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들 때 - 유엔 특별보고관이 전하는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와, 우리가 마주해야 할 10개의 얼굴들
프란체스카 알바네세 지음, 최보민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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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존재한다. 매일 새로운 전쟁과 죽음이 뉴스의 화면을 채우고, 우리는 그것들을 몇 초 동안 바라본 뒤 다시 각자의 하루로 돌아간다. 숫자가 늘어나고, 이름이 사라지고, 비극은 어느새 하나의 통계가 된다.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룬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의 『세상이 잠들 때』는 바로 그 익숙한 무감각에서 시작한다. 이 책이 들려주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기록이 아니다. 고통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외면했는가에 대한 증언이며,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관한 책.

팔레스타인의 오늘을 이해하려면 2023년 10월 7일만 바라봐서는 부족하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전쟁 속에서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거나 피란해야 했던 나크바가 있었고,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또 한 번의 대규모 이주가 이어졌다. 가자에서는 2007년 하마스의 무력 장악 이후 이스라엘이 봉쇄를 시행하면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 식량과 연료, 의료와 생활 기반에 오랜 제약이 이어졌다. 그리고 2023년 10월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 오래된 역사 위에 또 하나의 참혹한 시간을 덧씌웠다. 2025년 10월 휴전이 성립한 뒤에도 가자에서는 공습과 포격, 총격이 이어지고 있으며, 2026년 9월 현재 가자 인구의 상당수가 심각한 식량 불안과 열악한 식수·의료 환경에 놓여 있다. 서안에서도 정착민 폭력과 이동 제한, 강제 이주가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전쟁 한 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현재의 참상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 참상이 어떤 시간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다.

알바네세는 역사의 거대한 문을 열기 전에 그 앞에 한 사람을 세운다. 여섯 살 힌드 라잡, 가자에서 잘린 팔다리를 이어 붙이며 밤을 지새운 외과 의사 가산 아부 시타, 폭격으로 물감을 사던 화방이 사라진 뒤에도 그림을 그리는 말락 마타르. 이 책에서 사람의 이름은 역사를 읽는 가장 작은 단위가 된다. 수십 년의 점령과 수많은 죽음도 결국 한 사람의 몸과 하루를 통과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전쟁은 지도 위의 화살표가 되고, 난민은 통계표의 숫자가 되며, 죽음은 뉴스의 자막으로 지나가지만, 이름 하나가 기록되는 순간 숫자였던 죽음에는 다시 한 사람의 생이 돌아온다. 힌드는 사망자 수 가운데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아이였고, 말락에게 가자는 지도상의 한 지명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되돌아가는 고향이었다. 거대한 비극을 다시 인간의 크기로 되돌려놓는 것. 이 책이 택한 기록의 방식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죽음의 숫자만이 아니다. 바로 인간이 숫자로 축소되는 과정이다. 몇 명이 죽었는지, 몇 채의 건물이 무너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났는지를 세는 일은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숫자가 인간을 대신하는 순간 그 숫자에는 목소리도 체온도 없는 기록만 남는다. 누구의 어린 시절이었는지, 누구의 가족이었는지, 누가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사라진다. 알바네세는 그 지워진 자리에 다시 사람을 돌려놓는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하는 순간 폭력은 이미 시작된다는 오랜 윤리가 여기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몸의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아이의 생명, 환자의 몸, 예술가의 손을 어떤 정치적 명분보다 아래에 둘 수 있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폭력은 언제나 총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세상이 잠들 때』가 보여주는 점령의 풍경에는 검문소와 철거된 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어떤 땅을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처럼 너무 일상적이어서 폭력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조건들이 촘촘하게 놓여 있다. 아부 하산과 조지의 이야기를 따라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도시의 돌과 골목은 더 이상 중립적인 배경으로 남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는 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막힌 길이고 한 사람에게는 집인 장소가 다른 사람에게는 떠나야 할 이유가 된다. 폭력은 때때로 인간을 쓰러뜨리는 대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반경을 조금씩 줄인다. 그러고는 그 좁아진 삶을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책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하나의 거대한 폭발 장면으로 소비하지 못하게 한다. 잉그리드의 이야기에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구조를 바라보고, 에얄의 이야기에서 공간과 건축이 폭력의 일부가 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서, 개인의 불행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사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파르트헹히트는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사람을 서로 다른 법과 권리의 체계에 가두고, 거주와 이동의 자유까지 차등적으로 배분하는 제도적 분리와 차별을 뜻한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바로 그런 구조의 언어로 바라본다. 폭력은 누군가의 손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지도와 도로, 국경과 건물의 모양 속에서도 작동한다. 눈앞에서 터지는 폭탄보다 오래 살아남는 폭력이 있다. 매일의 생활을 조금씩 덜 자유롭게 만들고, 조금씩 덜 안전하게 만들고, 마침내 그 상태를 ‘원래 그런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폭력이다.

