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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
구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평점 :
무언가를 믿는 일은 생각보다 위태롭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아무도 믿지 않는 곳에서 혼자 믿음을 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일까, 진심일까, 혹은 그것을 믿고 살아낸 시간일까. 구소현의 『환호성』은 이 불안정한 믿음의 지형 위에 세워진 소설집이다.
『환호성』에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유령과 최면, 사이비 종교와 폐쇄된 방,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 같은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등장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소설집에서 비현실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작동 원리를 과장해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 삶의 시간을 건너뛰게 하는 최면, 이미 무너진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종말은 모두 지금의 현실이 품고 있는 어떤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만큼 쉽게 잊히고 버려지는 세계. 현실이 충분히 기묘하기에 소설은 현실보다 더 기묘한 장치를 빌려 현실을 보여준다.
그 세계에서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사적인 질서가 된다. 믿을 만한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든다. 한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방 한 칸일 수도 있으며, 종교나 신념처럼 거대한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 바깥의 불확실성을 견디기 위해 내부에 확실성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구소현의 인물들에게 이러한 확실성은 자주 고립의 형태를 취한다. 외부의 판단과 규범에서 자신을 떼어내고 자기만의 감각과 논리를 보존하려는 행위. 그래서 고립은 자기보존의 기술인 동시에 자기폐쇄의 기술이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리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장소가 되지만, 바깥을 차단한 세계는 타인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지워버릴 가능성까지 품는다. 고립이 깊어질수록 세계는 작아지고, 세계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서 통용되는 믿음은 강해진다.
여기서 『환호성』의 ‘진짜’와 ‘가짜’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을 수 있고, 가짜인 것을 진심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은 사실 여부를 보증하지 않으며, 행위의 정당성도 보증하지 않는다. 사랑이 진심이라는 사실과 그 사랑이 타인에게 가한 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만든 세계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 세계의 진실성만으로 행위까지 정당해질 수는 없다. 이때 믿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윤리의 문제로 이동한다. 사적인 확신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로 남을 수 있는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세계가 타인을 배제하기 시작할 때, 그 세계를 여전히 존엄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작품은 이 순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이라는 익숙한 분류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며, 비정상으로 분류된 감각이라고 해서 모두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타인의 삶과 맞닿아 있고, 바로 그 접점에서 진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책임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닿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면을 통해 연결되는 세계에서 타인의 존재는 정보와 이미지의 형태로 가벼워진다. 손가락으로 넘길 수 있는 관계와 저장할 수 있는 기억,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이미지 속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무게를 경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몸과 몸이 부딪히고, 목소리를 듣고,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춰 무언가를 읽는 순간에는 추상화된 타인이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집에서 감각은 단순한 분위기의 장치가 아니다. 정보와 이미지로 납작해진 세계에 맞서 타인의 실재를 복원하는 방식이다. 믿음이 내면에 세계를 만드는 힘이라면, 닿음은 그 세계 바깥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돌려놓는 감각이다.
표제작에서 파도 소리는 박수 소리처럼 들린다. 실제로 누군가가 보내는 환호는 없는데도, 바깥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박수로 번역할 수 있다. 파도는 계속 밀려오고, 우리는 그 소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 박수라고 믿을 수도 있고, 경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아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도가 정말 박수였는지를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보내는 신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그 의미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이다. 누군가의 환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을 환호로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잠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 믿음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착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환호성』에서 믿음은 진실의 반대편에 놓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은 진실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믿음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강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믿음이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 누가 들어오며, 그 바깥에서 누가 밀려나는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한 믿음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그것을 의심하고 수정할 능력은 약해질 수 있다. 『환호성』의 인물들은 독자가 쉽게 편을 고를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지나치게 일관된 인물들의 태도는 때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밀어내는 폭력이 된다.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지는 간편한 해답 역시 이 경계 위에서는 힘을 잃는다.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하는 믿음과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믿음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보다 어려운 것은, 믿고 있는 자신을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는가를 견디는 일이다. 『환호성』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멈춘다.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 믿음과, 믿음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인간 사이. 그 사이에서 울리는 환호성은 세계가 인간에게 보내는 축하가 아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박수,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의 소리를 자기 안으로 번역해낸 소리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때로는 자신을 살게 하고, 때로는 타인을 다치게 하며, 때로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잡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의미 없는 파도 앞에서 계속 의미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환호성』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불온하고 필사적인 믿음의 형식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믿어야 하지만, 그 믿음이 만든 세계까지도 의심해야 하는 인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박수라고 번역하면서도, 그 박수가 정말 자신을 향한 것인지 끝까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이 책의 환호성은 그런 인간이 세계를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보내는 가장 위태로운 생의 신호일 것이다.
✏️도서출판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