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누구에게나 꿈에 그리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내게 로마는 그런 곳이다. 그곳과 관련된 수많은 책을 읽고 언제나 그곳에 가길 꿈꾸지만 막상 여행을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때도 선뜻 향하지 못하게 되는 곳. 쉽게 다녀오기엔 그 곳에서 해보고 가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늘 꿈에만 그리는 곳. 내가 좋아하는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 <로마의 휴일>과 같은 제목의 이 책을 봤을 때 실망스러운 내용이면 어쩌나 하는 기대감과 걱정을 함께 느끼며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런데 예상외로 무척 재미있었다. 고달픈 직장생활에 지치고 남자친구와 헤어져 우울한 선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자신이 입양보낸 딸의 양부모라는 사람에게서. 하지만 그녀는 딸을 낳은 적도, 아이를 입양보낸 적도 없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놀란 그녀는 사건의 경위를 밝히지만 편지에 동봉된 로마행 항공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로마로 향하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의 딸 아닌 딸 보니와 까칠한 매력남 천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여행을 좋아해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나에겐 여행지에서의 로맨스가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책 속의 주인공들에겐 항상 멋진 로맨스가 펼쳐지는건지...그래서 내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지만 말이다. 이 책엔 로맨스 말고도 입양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처녀가 미혼모로 돌변하는 상황도 이 책은 진지하지만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확실히 시나리오 작가가 쓴 책이라 그런지 유쾌한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서 나는 부탄이라는 나라를 처음 들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나라지만 갈 수 없을거라며 아쉬워하던 친구의 모습이 책 제목을 보자마자 떠올랐다.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행복지수로 국민을 통치하며 1년에 한정된 인원의 관광객만을 받는다는 나라. 체제비가 비싸 감히 갈 엄두를 낼 수 없는 나라라던 그곳이 어떤 곳일까 너무 궁금했다. 부탄에 여행을 갔다 그곳이 너무나 좋아 부탄에 아예 눌러 앉아 살며 그곳의 남자와 결혼까지 한 작가는 부탄을 너무나 사랑한다. 처음 부탄을 방문한 이후 돈이 생기면 부탄에 갔다는 그녀는 그 곳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부탄말을 배우려 애쓴다. 그리고 같은 학교 선생이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그들과 한 가족이 된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정말 부탄을 사랑하게 된 작가가 처음 그곳을 만났을 때부터 그곳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서둘러 바쁘게 살지 않아도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부부가 미국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서 겪는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미있다. 미국사람이 미국을 낯선 곳이라 느끼게 될만큼 부탄이라는 나라에 동화된 모습을 보며 나도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그리움이 생겼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정말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 아마도 쉽게 갈 수가 없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가끔 답답할 때 꺼내 읽으면 내 마음을 좀 더 느긋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혼 7년차인 나는 결혼하면서 남편에게 딱 한가지만 얘기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생기면 모든 걸 버리고 빈 몸으로 나가라' 가정이라는 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은 아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정말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차라리 혼자가 편한데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나 싶기도 하다. 서로가 소중히 지켜오던 가정이 한쪽의 일방적인 통보로 깨져버린다는 것은 양쪽에서 팽팽히 당기던 끈을 한쪽에서 놓아버리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받는 타격은 얼마나 강하게 당기고 있었느냐와 비례할 것이다. 결혼 15년차에 아이가 둘인 올가는 평범한 주부다. 남편의 반대로 하던 일도 그만두고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남편이 이별을 이야기하고 나가버린다.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라 별일 아닐거라 스스로 위로하지만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자신이 왜 버림 받아야 했는가로 인해 올가는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인해 삶은 더 피폐해지고 그녀 곁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웃집 남자와 의미 없는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다음날 눈을 뜨니 아이는 아프고, 키우던 개는 죽어가고, 집의 현관문은 고장이나 집안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올가는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가 생각났다. 