집을 잃는다는 말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딸려온다. 말락 마타르의 이야기가 묻는 것은 난민에게 주소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문제다. 집에는 벽과 지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빛, 가족의 목소리, 익숙한 골목의 냄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장소를 빼앗는다는 것은 그 풍경이 존재할 자리를 빼앗는 일이며, 때로는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까지 빼앗는 일이다. 그래서 말락이 떠난 뒤에도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예술 활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세계에 색을 입혀 기억 속에 다시 세우는 일, 지도에서 지워질 수 있는 장소를 자신의 손으로 계속 불러내는 일처럼 보인다.

기억은 그렇게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것이 된다. 가보르 마테의 이야기에 이르면 상처는 한 사람의 몸에 머무르지 않고 세대를 건너간다.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집, 부모가 들려준 추방의 이야기, 아직 가보지 못한 고향의 이름이 한 사람의 현재를 구성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서랍이 아니라, 사라진 사람과 장소를 현재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행위다. 누군가의 삶이 없었던 일이 되지 않도록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며, 공동체가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는 방식이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지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던 사람의 자리까지 함께 지워버린다.

책의 마지막에 놓인 ‘희망이라는 끊을 수 없는 습관’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오래 생각하게 한다. 이토록 거대한 폭력 앞에서 희망이라는 말은 때대로 지나치게 순진하게 들린다. 하지만 알바네세가 말하는 희망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낙관과 거리가 있다. 절망할 이유가 충분한 세계에서도 인간이 행동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기억하고, 증언하고, 서로의 편에 서는 것. 희망은 한 번 품고 끝나는 감정이 아니라,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다시 선택해야 하는 습관이 된다.

연대는 거창한 구호보다 한 사람의 이름에서 먼저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멀리 있는 타인의 고통을 나와 무관한 사건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바라보는 것,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 고통을 만들어낸 세계에서 나의 위치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고통이 있다. 누군가의 삶이 무너지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평범한 아침을 맞고, 폭격으로 병원이 사라지는 동안 또 다른 곳에서는 하루의 일정을 걱정한다. 모든 비극을 막아낼 힘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한 척할 것인지 선택할 수는 있다. 세계가 잠든 시간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한다. 알바네세가 이 책에서 기록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잠을 깨우는 목소리다. 그리고 책은 그 목소리를 건네받은 독자에게 묻는다. 보았는가.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본 뒤에도 이전과 같은 자리에서 잠들 수 있는가.

