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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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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일대기로,  김만수로 불리웠던 한 남자가 지나온 오십 몇년간의 삶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당연히 김만수일 것인데, 회고의 형식을 띠고있는 이 남자의 일대기에서 단 한번도 김만수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다는 것이 몹시 흥미롭다.
김만수의 조부로 부터 시작되는 회고는 김만수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 동생들을 지나 같은 반 친구, 동창, 동기, 동료, 동네사람, 아내, 그리고 김만수의 수양아들인 조카에로까지 이어지만, 그중 단 한번도 김만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회고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김만수의 이야기이되,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느껴진 김만수의 일대기가 되겠다.
 
'나는...' 으로 시작되는 매번의 회고마다, 이번에는 '김만수인가..?' 하고 궁금했던 나는 이 책에서는 결코 김만수가 그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보여지는 김만수가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김만수, 즉 김만수라고 불리웠던 사내가 아닌 김만수도 뭣도 아닌 그저 한 사람, 한 영혼 그 자체로서의 생각과 고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에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며, 보여지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는 참으로 크더라는 것이 내 경험이니까.
어쨌든 주변사람들의 회고에서 보여지는 김만수는 절대 투명인간일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항상 주변사람들을 돌보았고, 언제나 항상 자기를 희생했으며, 주변사람을 돌보기 위한 자기희생에 최선까지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마치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온 사명인냥 행동하는 김만수라니,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아마도 그는 자기희생을 위해 창조된 인물인듯 보여졌다. 이렇듯 완벽한 이타주의자라니, 그런사람은 절대 투명인간일 수 없지않나? 모두가 필요로하는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성석제의 이번 이야기는 '소외'에 관한 것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봤을 때, 나름 추측하기로 소설 <투명인간>은 있거나 없거나 매한가지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거나, 물질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오히려 물질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만수의 삶은 좀 달랐다. 그는 무엇을 하던 표가 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매사에 성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부류였기 때문에 어디서나 빼어났고 인정받는 이시대가 원하는, 혹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주변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대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열심히 살았지만 남는게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최선을 다했지만 승자는 되지 못했을 뿐이며, 자기희생을 기꺼워했지만 결국 이용만 당했을 뿐이다. 이건 내가 생각한 투명인간의 정의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착하지만 능력없고, 인간답지만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의 비물질적인 혹은 빈(貧)물질적인 인간상이었는데, 김만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노력했고, 때로는 노력만큼 물질적 보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자신을 위해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소외당했다고 해야 할까. 김만수라는 이름 속에 묶인 소외된 한 영혼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나로서는 이렇게 이해하는 편이 더 쉬웠다.
 
김만수의 일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격동의 시간이였다. 덕분에 오십년 남짓한 시간동안의 대한민국 변천사를 속성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는데, 그 오십년이  참 길기도 하다. 물론 요즘의 속도라면 50년이면 강산이 대여섯번은 족히 바뀌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찬라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지만, 우여곡절의 생을 살아온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자면 소설도 그냥 소설이 아닌 대하소설감이라며 한많은 생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김만수의 생이야 말로 정말 그렇다(그렇지만 보여지는 김만수는 한탄도 하지않는 인물이다). 또한 언제나 변한 것은 주변이었을뿐, 김만수는 늘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충실한 자기희생이라니. 
나는 사실 김만수의 삶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택하기 보다 언제나 주변을 위한 자기희생의 패를 택하는 김만수의 한결같은 뚝심이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차라리 한심하기까지 했다.
 
인생은 선택이다. 점심으로 천원짜리 국수를 먹을까 삼천원짜리 국밥을 먹을까 하는 몹시 사사로운 선택부터 연탄가스에 중독된 두 누나 중 산소탱크에 먼저 넣을 누나를 고민해야 하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혹은 평생이 한방에 결정되는 중차대한 선택까지.
김만수가 가족을 위한 자기 희생보다 자신의 안위를 택했더라면, 태석이 한맺힌 죽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를 택했더라면.
무엇보다 애처로운 것은 태석의 죽음이었다. 한때는 소름끼치도록 영악하게만 보였던 어린 태석이 죽음으로 자신의 짧은 생에 대한 외로움과 고통을 항변한 것 같아 그를 미워한 독자로서 죄책감 마저 들었다. 태석이 자신을 키워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던 장면에서는 가슴이 찡하다 못해 코 끝까지 달아오르고,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져와 결국에는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했다.
 