위험한 관계가 빼앗긴 아들을 찾아오기 위한 투쟁이었다면 이 책은 절망에 빠졌던 여자가 그 수렁속에서 벗어나는데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내가 버림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하는 자책부터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를 비웃고 남편과 그의 새로운 애인의 편을 들 것이라는 피해의식과 원망, 그리고 그들을 향한 분노에서 현실을 인식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너무나 처절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가슴 아팠다. 사람이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든일일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상대방이 나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간다면 그걸 과연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이기에 나는 올가에게 100% 동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드는 가장 확고한 생각은 내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떤 순간에도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든 홀로설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야구에 관해 쓴 책이라 제목만 보고도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짧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의 첫번째 이야기인 <또다시, 헤엄쳐 돌아가라>의 첫 페이지를 읽고 혼자 큭큭대며 웃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2008 베이징 올림픽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는 출판사 편집자의 꼬임에 넘어가 베이징 올림픽 야구 관전기를 쓰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향한다. 올림픽 기간 내내 좋아하는 맥주와 중국음식으로 행복함을 느끼며 경기를 관전하지만 일본야구팀은 형편없는 경기를 치르고 이에 실망한 작가는 야구 대표팀에게 하는 말이 헤엄쳐서 돌아가라다. 우승 후 금메달을 딴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척 뿌듯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직점 경기를 관람하며 뉴욕에 대한 감상을 적은 <뉴욕 만세>, 일본 신생구단인 라쿠텐의 경기를 관전하며 프로야구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야구를 부탁해>, 나이를 먹은 아저씨가 후지 록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젊은이들과 함께 열정의 시간을 보내는 <아저씨, 록 페스티벌에 가다>, 남들이 다 줄서서 본다는 만국 박람회를 보고 쓴 <작열하는 만국 박람회 관람 행렬 르포>와 선뜻 나서지 못할 것 같은 중년층의 롤러코스터 체험기인 <세계 최고의 롤러코스터 '좋잖아요' 절규 체험기>, 우동에 혹해 떠난 사찰 순례 이야기인 <시코쿠 섬 88사찰 순례, 그리고 우동> 등의 이야기가 아주 유쾌하게 펼쳐진다. <공중그네> 속의 이라부 박사가 오쿠다 히데오 본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 책 속의 작가가 이라부 박사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인 듯 하다. 쉰이 넘은 나이에 편집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번번이 이곳저곳으로 떠나지만 그 곳에서 삶의 소중한 단편들을 발견하고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읽는 이들도 유쾌해지게 된다. 나 역시 그처럼 나이가 들어도 나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역사에 얼마나 관심이 적었는지, 얼마나 아는게 없었는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 책은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로 알려진 이준열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헤이그 특사에 관해서 배운 기억은 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상황이었는지까지는 잘 알지 못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우리의 아픈 과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36살이란 늦은 나이에 말단 관리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준은 최초의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소하며 법을 만나게 된다. 짧은 교육기간이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짧은 검사시보 경력을 마치고 일본으로 도피, 제대로 된 법을 공부 한 후 돌아와 48세에 평리원 검사가 된다. 검사로서의 사명감과 소신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이준은 친일파 이윤용과 이하영의 불법을 지적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되고 사람들과 언론에서는 칭송을 받았지만 권력실세였던 친일파들을 이기지 못하고 검사직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후 이준을 눈여겨보던 고종황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어 일본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헤이그로 향하게 된다. 그 곳에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으나 일본과 이권이 얽혀있던 여러 나라의 거절로 인해 좌절하게 되고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 이 책을 읽다보면 잘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갖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처자식을 버려두고 떠나는 일도 받아들인다. 그의 부인역시 남편의 뜻을 알기에 그를 적극 지지하며 한 마음이 되어준다. 이준은 헤이그로의 특사 파견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받아들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이다. 가끔 우리나라가 너무나 싫어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애국심이 생기는 건 내가 이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잘 알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 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