✏️도서출판 어크로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어떤 고통은 세상이 잠든 사이에도 계속되고, 어떤 목소리는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세의 『세상이 잠들 때』는 팔레스타인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이름 뒤에 가려진 열 명의 삶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상실, 두려움과 사랑, 그리고 매일을 견디며 이어가는 평범한 삶의 언어가 열 개의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국제법과 인권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을 말해온 알바네세가 이번에는 통계와 보고서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기록이다. 법률가이자 유엔 특별보고관으로서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추적해온 그녀는 세계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분쟁’이라는 단어를 걷어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전쟁을 지도 위의 국경이나 뉴스 속 사망자 수로만 이해해온 사람에게 이 책은 다른 좌표를 건넨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하루,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몸, 빼앗긴 땅을 기억하는 방식,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도 계속되는 식사와 출근과 잠 같은 것들. 폭력은 언제나 총성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법과 행정, 국경과 검문소, 공간과 언어의 모습으로 한 사람의 하루를 조금씩 잠식한다. 이 책이 오래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조금씩’의 역사다. 그래서 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처음 들여다보려는 독자에게도, 이미 수없이 많은 기사와 영상을 통해 그곳을 바라봐온 독자에게도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멈춰 선 사람, 세계의 비극을 너무 많이 접한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 숫자와 이미지에 무감각해진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 열 명의 목소리를 통해 한 사회의 역사가 결국 개별적인 삶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페이지를 쉽게 닫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먼저의 일은 정확히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름을 기억하고, 증언을 읽고, 누군가의 삶이 지워지는 과정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읽은 뒤 더 나아가고 싶다면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같은 공식 인도주의 기관을 통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위한 지원에 참여할 수도 있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도 누군가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이 잠들 때』는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건네는 열 개의 목소리이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추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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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신 - 전래된 한국의 미의식
강병우 외 지음 / 히스테리안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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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것을 떠올려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꺼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한옥, 백자, 판소리, 굿, 한과 신명, 풍류.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표상들은 어느 순간 설명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 자체로 한국을 증명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그런데 그 목록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왜 그것들이 선택되었고, 다른 것들은 빠졌을까. 익숙한 이름을 하나씩 되짚어보는 순간 ‘한국적인 것’이라는 말에는 많은 선택과 배제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숨은신』은 그 목록을 다시 펼쳐놓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은 히스테리안이 기획한 공동 연구의 기록이다. 2024년 오픈콜을 통해 모인 열 명의 연구자·활동가·예술가가 2년 동안 각자의 삶과 작업을 연구의 현장으로 삼았다. 각자가 다른 대상을 고르고, 다른 자료를 찾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하나의 이론보다 연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엇을 들여다볼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부터 이미 한국미에 대한 판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미를 설명하는 익숙한 단어들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얻는다. 『숨은신』이 다루는 한·신명·풍류는 한국인의 고정된 미적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태초부터 존재했던 개념처럼 다뤄지지 않는다. 근대 이후 한국을 설명할 필요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언어이며, 그 과정에는 식민주의와 서구 근대성, 민족적 정체성을 둘러싼 시대적 요구, 미술 제도가 전통을 분류해온 방식이 함께 들어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무엇을 남기지 않을 것인지도 함께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이 찾아가는 대상에는 중심에서 오래 벗어나 있던 것들이 많다. 동학의 이름 없는 민중, 어린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진 역사, 재난과 애도, 기록되기 어려웠던 소리와 몸의 감각. 이들을 한데 묶어 ‘잊힌 것’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지금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는 순간 또 다른 해석이 덧붙기 때문이다. 『숨은신』은 그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만큼 누가 말할 수 있었는지, 어떤 경험이 역사로 인정받았는지도 함께 살핀다. 이 책에서 기억은 수동적인 저장 장치처럼 취급되지 않는다. 무엇을 계속 부를 것인지에 따라 남는 것이 달라진다. 한때 존재했던 소리는 발생과 동시에 흩어지고,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 기록하고, 다시 듣고, 이름을 붙이고,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다음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숨은신’이라는 제목의 괄호는 이러한 책의 태도를 단순한 기호 하나로 압축한다. 신은 하나의 뜻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종교적 존재, 귀와 영, 인간과 자연 사이의 힘,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온 어떤 것까지 각자의 연구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괄호 안을 비워둔 덕분에 그 의미들은 서로 자리를 다툴 필요가 없다. 열 명의 연구자가 같은 책 안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빈 공간 덕분이다. 서로 다른 해석이 나란히 존재하는 상태 자체가 연구의 결과로 남는다.

『숨은신』을 읽고 나면 한국미에 관한 새로운 목록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던 목록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무엇이 오래 살아남았는지보다 그것을 누가 계속 불러왔는지가 중요해진다. 어떤 전통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반대로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도 다시 찾아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생기면 현재로 돌아올 자리를 얻는다.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한국미의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고, 그 이름 주변에서 사라진 것들을 찾아보고, 그것을 지금의 언어로 옮겨놓는 일.

전통은 저절로 다음 세대에 도착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기억하고, 말하고, 기록하고, 때로는 처음과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사라짐과 지속 사이에는 그런 사람들의 시간이 놓여 있다. 『숨은신』은 그 시간을 2년에 걸친 공동 연구의 형태로 남겨놓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다시 불러 다음 시간으로 건넬 것인가.

