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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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보자보자 20살이 되던 해에 이사를 시작한 이후, 21살에 한번, 26살에 또 한번, 그다음부터 2년이 될 때마다 동생과 이사를 했다. 그때는 보증금도 부족해서 월세를 제법내면서 아둥바둥 살때라 미니투룸이라 불리는 방 하나에 작은 거실이 있는 곳에 살면서 방은 동생을 주고 나는 거실에서 살았었다.

그래서 나의 이십대에는 나의 방이란 없었다.
문을 닫으면 오롯이 내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문을 닫아야 방문 밖으로 남아있는 공간과 함께 나도 남겨져야 나의 공간이 생겼다. 물론 화장실이슈등으로 수없이 공간이 침범되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지역을 옮겨서 동생과 같이 살지않으면서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떠돌이 인생인 것은 똑같은데 그래도 내 것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으로 모듈쇼파도 사고 그 옆에 둘 커다란 스탠드도 해외직구로 하나 사고, 매트리스 받침이 수납장인 퀸사이즈 침대도 사고, 티비와 모니터를 겸하려 42인치 티비도 샀다. 그렇게 욕심을 내다보니 로망이었던 모션데스트는 사지 못했지만🤣 이사할때마다 큰짐이 없어서 박스에 짐을 다 때려넣고 용달을 불러 아저씨 한분과 내가 함께 낑낑거리며 짐을 옮기는 나름 간소한 이사를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이사를 하지 못한다 쇼파도, 침대도 생겼으니.
이제 다음이사부터는 돈 좀 쓰고 몸이 덜 힘든 이사를 하게 되려나 ㅎ 그렇게 내가 지금 조명 아래에서 #우리같은방 (#서윤후 #최다정 씀 #열린책들 출판)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이곳에 이사한지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간다.

작가의 첫번째, 두번째 책을 연달아 함께한 편집자가, 세번째 책에는 논문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공동저자로 쓴 <우리 같은 방>은 작가들이 살아오며 살았던, 또는 여행을 가서 지냈던 방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있다. 심지어 방안에 있는 의자나 장 따위의 가구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그래서 그런가 많은 물건들을 샀지만 옵션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냥 쓰던 것 말고 처음으로 열심히 서칭해서 마련한 의자가 참 애착이 가는데 이 책에도 첫 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더 반가웠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쓴 일기를 오랜만에 펼쳐보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문득 의자에 앉아 앞에 펼쳐진 방을 훑어본다.
이사할 때 가구배치를 고민하던 초기를 제외하고는 또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이렇게 가만히 방을 둘러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매일 청소도 하고 물건 정리도 잘 했었는데, 바닥도 여기저기 놓여있는 물건들이 아무도 없음에도 참 낯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다.
쇼파와 책상 사이의 공간에 이동가능하게 설치해둔 삼탠바이미와 선풍기가 놓여져있고, 쇼파와 책상 곁에는 테무에서 구매한 스마트 전구가 끼워져있는 크고 작은 스탠드들이, 쇼파옆에는 새로 마련한 4단짜리 책장이, 그 책장을 넘어 번져나 책상을 뒤덮은 책이, 이전 집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들고와 쓰지도 못하고 구석에 방치되어있는 이케아 안락의자.

베란다 확장을 한 집이라 아주 마음에 드는 큰 창, 그 앞에 놓여있는 용케 죽지않고 살아주는 기특한 아보카도와 커피나무까지. 나의 취향과 생활, 생각들이 너무나 숨김없이 방 하나에 빼곡히 담겨있다. 그래서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집이 좋던 나쁘던 항상 긴장되고 수줍은 마음이 드는가보다.

그런 방을 심지어 인생에서 거쳐온 방을 전부 고백하듯 꺼내놓은 작가, 심지어 서로의 방을 공유노트를 적듯 공유한 그 용기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방에 대해 보여주는 것을 넘어 들려주기까지 하는 것을 보니 엄청나게 특별한 사이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책을 쓴 그시점부터라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열때는 글을 공유한다는 것도, 내가 이 둘의 집에 거실로 들어가면 어색할 것 같아서 쭈뼛거렸는데, 책을 덮은 지금은 나도 이 두사람의 방을 공유받은 특별한 사람이 되었고, 보지는 않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방을 공유해서 당당하게 둘의 집에, 거실에, 방에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친근함을 형성하는 일인지를 더시한번 깨달았다. 그만큼 은밀하고 사적인 나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공간은. 그러고 보니 참으로 공간과 글은 닮은 것 같다.

