 문학적 계보 안에서 연결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제목 속 제자벨은 한 악녀를 가리키는 이름을 넘어선다. 딸 앞에 유령으로 돌아오는 어머니,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여성,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잃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글라디스가 하나의 형상 안에서 포개진다. 제목을 알고 나면 글라디스가 바라보는 거울 역시 오래된 문학적 기억을 비추는 장치처럼 읽힌다.

이 지점에서 『제자벨』은 네미롭스키 개인의 한 작품을 넘어 작가가 반복해서 천착했던 모녀 관계의 계보 안으로 들어간다. 『무도회』와 『적』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네미롭스키는 딸이 여성으로 성장하는 순간과 어머니의 노화가 충돌하는 관계를 집요하게 그려냈다. 테레사 마누엘라 루소네는 이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네미롭스키의 소설 속 이기적인 어머니들에게 딸의 성장은 곧 자신의 늙음을 알리는 징후이자 사회적 위치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딸이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어머니가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는 욕망이 서로 얽히면서 모녀 관계는 애정과 적대 사이를 오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라디스와 딸의 관계는 훨씬 복잡해진다. 딸은 어머니의 젊음을 이어받는 존재이지만, 글라디스에게 딸은 자신의 젊음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녀는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서로의 시간을 확인시키는 존재가 된다. 딸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할수록 어머니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멀리 흘러왔는지를 확인한다. 그 순간 모성은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뒤틀리기 시작한다.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에게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어른이 되어갈까. 네미롭스키가 반복해서 파고든 모녀의 비극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사람을 반드시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을 잃는 일이 곧 자신의 존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에게 사랑은 쉽게 집착과 소유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견디지 못한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삶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제자벨』의 글라디스를 단순히 허영심 많고 잔인한 여성으로 읽는 순간 작품의 비극은 오히려 작아진다. 그녀의 선택은 분명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그 선택의 밑바닥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아름답고 싶다는 마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행복했던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네미롭스키의 인물들은 이러한 욕망을 극단적인 형태로 품는다. 그리고 욕망이 삶을 움직이는 힘을 넘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것까지 훼손한다. 『제자벨』의 냉정함은 악인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어느 순간부터 얼마나 비인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끝까지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사교계와 가족이라는 친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의 허영과 자기기만을 해부하는 네미롭스키의 소설 세계에서, 사랑은 언제든 욕망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모순이 들어 있다. 행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될 것이고, 사라질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한때의 행복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지금의 나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의 반대편에는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놓여 있는 셈이다. 행복했던 순간을 붙잡으려 할수록 그 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할수록 지금 살아 있는 시간까지 잃게 된다. 『제자벨』은 바로 그 역설을 한 인간의 삶 전체에 새겨놓는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국 끝을 앞당기기도 한다는 것.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사랑은 소유가 되고 아름다움은 집착이 되며 행복은 자신을 파괴하는 힘으로 변한다.

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그것은 행복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젊음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그 시절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사랑이 끝났다는 이유로 사랑했던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네미롭스키가 바라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제자벨』 역시 젊음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소설이라기보다, 젊음이 지나가고 사랑이 변하고 행복이 끝나는 순간에도 자기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글라디스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늙음 그 자체보다 행복했던 자신이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비극은 한 여자가 젊음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넘어, 지나간 행복을 현재에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인간이 스스로 그 행복의 자리에서 멀어져간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자벨』은 한 시대의 상류사회를 그린 소설을 넘어, 시간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인간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지를 묻는 네미롭스키의 초상으로 완성된다.