✏️도서출판 히스테리안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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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세트 - 전2권 (한정판 케이스 + 조정래 작가노트)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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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문학은 오랫동안 개인의 삶을 압도하는 시대를 기록해왔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에서 역사는 수많은 인간의 운명을 관통하는 거대한 힘으로 존재했고, 이후의 작품에서도 사회의 구조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런 조정래가 등단 56년을 맞아 내놓은 『서리꽃』에서 바라보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다. 거대한 세계를 써온 작가가 마지막 장편에서 한 사람의 마음으로 시선을 좁혀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을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대의 큰 흐름을 따라가던 문학이 한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을 들여다보는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이재이와 윤소인의 사랑은 시와 그림에서 출발한다. 시를 쓰는 남자와 그림을 그리는 여자라는 설정부터 이 작품의 사랑은 예술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다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다소 순진하고 때로는 유치하다. 대화의 어조나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에서도 오래된 연애소설의 문법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유치함을 단순히 시대착오라고 밀어내기에는 묘한 진실이 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실제로 평소보다 서툴고 과장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오빠, 어쩌려고 영원히를 맹세하는 거예요?”(2권 256쪽)라는 소인의 말에는 사랑의 모순이 그대로 들어 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을 약속한다는 것.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가장 잘 아는 인간이 그 한계를 잠시 잊는 사건이다.

다만 작품의 사랑이 언제나 현재의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오래된 사랑의 문법은 결혼과 임신을 둘러싼 두 사람의 생각에서도 드러난다. 여성이 자신의 예술적 삶을 내려놓는 방법으로 임신과 결혼을 상상하는 장면은 오늘의 독자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언어도 변했음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 낡은 문법 안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서툰 마음만큼은 생생하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써온 조정래가 자신의 시대적 감각까지 품은 채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서리꽃』은 작품의 시간과 작가의 시간을 함께 드러내는 소설이기도 하다.

사랑의 무게는 감정의 크기보다 그것이 삶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서 드러난다. 재이는 소인의 삶에 닥친 불행 앞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고,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과 그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사랑은 감정의 언어를 넘어 하나의 윤리가 된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향한 책임을 인간의 근원적인 윤리로 보았듯, 사랑 역시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재이는 소인의 선택을 대신하기보다, 소인이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감당한다. 물론 사랑에는 늘 다른 얼굴도 있다.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상대의 선택까지 대신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재이의 사랑 역시 그 두 마음 사이를 오간다. 살리고 싶다는 마음과 존중하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사랑의 어려움이 생긴다.

이러한 사랑은 예술을 매개로 더욱 깊어진다. 소인에게 그림은 삶의 한 부분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랑과 삶에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작품 후반부를 채우는 반 고흐의 그림과 생애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조정래는 반 고흐를 장식적인 소재로 두지 않고, 그의 삶과 작품을 두 사람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처럼 가져온다. 가난과 고독, 예술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그려낸 반 고흐의 생애는 그림을 통해 삶을 견디려는 소인의 모습과 포개진다. 특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둘러싼 장면에서는 실제 풍경과 그림 속 풍경, 오래전 죽은 화가와 현재의 두 사람이 하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예술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건넨다. 니체가 예술에서 삶의 고통을 견디고 긍정하게 하는 힘을 보았듯, 소인에게 그림은 아픔이 존재하는 자리에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두 사람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마다 고통의 시간은 잠시 다른 속도로 흐른다.

그래서 『서리꽃』에서 사랑과 예술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주제가 아니다. 두 사람을 이어준 것도 시와 그림이었고, 함께 나누는 가장 깊은 대화 역시 예술을 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과 한 점의 그림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다 대상의 표면 너머에 있는 것까지 이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 인간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일이고, 예술은 하나의 세계를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다. 조정래가 반 고흐의 그림을 두 사람의 사랑 사이에 오래 펼쳐놓은 까닭도 이러한 연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와 그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통로이면서, 각자의 고통과 내면을 말없이 이해하게 하는 언어가 된다. 그래서 소인이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과 재이가 그 그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은 단순한 취미나 대화의 시간을 넘어선다. 두 사람은 예술을 통해 서로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함께 나눈다.

