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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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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겨레21>의 기자들은 무계급 시대인 현 시대, 현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는 '불안정 노동', 즉 '비정규직 노동'의 현장에 직접 취업하고, 불안정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입으며 월급을 받을때까지의 체험기사를 책으로 묶었다.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은 점심식사 후에도 4,200원 짜리 카푸치노를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시대에 4천원 대의 최저 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불안정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네 명의 기자들은 각각 가구 공장의 공원, 감자탕 집 종업원, 마트 종업원, 공장 노동자의 삶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의 "너무 절망스럽다. 왜 대안과 해법은 말하지 않는거지?" 라는 의문을 갖었고,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은 "식당 아줌마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불안정 노동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그 시선이 연대의 출발점이 되게 하자"는 것 이었다.  선정적인 제목의 이 책을 읽고 당시 나는, 문제만 잔뜩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시선을 충분히 끌어 발행부수를 높이기 위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론 플레이 라고 생각했다, 라고 적었다. 아마도 기자들이 대안이라고 내놓은  '불안정 노동자에게 친절하기' 따위가 너무 어처구니 없게 들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3년 우리나라 시급기준 법정최저임금은 4,860원 이다.

 

<노동의 배신>은 <4천원 인생>이 출판되기 적어도 9년 전인 2000년 초반, 호황기의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닷컴과 주식, 주택 등으로 신흥부자가 마구 출몰하던 그 시기에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며 사회 밑바닥을 훑었던 비숙련 노동자들은 존재했고, 저널리스트이며 사회운동가인 바바라는 바로 이런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비숙련 노동자인 그들이 받는 임금만으로 실제 생활이 가능할까?'

바버라가 실제로 노동자가 되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에 걸맞는 생활을 체험한 것인데, 어떻게 말해도 이것은 '빈곤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고백한다. '빈곤은 공포와 너무나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2010년 국회의원 차명진은 '최저생계비로 하루나기 체험'을 다녀오고 '6,300원으로 황제의 삶을 살 수 있었다'라는 체험기를 남긴 후, 많은 사람들로 부터 '무개념이란 이런 것'이란 비판을 들었다.  2012 현재 대선 행보 중인 박근혜는 최저임금의 정확한 금액을 아는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5,000원 조금 넘지 않나요.?" 라며 그녀 특유의 공주다운 머뭇거림을 담은 답을 내놓았다.

바버라는 책에서 빈민들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라고 했다. 텔레비전이나 기타 매체를 통해 빈민들은 부자들의 생활을 쉽게 볼 수 있지만 부자들은 빈민들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공공장소에서 마주친다 해도 그들이 가난하다는 걸 눈치채기 쉽지 않다라고 적었다.  가난을 죄악시하고, 부자들을 끊임없이 우상화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므로, 그 누구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표내지 않기 때문이며, 부자들과 빈민들이 같은 공간에 있거나 공유하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가 표를 내지 않기 때문에 혹은 국회의원 차명진이나, 박근혜 의원이 가난한 이들과 공유하는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따위의 황제스럽거나 공주다운 답을 내놓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나라의 위정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가난이라는 현실'이 강건너 불구경이 되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는 나라 사람들을 보듯이 빈곤한 이들을 본다. 아니 그들은 빈곤이 '현실'일 수 있다는 것 조차 피부로 체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빈곤한 이들은 그들(차명진이나 박근혜 같은 상위 1%들)이 자신들을 '가난'에서 건져줄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철썩 같이 믿는다.

바버라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활이나 저임금을 체념하는 모습에서 답답함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라고 적고 있다.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시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살며,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뜨리고, 주가를 올리는 역할을 '워킹 푸어'들이 맡음으로써 사회에 희생하고 기부하지 않는다면 중상류층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바바라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주고 주고 또 주는 저임금 노동자의 희생 위에 올라선 이들은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일도 거의 없을 뿐더러, 워킹 푸어들이 가난한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비하를 일삼기 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의 끊이지 않는 고통의 근원이며, 실체이다.

어쩌면 바바라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으로 들릴 수도 있다. 나 역시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성장했고, 누구누구의 '성공기' 따위는 주변에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그러니까,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상황에서 남들보다 더 게으른 그들 자신의 탓으로 여기기는 너무도 쉽다.

그러나 출발선이 같다고 해서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며, 상황이 같다라고 치더라도 주어진 것들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 많이 들켜버려서 이제는 그 누구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따위의 속담은 되새기지 않는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면 가난은 되물림될 수 밖에 없고, 가난이 되물림 되듯이 '부' 역시 돌고 돈다. 농담처럼 화자되지만,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4천원 인생>에서 기자들이 내 놓은 대안에 실소했던 나는 바바라의 글을 읽으며, 그녀가 내놓을 대안이 궁금했다. 그녀 역시 어떤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체험기를 쓰고, 판매 부수나 노리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른 것이 없으리란 결론을 미리부터 생각하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가끔은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최소한 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와 감사를 병행하기도 했다.

그런것이다. 이런 책을 읽으며 나같은 사람이 얻는 것은 적어도 '나는 아니다'라는 위안, 또는 저임금 노동자에게 안도를 감춘 인위적인 웃음을 날리는 센스, 인지도 모르겠다고 작위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대안은 있다. <4천원 인생>의 기자들이 보여준 대안은 결코 실소로 묻혀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는 것, 작은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이 조금더 많은 임금과 인간적인 대우를 성취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 공공복지 정책에 대해 지지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혼자만 잘먹고 잘 살 수 있다면 나머지 것들에 눈을 감는 짓을 당장 멈추는 것, 그것이 대안이다.

 

<4천원 인생>, <노동의 배신>을 대선 주자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그 밖에도 직접 투표를 해 대통령 및 위정자를 뽑는 많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한번 읽는 것은 나처럼 실소 혹은 체념으로 끝날 수 있지만, 비슷한 책을 반복해 읽는 것은 새로운 각성을 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부디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책들이 두루두루 읽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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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8-1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주스러운답ㅎㅎ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