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조차 시간을 품고 있다. 한때의 젊음도, 사랑도,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도 결국 지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아름다움은 축복에서 족쇄로 모습을 바꾼다.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은 그 변화를 한 여성의 삶과 욕망을 통해 포착하는 소설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의 불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소유와 집착으로 기울어가는 순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상처를 되돌려주게 되는 인간의 모순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특히 프랑스 문학 특유의 냉정하고 우아한 시선 속에서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해부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네미롭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레모가 오랜 시간 한 작가의 작품을 한 권씩 국내에 소개해온 여정도 함께 돌아보기를 권한다. 『무도회』에서 시작해 『제자벨』을 거쳐 『고독의 와인』에 이르기까지. 레모가 꾸준히 펼쳐온 네미롭스키의 세계가 이번 선집을 통해 하나의 윤곽을 갖추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여러 권의 책으로 천천히 따라가는 일은 작품 하나를 읽는 것과 또 다른 독서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프랑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오래된 작품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건네는 레모의 행보 역시 반가울 것이다. 한 사람의 상처가 어떻게 문학이 되고, ,그 문학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독자의 손에 도착하는지를 지켜보는 일. 레모의 네미롭스키 선집은 그 시간을 한 권씩 이어 붙여왔다. 이번 완간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도서출판 레모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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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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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너무 많은 작품이 변주했으며, 수없이 많은 이름과 장면이 오늘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 『오뒷세이아』가 그겋다. 키클롭스, 키르케, 세이렌, 스퀼라와 카리브디스, 트로이의 목마와 페넬로페의 기다림.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적 원천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수천 년 동안 번역되고 각색되며 수많은 서사의 원형이 되었다. 익숙한 장면들을 거슬러 원전으로 돌아가면 그 기원에 자리한 서사는 예상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각각의 기이한 사건으로 흩어져 있지 않다. 그 모든 사건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며,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모험담보다 훨씬 깊고, 영웅의 승리보다 훨씬 쓸쓸하며, 한 사람의 귀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집단적 사건 속에서 영웅적 명예와 죽음의 문제를 전면에 세운다면, 『오뒷세이아』는 전쟁 이후의 시간을 서사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에서 10년을 싸운 뒤 다시 10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서사는 계속된다. 이때 영웅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적을 쓰러뜨리는 힘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구성하는 능력으로 이동한다. 작품을 조직하는 핵심 개념인 nostos, 곧 귀향은 이러한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수많은 섬과 괴물, 유혹과 재난을 통과하는 모험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돌아간 뒤 그곳에서 다시 오뒷세우스로 인정받는 것.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귀환은 지도 위의 이동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다. 20년의 부재를 통과한 인간에게 고향은 기억 속의 장소와 현실의 장소가 겹쳐지는 지점이며, 그가 되찾아야 할 것은 왕좌 하나가 아니라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신하들,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 존재했던 공동체 안의 자리다.

이러한 귀환의 구조는 작품 후반부에 반복되는 인식(anagnōrisis)의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에우리클레이아가 흉터를 알아보고, 아르고스가 주인을 알아보고, 라에르테스가 아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페넬로페가 남편을 알아본다. 이 장면들은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이 개인의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랜 부재를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스스로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숨김이 있었기에 인식이 가능하고, 부재가 있었기에 재회가 의미를 갖는다. 귀환은 한 사람의 이동으로 시작하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얻는 순간 완성된다.

