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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숍앤센터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8월
평점 :
인간의 몸에서 버려진 기관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면,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생명체 ‘프랑’. 여덟 개의 팔과 네 개의 코, 겹눈처럼 인간의 신체 질서에서는 벗어난 형상을 지녔고 머릿속에는 뇌 대신 칩이 들어 있다. 인간의 몸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존재다. 설재인의 『셸리 숍앤센터』는 이 낯선 생명체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준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욕망에 맞춰 형태가 결정되며,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상품이며,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버려질 수도 있는 생명이다. 유기된 프랑들이 입양 혹은 죽음을 기다리는 ‘셸리 센터’라는 공간은 이 세계의 질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기술과 생명을 소비하는 욕망이 아무런 충돌 없이 한자리에 놓여 있는 곳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고, 사랑받을 가치와 버려질 가치까지 인간의 판단에 따라 나뉜다. 프랑의 기괴한 몸은 단순한 장르적 장치로만 머물지 않고, 그 몸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까지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
바디 호러의 공포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몸이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신체가 낯선 방식으로 해체되고 재조합되면서, 하나의 온전한 몸이라는 믿음은 무너진다. 팔과 다리, 장기와 감각기관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유한 일부라는 생각도 흔들린다. 서로 다른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한 존재 안에 결합한다면 그 존재는 누구의 몸을 가진 것일까. 몸이 인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믿어왔다면, 프랑은 그 믿음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들로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바디 호러의 낯섦은 신체의 변형 자체보다 우리가 몸을 통해 존재를 판단해온 방식으로 옮겨간다.
그 질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노엘이다. 프랑이면서 인간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노엘에게 외형은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인간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소속을 보장하지 않고, 프랑이라는 사실 역시 다른 프랑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결국 노엘에게 남는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보다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몸의 모양, 기억과 감정,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는 의식. 인간을 구성한다고 믿어온 조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인간이라는 분류가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이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의 형태와 쓰임을 정하며,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이름까지 붙인다. 프랑의 삶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어떤 관계를 맺을지, 누구에게 사랑받을지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 역시 이 세계에서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애정은 소유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버림받은 생명은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 보내진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힘과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언제나 함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과 생명을 소유하는 권리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프랑을 둘러싼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타인, 보호해야 할 생명과 이용할 수 있는 생명을 구분하면서 세계를 정리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익숙해지는 순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판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정상인지 결정하는 순간 정상의 바깥에 놓이는 존재가 생기고, 누군가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결정하는 순간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존재 역시 만들어진다. 노엘이 프랑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모습은 이러한 질서가 인간과 프랑 사이의 경계에서만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닮았다는 이유로 인간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받는 노엘에게도 ‘프랑다운 모습’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요구된다. 타자는 언제나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집단 안에서도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계가 그어진다. 프랑의 몸을 기괴하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그 질서 안에 놓인다. 낯선 몸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감각보다, 그 불편함을 근거로 상대의 가치와 자격까지 판단해버리는 태도가 더 깊은 폭력을 품는다.
이 소설에서 ‘인간다움’은 생물학적인 분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이 인간다움의 충분조건이라면, 인간이 다른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인식하고, 다른 존재의 삶을 하나의 독립된 삶으로 인정하는 능력을 인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그다음의 문제가 된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소유하는 존재와, 자신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알아보는 존재를 같은 기준으로 인간답다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인간다움은 몸 안에 고정된 어떤 본질이라기보다 타자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프랑의 존재는 인간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을 이용해 프랑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용도를 부여했다. 인간이 프랑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바라보는 일은 곧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고 낯선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명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함부로 다루지 않는 태도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다른 생명에게 이름을 붙여왔다. 그 이름에는 때로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소유와 지배도 함께 들어 있었다.
『셸리 숍앤센터』의 기괴함은 프랑의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버리는 일. 너무도 익숙하게 반복되어 온 인간의 행동들이 프랑이라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바라보일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인간에게 버려진 몸의 조각들이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정작 낯설어진 것은 프랑의 몸이 아닌 인간의 태도다.
버려진 것은 신체의 일부다. 그러나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생명체를 바라보다 보면 인간이 함께 버려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생명을 필요와 가치의 기준으로 나누는 습관,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를 쉽게 외면하는 태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놓아두는 오만까지.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모여 프랑이라는 존재를 이루었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재인은 기괴한 신체를 빌려 이 오래된 물음을 낯선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인간처럼 생긴 존재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 이름의 자격을 묻게 된다. 『셸리 숍앤센터』는 인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로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그 생명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인간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프랑이 인간인가를 묻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도서출판 나무옆의자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