그렇다면 ‘서리꽃’이라는 제목은 이 사랑의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미지가 된다. 서리꽃은 추운 밤에 피어나 햇살이 닿으면 사라진다. 아름다움과 소멸이 한순간에 겹쳐 있는 꽃이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사랑은 삶의 가장 따뜻한 순간으로 찾아온 사랑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시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랑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모든 존재가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품고 있지만, 그 사실이 현재의 가치를 덜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라질 것을 아는 순간 지금이라는 시간이 선명해진다. 소인이 자신의 사랑을 서리꽃에 비유한 것도 그 사랑의 짧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짧은 사랑은 짧은 생과 닮아 있고, 그래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더욱 농밀해진다. 사랑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시간이 행복했다는 기억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이 보이는 시간이었기에 두 사람에게 주어진 순간 하나하나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면 서리꽃의 이미지는 또 다른 형상으로 변한다. 처음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시와 그림이었고, 마지막에 남겨진 것은 하늘을 가르는 두 마리의 학이다. 조정래는 사랑의 시간을 하나의 이미지로 봉인한다. 인간의 생은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넨 시간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세계까지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 바라본 그림과 시, 나누었던 대화,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건넨 말과 손길은 한 사람의 생이 끝난 뒤에도 기억 속에서 다른 형태로 남을 수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시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남긴 흔적으로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의 학은 사랑의 결말을 설명하는 상징이면서, 사라짐 이후에도 남아 있는 관계의 형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처럼 읽힌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도 결국 그런 것일 테다. 사라지는 사람의 삶에서 한 장면을 건져 올려 오래 바라볼 수 있는 형태로 남겨두는 것.

평생 거대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바라본 조정래가 마지막 장편에서 붙잡은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시대의 거대한 사건도, 사회를 움직이는 구조도 결국 한 사람의 삶 위에서 경험된다. 거대한 시대의 문제에 비하면 너무 작아 보이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사랑하고 돌보고, 서로의 삶과 예술을 지켜보며, 주어진 시간만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한 사람의 선택과 감정, 누군가를 향한 책임과 애정이 모여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간다.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오래 써온 조정래 문학의 시선이 마침내 가장 작은 단위의 삶에 도착한 작품.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사회와 역사의 문제도 결국 그 안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서리꽃』은 그 작고 사적인 삶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거대한 시대의 기록을 지나 한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며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으로 이동한다.

밤의 추위 속에서 피어난 꽃은 햇살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그 짧은 개화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서리꽃이 아름다운 것은 오래 피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라질 운명 속에서도 한 번은 꽃의 형태를 이루기 때문이다. 조정래가 그려낸 사랑 역시 그러하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피어난 한 사람의 사랑이 다른 한 사람의 삶에 하나의 세계를 남기는 것. 사랑의 시간은 언젠가 끝나지만, 그 시간 동안 서로에게 건넨 마음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을 약속할 때보다 오히려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서리꽃』이 보여주는 사랑도 바로 그 유한함 속에서 가장 뜨겁게 빛난다. 짧았기에 덜 중요한 사랑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삶의 많은 것을 담아낸 사랑이다. 조정래 문학의 마지막 장편이 향한 곳은 결국 그토록 작고 뜨거운 인간의 시간이다.

✏️도서출판 해냄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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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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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믿는 일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아무도 믿지 않는 곳에서 혼자 믿음을 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일까, 진심일까, 혹은 그것을 믿고 살아낸 시간일까. 구소현의 『환호성』은 이 불안정한 믿음의 지형 위에 세워진 소설집이다.

『환호성』에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유령과 최면, 사이비 종교와 폐쇄된 방,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 같은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소설집에서 비현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작동 원리를 과장해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 삶의 시간을 건너뛰게 하는 최면, 이미 무너진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종말은 모두 지금의 현실이 품고 있는 어떤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만큼 쉽게 잊히고 버려지는 세계. 현실이 충분히 기묘하기에 소설은 현실보다 더 기묘한 장치를 빌려 현실을 보여준다.

그 세계에서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사적인 질서가 된다. 믿을 만한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든다. 한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방 한 칸일 수도 있으며, 종교나 신념처럼 거대한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 바깥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내부에 확실성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구소현의 인물들에게 이러한 확실성은 자주 고립의 형태를 취한다. 외부의 판단과 규범에서 자신을 떼어내고 자기만의 감각과 논리를 보존하려는 행위. 그래서 고립은 자기보존의 기술인 동시에 자기폐쇄의 기술이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리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장소가 되지만, 바깥을 차단한 세계는 타인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지워버릴 가능성까지 품는다. 고립이 깊어질수록 세계는 작아지고, 세계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강해진다.