페넬로페와의 재회는 이 구조를 가장 아름답고 치밀하게 압축한다.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페넬로페는 눈앞의 남자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얼굴이나 이름보다 확실한 증거다. 오뒷세우스는 그 시험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침대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침대는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기억하는 하나의 물질적 흔적이다. 이 장면에서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은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명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이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페넬로페가 남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만의 과거가 필요했다. 결국 귀환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우스라는 영웅을 영웅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와 다른 영웅의 형식을 제시한다. 아킬레우스의 영웅성이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과 명예의 추구에 있다면, 오뒷세우스의 핵심적인 능력은 mêtis다. 상황을 읽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지혜. 폴뤼페모스 앞에서는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소개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으며, 이타카에 돌아온 뒤에는 거지의 모습으로 궁전에 들어간다. 그의 영웅성을 세계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방식보다 세계의 규칙을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강한 힘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판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긴 항해를 통해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뤼페모스 앞에서 선택한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적인 표지가 된다. 영웅에게 이름은 명예와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지만, 오뒷세우스는 살아남기 위해 그 이름을 지운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익명성을 통과한 뒤 그는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은 하나의 얼굴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서 성립하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을 통과하면서도 귀환의 방향을 잃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했던 인간이 마침내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그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때 오뒷세우스의 귀환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축이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의 시간이다. 『오뒷세이아』에는 떠난 사람의 여행과 남겨진 사람의 여행이 동시에 흐른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성장한 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성장을 경험한다.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곧 아버지의 빈자리를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여행이 된다. 페넬로페 역시 수의를 짜고 풀며 시간을 지연하고, 구혼자들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지켜내며, 돌아온 오뒷세우스마저 시험한다. 오뒷세우스가 바다 위에서 mêtis를 사용했다면 페넬로페는 궁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같은 종류의 지혜를 발휘한다. 두 사람의 재회가 특별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서로를 기다린 두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지혜와 기억을 보존했고, 그 지혜를 통해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환의 완성에는 복수와 폭력이라는 어두운 통로가 놓여 있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구혼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은 다시 복수를 준비한다.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질서가 걸린 고대의 세계에서 그의 복수는 정당한 응징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피를 부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고, 개인의 복수는 공동체 전체를 다시 전쟁으로 끌어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오뒷세이아』는 영웅의 승리를 개인적인 복수의 완성으로 닫지 않는다. 마지막에 아테나가 개입해 양쪽의 폭력을 멈추고 이타카의 평화를 회복하면서 서사의 종착점은 복수의 성공에서 복수의 중단과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동한다. 오뒷세우스가 집을 되찾는 일은 개인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인간이 다시 공동체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귀환은 사회적인 의미까지 획득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오뒷세이아』가 문학사에 남긴 의미도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전쟁과 영웅의 승리를 노래하는 서사시의 세계에 부재와 귀환, 가족과 기억, 정체성과 인식, 지혜와 폭력이라는 문제를 함께 배치한다. 이후 서양 문학이 반복해서 변주한 귀향자의 서사, 낯선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인물, 오랜 부재 끝에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의 원형이 이미 이곳에서 높은 완성도로 구축되어 있다. 『오뒷세이아』가 하나의 고전을 넘어 문학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단지 그 서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동을 삶의 구조로 확장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텍스트를 오늘 읽는 과정에서는 번역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수천 년 전 다른 언어로 불리고 전해진 노래가 지금의 독자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수많은 손과 목소리를 거쳐야 한다. 희랍어의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는 언어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 시대의 신화와 인간관, 반복되는 수사와 서사적 리듬, 인물의 감정과 고대 서사시 특유의 언어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 교수의 완역은 『오뒷세이아』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오랜 시간 희랍어 원전을 붙들고 작업한 번역자는 호메로스의 언어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지나치게 평탄하게 다듬기보다, 때로는 낯선 표현과 고대인의 사고방식까지 우리말 안에 남겨두는 길을 택했다. 원전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시대의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까지 함께 읽는 일이다. 이 책에서 번역은 원문과 독자 사이를 가리는 투명한 막이 아닌, 고대의 언어와 사유를 오늘의 독자에게 건네는 적극적인 해석의 행위가 된다.

그래서 『오뒷세이아』에서 말하는 귀환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변화를 통과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삶으로 연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떠나기 전의 오뒷세우스와 돌아온 오뒷세우스는 같은 사람이면서 서로 다른 인간이다. 그가 기억하는 이타카와 실제로 마주한 이타카 역시 2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달라져 있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이 있으며,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다. 귀환은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모든 변화를 끌어안은 채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근거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폴뤼페모스 앞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오히려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름을 잃고, 모습을 바꾸고, 낯선 세계를 통과하고, 오랜 부재를 견딘 끝에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인간. 오뒷세우스의 긴 항해가 보여주는 것은 영웅의 특별한 운명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고, 잃어버린 시간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관계가 있으며, 오랜 시간을 지나 달라진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마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여행 중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떠나던 날의 모습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떠난 사람 역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귀환은 가능하다.

아무도 아닌 자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얻고,
떠났던 사람이 돌아온 자가 되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

그때 귀환은 하나의 이동을 넘어 하나의 삶이 된다. 수천 년 전 호메로스가 노래한 오래된 귀환의 서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리, 그곳에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 한 인간이 서 있다.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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