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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평점 :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너무 많은 작품이 변주했으며, 수없이 많은 이름과 장면이 오늘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 『오뒷세이아』가 그겋다. 키클롭스, 키르케, 세이렌, 스퀼라와 카리브디스, 트로이의 목마와 페넬로페의 기다림.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적 원천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수천 년 동안 번역되고 각색되며 수많은 서사의 원형이 되었다. 익숙한 장면들을 거슬러 원전으로 돌아가면 그 기원에 자리한 서사는 예상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각각의 기이한 사건으로 흩어져 있지 않다. 그 모든 사건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며,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모험담보다 훨씬 깊고, 영웅의 승리보다 훨씬 쓸쓸하며, 한 사람의 귀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집단적 사건 속에서 영웅적 명예와 죽음의 문제를 전면에 세운다면, 『오뒷세이아』는 전쟁 이후의 시간을 서사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에서 10년을 싸운 뒤 다시 10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서사는 계속된다. 이때 영웅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적을 쓰러뜨리는 힘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구성하는 능력으로 이동한다. 작품을 조직하는 핵심 개념인 nostos, 곧 귀향은 이러한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수많은 섬과 괴물, 유혹과 재난을 통과하는 모험은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돌아간 뒤 그곳에서 다시 오뒷세우스로 인정받는 것.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귀환은 지도 위의 이동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다. 20년의 부재를 통과한 인간에게 고향은 기억 속의 장소와 현실의 장소가 겹쳐지는 지점이며, 그가 되찾아야 할 것은 왕좌 하나가 아니라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신하들,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 존재했던 공동체 안의 자리다.
이러한 귀환의 구조는 작품 후반부에 반복되는 인식(anagnōrisis)의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드러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알아보고, 에우리클레이아가 흉터를 알아보고, 아르고스가 주인을 알아보고, 라에르테스가 아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페넬로페가 남편을 알아본다. 이 장면들은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이 개인의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랜 부재를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스스로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숨김이 있었기에 인식이 가능하고, 부재가 있었기에 재회가 의미를 갖는다. 귀환은 한 사람의 이동으로 시작하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얻는 순간 완성된다.
페넬로페와의 재회는 이 구조를 가장 아름답고 치밀하게 압축한다.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페넬로페는 눈앞의 남자를 즉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얼굴이나 이름보다 확실한 증거다. 오뒷세우스는 그 시험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침대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침대는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기억하는 하나의 물질적 흔적이다. 이 장면에서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은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명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이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페넬로페가 남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만의 과거가 필요했다. 결국 귀환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우스라는 영웅을 영웅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와 다른 영웅의 형식을 제시한다. 아킬레우스의 영웅성이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과 명예의 추구에 있다면, 오뒷세우스의 핵심적인 능력은 mêtis다. 상황을 읽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며,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지혜. 폴뤼페모스 앞에서는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소개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으며, 이타카에 돌아온 뒤에는 거지의 모습으로 궁전에 들어간다. 그의 영웅성을 세계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방식보다 세계의 규칙을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강한 힘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판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긴 항해를 통해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뤼페모스 앞에서 선택한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설적인 표지가 된다. 영웅에게 이름은 명예와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지만, 오뒷세우스는 살아남기 위해 그 이름을 지운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익명성을 통과한 뒤 그는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은 하나의 얼굴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서 성립하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을 통과하면서도 귀환의 방향을 잃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했던 인간이 마침내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그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때 오뒷세우스의 귀환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축이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의 시간이다. 『오뒷세이아』에는 떠난 사람의 여행과 남겨진 사람의 여행이 동시에 흐른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성장한 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성장을 경험한다.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곧 아버지의 빈자리를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여행이 된다. 페넬로페 역시 수의를 짜고 풀며 시간을 지연하고, 구혼자들의 압박 속에서 자신의 선택권을 지켜내며, 돌아온 오뒷세우스마저 시험한다. 오뒷세우스가 바다 위에서 mêtis를 사용했다면 페넬로페는 궁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같은 종류의 지혜를 발휘한다. 두 사람의 재회가 특별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서로를 기다린 두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지혜와 기억을 보존했고, 그 지혜를 통해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환의 완성에는 복수와 폭력이라는 어두운 통로가 놓여 있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집을 점거한 구혼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은 다시 복수를 준비한다.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질서가 걸린 고대의 세계에서 그의 복수는 정당한 응징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피를 부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고, 개인의 복수는 공동체 전체를 다시 전쟁으로 끌어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오뒷세이아』는 영웅의 승리를 개인적인 복수의 완성으로 닫지 않는다. 마지막에 아테나가 개입해 양쪽의 폭력을 멈추고 이타카의 평화를 회복하면서 서사의 종착점은 복수의 성공에서 복수의 중단과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동한다. 오뒷세우스가 집을 되찾는 일은 개인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인간이 다시 공동체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귀환은 사회적인 의미까지 획득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오뒷세이아』가 문학사에 남긴 의미도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전쟁과 영웅의 승리를 노래하는 서사시의 세계에 부재와 귀환, 가족과 기억, 정체성과 인식, 지혜와 폭력이라는 문제를 함께 배치한다. 이후 서양 문학이 반복해서 변주한 귀향자의 서사, 낯선 세계를 통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인물, 오랜 부재 끝에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의 원형이 이미 이곳에서 높은 완성도로 구축되어 있다. 『오뒷세이아』가 하나의 고전을 넘어 문학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단지 그 서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동을 삶의 구조로 확장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텍스트를 오늘 읽는 과정에서는 번역 역시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수천 년 전 다른 언어로 불리고 전해진 노래가 지금의 독자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수많은 손과 목소리를 거쳐야 한다. 희랍어의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는 언어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 시대의 신화와 인간관, 반복되는 수사와 서사적 리듬, 인물의 감정과 고대 서사시 특유의 언어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 교수의 완역은 『오뒷세이아』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오랜 시간 희랍어 원전을 붙들고 작업한 번역자는 호메로스의 언어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지나치게 평탄하게 다듬기보다, 때로는 낯선 표현과 고대인의 사고방식까지 우리말 안에 남겨두는 길을 택했다. 원전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시대의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까지 함께 읽는 일이다. 이 책에서 번역은 원문과 독자 사이를 가리는 투명한 막이 아닌, 고대의 언어와 사유를 오늘의 독자에게 건네는 적극적인 해석의 행위가 된다.
그래서 『오뒷세이아』에서 말하는 귀환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변화를 통과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삶으로 연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떠나기 전의 오뒷세우스와 돌아온 오뒷세우스는 같은 사람이면서 서로 다른 인간이다. 그가 기억하는 이타카와 실제로 마주한 이타카 역시 2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달라져 있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흔적이 있으며,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남아 있다. 귀환은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모든 변화를 끌어안은 채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갈 근거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폴뤼페모스 앞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아무도 아닌 자’라는 이름은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오히려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름을 잃고, 모습을 바꾸고, 낯선 세계를 통과하고, 오랜 부재를 견딘 끝에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인간. 오뒷세우스의 긴 항해가 보여주는 것은 영웅의 특별한 운명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고, 잃어버린 시간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관계가 있으며, 오랜 시간을 지나 달라진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마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여행 중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떠나던 날의 모습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떠난 사람 역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귀환은 가능하다.
아무도 아닌 자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얻고,
떠났던 사람이 돌아온 자가 되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
그때 귀환은 하나의 이동을 넘어 하나의 삶이 된다. 수천 년 전 호메로스가 노래한 오래된 귀환의 서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리, 그곳에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 한 인간이 서 있다.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