여기서 『환호성』의 ‘진짜’와 ‘가짜’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가짜인 것을 진심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은 사실 여부를 보증하지 않으며, 행위의 정당성도 보증하지 않는다. 사랑이 진심이라는 사실과 그 사랑이 타인에게 가한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만든 세계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 세계의 진실성만으로 행위까지 정당해질 수는 없다. 이때 믿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윤리의 문제로 이동한다. 사적인 확신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로 남을 수 있는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세계가 타인을 배제하기 시작할 때, 그 세계를 여전히 존엄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품은 이 순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이라는 익숙한 분류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며, 비정상으로 분류된 감각이라고 해서 모두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타인의 삶과 맞닿아 있고, 바로 그 접점에서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책임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닿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면을 통해 연결되는 세계에서 타인의 존재는 정보와 이미지의 형태로 가벼워진다. 손가락으로 넘길 수 있는 관계와 저장할 수 있는 기억,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이미지 속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무게를 경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몸과 몸이 부딪히고, 목소리를 듣고,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춰 무언가를 읽는 순간에는 추상화된 타인이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집에서 감각은 단순한 분위기의 장치가 아니다. 정보와 이미지로 납작해진 세계에 맞서 타인의 실재를 복원하는 방식이다. 믿음이 내면에 세계를 만드는 힘이라면, 닿음은 그 세계 바깥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돌려놓는 감각이다.

표제작에서 파도 소리는 박수 소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누군가가 보내는 환호는 없는데도, 바깥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박수로 번역할 수 있다. 파도는 계속 밀려오고, 우리는 그 소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 박수라고 믿을 수도 있고, 경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아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도가 정말 박수였는지를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보내는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그 의미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이다. 누군가의 환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을 환호로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잠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 믿음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착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환호성』에서 믿음은 진실의 반대편에 놓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은 진실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믿음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믿음이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 누가 들어오며, 그 바깥에서 누가 밀려나는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한 믿음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그것을 의심하고 수정할 능력은 약해질 수 있다. 『환호성』의 인물들은 독자가 쉽게 편을 고를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지나치게 일관된 인물들의 태도는 때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밀어내는 폭력이 된다.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지는 간편한 해답 역시 이 경계 위에서는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하는 믿음과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믿음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보다 어려운 것은, 믿고 있는 자신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를 견디는 일이다. 『환호성』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멈춘다.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 믿음과, 믿음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인간 사이. 그 사이에서 울리는 환호성은 세계가 인간에게 보내는 축하가 아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박수,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의 소리를 자기 안으로 번역해낸 소리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때로는 자신을 살게 하고, 때로는 타인을 다치게 하며, 때로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잡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의미 없는 파도 앞에서 계속 의미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환호성』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불온하고 필사적인 믿음의 형식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믿어야 하지만, 그 믿음이 만든 세계까지도 의심해야 하는 인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박수라고 번역하면서도, 그 박수가 정말 자신을 향한 것인지 끝까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이 책의 환호성은 그런 인간이 세계를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보내는 가장 위태로운 생의 신호일 것이다.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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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ㅣ 현대지성 클래식 78
샬럿 브론테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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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에는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 삶의 반경부터 정해졌다.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그 좁은 반경 안에 한 여자의 목소리를 세워놓는다. 고아라는 출신도, 가난도, 평범한 외모도, 가정교사라는 신분도 제인의 존재를 대신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제인이 끈질기게 지켜내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닌 자기 삶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다.

19세기 영국의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한 미덕은 순종과 정숙, 가정에 대한 헌신이었다. 교육받은 여성이라고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고,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 동시에 생존의 안전망이었다. 그런 시대에 제인이 가정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녀는 교육받았지만 상류층의 일원이 아니며, 노동하지만 하인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주인의 집에서 일하면서도 그 집의 가족은 될 수 없는 사람. 손필드의 제인은 정확히 그 어중간한 문턱에 서 있다. 이 위치는 제인의 불안정한 삶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만든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제인은 자신을 둘러싼 계급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로체스터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그의 재산이나 지위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위치에 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제인은 자신의 영혼까지 그 차이에 맞춰 작게 만들지는 않는다. 제인의 자존심은 허영과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가 사회적 서열로 환산될 수 없다는 감각이다.

그래서 제인은 유난히 자주 ‘아니오’라고 말한다. 게이츠헤드의 부당함에도, 로우드의 위선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에도, 종교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결혼에도. 제인의 거절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타인이 정해준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방향이다. 이 거절들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것. 제인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새로운 것을 얻는 순간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순간들에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가장 원하는 것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자유는 비로소 추상적인 단어에서 삶의 태도로 바뀐다.

