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몰입도 90%

고등학교 1학년때 국사 선생님은 정사보다 야사에 강하셔서 곧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야사를 이야기해 주시곤 했다. 물론 그 야사라는 것이 野史가 아니라 夜事인 경우가 많았고, 선생님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그 야사의 대표적인 소재가 바로 신라 여왕들의 이야기였는데, 그 때만하더라도 선생님이 묘사하는 자유롭다 못해 문란한 성의식을 가진 신라인들의 모습이 믿기지는 않았었다.

'왕의남자'의 작가가 역사책에 나오는 한 문장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공길이와 그 일당들의 이야기를 엮어냈듯이, 작가는 삼국유사의 문장들에 숨겨진 인물들과 사건들의 디테일한 이미지들을 작가 자신의 말대로 다큐멘터리 찍듯 생생하게 되살려 낸다. 작가는 삼국유사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화랑세기가 그녀의 상상력에 많은 도움을 준 것 또한 확실해 보인다.

역사책에서 삼국의 시조와 왕들의 이름과 그 왕들이 한 업적-주로 전쟁으로 땅을 어디까지 넓히고 불교를 받아들이고, 왜구를 소탕하고 등등의 이들이었지만-을 외우기만 했지, 정작 신라 사람들, 백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신경을 안 쓴 게 사실이다.

작가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불교가 들어오기 전, 神과 性이 원시의 강렬한 에너지를 발휘하던 서라벌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들의 모습은 불교와 유교 혹은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으로 묘사되곤 하는 중국식 질서가 자리 잡기 전, 살아있는 서라벌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고대 신화에 나옴직한 성골의 거인들, 신국의 전통과 중국에서 건너 온 문화가 만나는 문명의 충돌, 연예인과 같은 화랑의 모습, 서태지의 카리스마를 가진 비보이 원효 등 역사책에서 묘사하던 신라와는 전혀 다른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것을 신과 대화하며 신의 목소리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에서 율법에 따라 다스리는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흐름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민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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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족을 믿지 말라 스펠만 가족 시리즈
리저 러츠 지음, 김이선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몰입도 75%

도청, 뒷조사, 미행, 협박… 엉뚱하고 수상한 불량가족의 이야기. 아빠의 취미는 가정 내 도청, 엄마는 딸 남자친구의 신원을 조사하는 게 취미다. 게다가 여동생은 가족을 미행하기까지 하는데... 프라이버시 제로, 예의범절 제로, 양보와 배려마저 제로인 가족들.                                         

소개글로만 보면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막상 읽다 보면 기대만큼 신선하거나 재미있지는 않다. 내심 '미스터앤미세스 스미스' 같은 대활극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했으나, 그런 점에서는 전혀 아니올시오 다. 다만 시트콤과 같은 독특한 설정의 가족 구성원들이 벌이는 소소한 활극들이 딱 그 정도의 즐거움을 준다.

일일연속극이나 주말극에 나오는 화목한 대가족의 모습이 현실에서는 사라져 가는 가족의 모습을 재연하면서 보는 이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한편-마치 전원일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다큐멘터리나 고발 프로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을, 아내를 그리고 아이들을 마음대로 하고, 상처주고 괴롭히는 모습을 소위 '가족' 시간대에 내보내고 있다. 우리나라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최근 우리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가족은 부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점과 비교해 보자면 스펠만 가족은 시트콤을 위해 '구성된' 가족이라는 혐의가 짙다.

사실 우리에게 가족이란 'Home sweet home'의 다정하고 낯간지러운 의미보다는 부대끼고 싸우고 성가셔 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주 앉아 TV를 보고 과일을 먹는 그런 게 아닐까. 오죽하면 부모자식간은 전생의 원수라는 말까지 나왔으랴.

스펠만 가족에게서는 이런 가족의 어두운 면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가족들의 직업이 사립 탐정이라는 것. 물론 큰 아들은 그걸 거부하고 변호사가 되긴 했지만, 남의 뒤를 캐는 직업이나 남의 구린 뒤를 봐주는 직업이나 거기서 거기. 결국 이 가족의 주된 거래처는 아들이 다니는 회사이며 막내의 수입원은 큰 오빠인 것. 가족들은 도청, 뒷조사, 미행, 협박 등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정을 나누지만(?), 막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용서되고 '세상이 무너져도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결말에 이르자면 이들의 그동안의 활극의 의미가 너무 싱거워 진다. 차라리 여름 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아래 층에서 들려오는 부부 싸움이 더 흥미진진하고 현실감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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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몰입도 99%