끝으로 나는 내 신장, 나의 몸 전체를 나를 키워준 여자한테 돌려준다.-346쪽
운명이 있고, 인연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싶다. 사랑의 작대기를 긋듯 인연은 미리미리 짝지워져 있고, 살아가면서 미리 짝지워진 인연들이 씨실 날실처럼 엮이고 엮여서 만들어내는 것이 운명 아니겠는가. 이런 장면들 때문에 성석제는 우리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겠지.
그러나 김만수가 거쳐온 유년기에 대한 공통의 기억도 없고, 자기희생을 통한 가족사랑, 분에 넘치는 주변 사랑에도 공감하기 힘들고 이래저래 나로서는 감동이 쉽지않은 소설이었지만 꼭꼭 되씹고 싶은 한 문장은 김만수의 조부가 한많은 생을 떠나가면서 남긴 말로, 
자, 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 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내 묘비명에 적고 싶도록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자살공화국. 세계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른 시간안에 고도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이 그 반동으로 얻은 자살공화국이라는 불명예는 개발중심과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최후의 아우성이며, 몸부림의 결과이다. 죽기보다는 사는 것이 쉽다는데 차라리 죽음이라니. 
그 속에서 자꾸만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나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온갖것들로 나를 치장해야 만 하는 것이다(책의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라이더처럼. 그는 아마도 오래전 사라진 만수의 동생 석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데올로기나 투쟁, 쟁취 따위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데 무슨 소용일까. 밥벌이에 쫓기고 가족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삶을 엮어가는데 그것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한 개인의 이야기는 한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고, 한 세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즉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되, 한 가족의 이야기이며, 한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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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8-17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자,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이 리뷰가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지도 모를 귀중한 문장을 덕분에 챙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실례 무릅쓰고 다른 목소리를 내보면 우리가 '이데올로기-투쟁-쟁취' 운운하는 우리네 80년대 풍경, 서양의 러시아혁명 1919년부터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역사를 볼 때 결과적으로 실패했고(소련이 망했고),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부조리하게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희생됐으며, 이데올로기나 투쟁의 담론/언어가 인간의 삶을 도구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 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이 처음 한 사상가와 그 사상이 실현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혁명이 다 끝난 사회에서 살면서 교육받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측면만 보게 되는데 누군가에게 이데올로기, 투쟁, 쟁취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댓글 남겨보았습니다. 만수나 투명인간에 나온 인물들의 경우에도 그런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에 글에서 취하신 입장에 고개 끄덕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 나눠보고자 적어봤습니다 ㅎㅎ

비의딸 2014-08-19 17:07   좋아요 0 | URL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읽었어요. 여기에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고 자기의 온 생을 다 받친 남자의 이야기가 나와요. 모든 걸 다 걸고, 모든걸 다 받쳤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정한 애인, 따뜻한 가정을 그리죠. 투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걸림돌일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는 최후에는 이쪽 저쪽 모두에서 버림받고 짓밟히죠.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이데올로기를 택했는데, 소련이 망했듯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의 인생이 망해버린 것이죠.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이들이 있기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이정도 진보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한번뿐인 개인의 삶에 집중할 때, 희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작은 나로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겠어요.. 왜냐면 나는 이기적인 혹은 이기적이고픈 사람이니까요.. ^^

rendevous 2014-08-20 21:24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데올로기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문재 시인의 근작 '지금 여기가 맨앞'에서 어떤 구절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 하는 사람이다.' 이데올로기의 그늘은 개인의 실존적 선택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이렇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에겐 큰 상처/폭력이 되겠지만) '대의'라는 이름으로 희생하게끔 떠미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희생의 주체로 호명한 사람들은 희생을 선택할 수도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특히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래서 좋은 문학작품들이 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져 사라져간 개인의 사소한 일상의 숨결과 꿈(다정한 애인, 따듯한 가정) 같은 것을 오롯이 불러내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 저도 이런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복잡한 현상을 조금 단면적으로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댓글은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란 도구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 한 그 마음을 옹호, 아니 그 이전에 '호명'해보고 싶어서 썼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폭력성에 가려져 우리가 보지 못한 그 이면의 인간성/사랑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의딸 2014-08-21 14:50   좋아요 0 | URL
윤스리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세상을 바꿔보려한 그 마음에 대한 옹호와 그것에 가려진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겠지요. 그렇기에 그것은 선동이 아닌 예술이어야 할테고요. 윤스리님 덕분에 문학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됩니다. ^^

rendevous 2014-08-21 18:26   좋아요 0 | URL
제가 좀 투박하게 약간은 논쟁적 대화를 시도했는데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은 기간 동안 잘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