로체스터와의 사랑은 이 자아의 문제를 가장 뜨겁게 드러낸다. 그는 제인의 내면을 알아보는 사람이고, 제인은 그에게 깊이 끌린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의 불평등 역시 선명해진다. 저택의 주인과 가정교사, 남성과 여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랑은 이 차이를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지만 없애주지는 않는다. 제인은 그 사실을 감정의 열기에 묻어버리지 않는다. 로체스터의 제안을 거절하고 손필드를 떠나는 제인의 선택은 그래서 ‘사랑보다 자존심을 택한 장면’으로만 읽기 어렵다. 제인은 그를 사랑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떠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거나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 관계는 쉽게 지배와 종속으로 변한다. 제인이 지키려는 것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 사랑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자기 자신의 자리다. 제인은 누군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소설에서 사랑이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인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로체스터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이 되지도 않고, 세인트 존이 요구하는 신앙적 사명에 자신을 바치지도 않는다. 두 남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인을 자기 삶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지만, 제인은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사랑과 의무의 방향은 달라도 그 끝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인 에어』의 결혼은 당시의 여성 서사와 묘한 긴장을 만든다. 제인은 결국 결혼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자유는 결국 결혼이라는 익숙한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우회로였을까. 그렇게 읽기에는 결말에 이르는 제인의 조건이 지나치게 치밀하게 달라져 있다.

제인의 삶에서 돈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무리 단단해도 생계를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선택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제인은 가정교사로 노동하고, 유산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얻는다. 이것은 단순한 서사의 보상이 아니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고, 경제적 의존은 곧 선택의 범위를 좁히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삶, 동시에 누구도 자신의 삶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 삶. 제인에게 돈은 사치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물질적 형태다. 제인은 결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이 되는 대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이 된다. 의존해야 해서 사랑하는 것과, 의존하지 않아도 사랑하기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계다.

그래서 펀딘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관계의 무게중심이 달라진다. 한때 손필드의 모든 것을 소유했던 로체스터는 화재 이후 이전과 같은 남자가 아니다. 제인 역시 더 이상 그의 저택에 고용된 가정교사가 아니다. 재산과 노동, 판단을 자신의 것으로 가진 제인은 이제 그의 곁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여성의 독립이 결혼으로 회수되는 장면이라기보다, 독립을 획득한 여성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장면으로 읽을 때 훨씬 선명해진다. 사랑이 제인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게 된 제인이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제인 에어』를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완전히 포개어 읽을 수는 없다. 이 작품에는 분명한 시대의 그림자가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 버사 메이슨이 있다. 손필드의 다락방에 갇힌 버사는 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제인의 서사가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타인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버사의 자메이카 출신 배경과 식민주의적 맥락을 함께 놓으면 이야기는 단순한 여성 해방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제인이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시대의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그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자립을 꿈꾸면서도 결국 결혼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한 여성의 내면적 자유를 그려내면서도 또 다른 여성에게는 침묵과 격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작품의 가치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한계를 품은 채 그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는 작품이기에 『제인 에어』는 오래된 고전의 자리에서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

결국 제인의 독립을 가능케 한 것은 성격의 강인함 하나만이 아니다. 자존심, 노동, 경제적 자립, 도덕적 판단, 사랑에 대한 욕망이 서로 얽혀 하나의 삶을 만든다. 정신만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도,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냉정한 계산도 이 소설에는 없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면 내면의 의지와 그것을 지탱할 현실의 조건이 함께 필요하다. 제인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고, 사회적 권력도 없으며, 아름다운 외모조차 자신의 무기로 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영혼만큼은 흥정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좁은 세계에서 한 여성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급진적인 재산은 어쩌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일.

제인의 내면에서 울리던 작은 북소리는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목소리가 된다.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목소리, 사랑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목소리, 혼자가 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목소리. 그 소리를 따라간 끝에서 제인은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사랑이 그녀의 삶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사랑조차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인 에어』가 오래된 고전 가운데서도 유난히 생생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제인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삶의 문장을 직접 쓰는 여자의 이야기니까. 사랑은 그 문장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온 사람이 스스로 골라 적은 한 문장일 뿐이다.

✏️도서출판 현대지성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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