한동안 책꽂이에 꽂혀만 있고 선뜻 손에 잡지 못했는데, 일단 손에 들고 나니 왜 진작에 읽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만든 책. 온다 리쿠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접하진 못했었는데, 처음 접한 책으로는 선택을 잘 한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와는 또 전혀 다른, 기묘한 이야기를 만들어지는 이상한 세계를 창조한 엄청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묘하고, 이상하다는 것. 그녀가 창조하는 시공간은 왠지 어둡고 질척이며 비밀을 간직한 듯한 분위기 이며 그 안의 주인공들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묘하게 연결되어 이어지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이야기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까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책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그 책 속의 이야기까지 안과 밖이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얽혀있어 정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구렁에 빠져 버리게 만든다. 중첩된 이야기들이 또 하나 하나의 책으로 이어져 있으니, 앞으로 그녀가 만들어낸 원더랜드를 탐험하는 것은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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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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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말로리(George Leigh Mallory)가 에베레스트 산에 왜 오르려 하느냐는 물음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하지. 저자가 애팔레치아 트레일 종주에 나선 것도 어쩌면 '길이, 숲이 거기에 있으니까' 시작한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큰 맘 먹고 각종 장비와 동행을 구해 시작한 트레킹은 곳곳에서 만나는 난관과 철없는 친구와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심심지어 멀리서 나타난 곰 때문에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여행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친구는 걷는 즐거움과 자연과 함께 하는 유쾌함에 매료되고 마약처럼 자기를 부르는 숲에 끊임없이 불려가곤 한다. 비록 종주는 못했지만, 종주 그 이상의 의미를 안고 자연의, 숲에 부름에 흔쾌히 대답하고 달려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물론 그 반대로 문명의 고마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도 되었지만.

 저자는 단순히 산행의 즐거움이나 고생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애팔레치아 트레일과 그에 얽힌 역사와 사람들, 자기 자신, 친구, 곰, 사람들, 자연, 국립공원 관리공단, 산림국 등 모든 대상을 그의 유머와 비꼼의 대상으로 삼아, 큰 소리로 웃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미소를 지으며 따라 갈 수 있는 글을 썼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

 이 책에 어떻게 리뷰가 하나도 없을까 하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개정판이 나오면서 지난 버전에만 리뷰가 달려 있었던 것. 개정판에서는 약간의 오타와 어색한 문장들이 개선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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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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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꽤 오랜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두들 극찬을 아끼지 않던 서경식의 글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아니 읽은 지는 벌써 시간이 꽤 지났지만, 먹먹하고 답답한 마음이 부산하고 정신없이 바쁜 몸을 움직이게 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재일 조선인.
저자는 재일 조선인을 민족의 관점에서는 조선인이지만,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이고, 그들의 모어는 일본어지만 모국어는 조선어라는 꽤나 복잡하지만 디아스포라의 삶, 특히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실 관계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을 한다. 이들은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같은 모어를 지닌 소수 민족이지만, 본국에서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 모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이다. 그들 선조의 출신지(조국)은 조선반도- 그것도 분단되기 전의-이며, 재일조선인 2세, 3세가 태어난 장소(고국)은 일본, 그들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나라(모국)는 한국, 일본, 북한이다. 그들 중 일부는 '조선적'이라는 사실상의 무국적 상태이다.

 그런 그에게 여자가 마음에 들어 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며, 만약 결혼해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이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상대 여성이 이해 못하는 사실이 답답하면서도 사실은 그 자신도 그 복잡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노라고 털어 놓는다.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가, 세계를 여행하며 그와 비슷한 수많은 디아스포라들, 즉 경계에서 부유하며 끝없는 방랑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애와 예술을 살펴 본다.

 외적인 힘에 의해 마음대로 굴려지는 존재, 구르면서 흔적을 남기는 존재, 디아스포라적 삶을 암시하는 은유라고 읽는 문승근의 활자구를 보면서 그는 왜 그렇게 고뇌로 몸부림치던 인간이 이렇게 정돈된 표현을 하는가, 왜 좀 더 끈질기게 거친 몸짓으로 자기 고뇌를 분출하지 않는가 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 일반에 대해 안고 있는, 애착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식을 한다.

 영국 식민주의의 편의에 따라 아버지 세대에 인도를 떠나 아프리카로 이민했으나. 반세기가 지나 부친이 생활의 기반을 쌓은 아프리카 땅,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해,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선 차별과 인권탄압이 기다리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사정에 따라 대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배제당하면서 언제까지 농락당하는 삶. 이중의 디아스포라로서 자리나 빔지가 경험한 삶은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 분할과 식민지 쟁탈전 이후,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추방당하고, 추방당한 땅에서도 이방인이며 소수자로 살 수 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작품을 단지 '설명을 읽지 않으면 관객에게는 아름다운 열대 풍경으로만 보일 뿐'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는 일본 큐레이터를 보며 저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디아스포라인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디아스포라 예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한숨을 내쉰다.

 혀로 점자 책을 읽는 김하일, 소 혀를 물고 기어가며 선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데이비드 강의 모습은 유랑하는 디아스포라들의 고난의 여정에 다름 아닌 것.  

 프랑스어로 소위 불법 체류자를 가리켜 '상빠삐에'라고 한단다. '종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 종이와 스탬프가 없이는 마음대로 이동도 할 수 없는 사람들. 한 번 외국에 나가기도 힘들고, 들어오는 것도 힘들고, 언제나 그 다음 번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근대와 현대를 지나 탈현대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경계에 사는, 추방당한 자들, 디아스포라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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