그래서 글을 보이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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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자유 - 일의 미래, 그리고 기본 소득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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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이전 산업혁명으로도 인간의 삶은 이전과 비교 할 수 없을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AI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미 급격하게 변화하고있다.

그 중 가장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체감되는 것이, 인간이 하고있는 일의 상당부분이 AI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는 휴가를 떠날 필요도, 쉴 필요도, 밥을 먹을 필요도, 생산속도 저하도 신경쓰지않아도 되고, 경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돈, 즉 인건비를 낮추어주니 기업입장에서는 AI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산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생생하게 인식하고 알고있다. 하지만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라 배부른 소리로 인식해서 어쩔수없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자기합리화한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
먹고 살아야하니까.

독일의 유명철학자 #리하르트다비트프레히트 는 그의 저서 #모두를위한자유 (#열린책들 출판)에서 변화하는 AI시대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하나의 경제적 요소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도 인정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돈을 버는 수단의 노동이 아니라 자기의 꿈을 현실화하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덕업일치를 일컫는 말일까? 소득과, 의료보험과 같은 이른바 4대보험의 혜택을 받기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장시간의 근무시간과, 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두가 (돈벌이 기준)원하는 일을 하기위해 평생을 무한 경쟁사회에서 달려왔다.
열심히 평생을 달려와 하루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직장에 있으면서도 내가 하고픈 것, 적어도 재밌어 보인다 한번 해보고 싶다라는 일들은 마음속에 조용히 담아놓을뿐이다. 지금의 직장을 포기하고 그것에 도전하기에는 위험성이 크고, ‘돈이 되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면 해결책은 나온다.
프레히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다.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회 보조 지원금이 아니라 국가가 전반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 발전 사다리의 상위 단계로써의 개념이다.

무조건적 기본 소득을 통해 생계에 관련한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생업 노동이 아닌 자기 주도 적인 일 을 , 돈과 상관없이 자기가 진정 하고픈 것을 맘껏 추구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노동이 아니라 삶을 자기 생각대로 꾸밀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자유’를 얻게 되어 첨단사회에서 인간만의 가치와 존엄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일시적 보조금도 수많은 필요재원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보다 더 보편적인 상위단계의 그것은 어찌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만, 생업 노동에 대한 과세에서 수익 창출세와 돈의 흐름에 대한 초미니 세금으로 전환하면, 근로자뿐 아니라 고용주도 막대한 이득을 본다며 해결책 또한 제시한다.

물론 얼마나 경제학적으로 타당한가는 많은 연구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막연한 방향만이 아니라 나아가야할 방향까지 제시했다라는게 <모두를 위한 자유>의 값어치를 더 올려주었다.

AI가 똑똑해지면서 인간만이 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일들이 빠른속도로 대체되고 있다. 심지어 문학, 작곡등과 같은 예술분야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여주며 인간의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엄성마저 위협받으며 SF소설에서만의 이야기인줄 알았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현실가능한 미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렇지만 불안함이 싹트면 어쩌지 어쩌지만 반복할 뿐, 그 불안함에 잠식되어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그러한 해결책 하나를 보여주어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보고나니, 인간의 존엄성을 노동행위와 연관지으려 했다는게 우리의 현재 삶이 얼마나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점철되어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꼭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아니더라도 살기위한 발버둥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찾으려 노력만해도 충분히 기술발전에 실직을 걱정하는 암울한 삶에서 해방 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고와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을 수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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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집
정보라 지음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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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아이의 장례식은 옳지 못하다. 아이의 죽음은 부당하다. 아이는 죽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어른이 되어 살아야 한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오래 살아서 노인이 되어야 한다.

이 한 단락으로 #아이들의집 (#열림원 출판)을 쓴 #정보라 작가의 의도는 다 설명되는 것 같다.

<너의 유토피아>로 대한민국 SF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에서도 SF소설의 붐을 일으켰던 정보라 작가의 신작, <아이들의 집>은 역시나 SF적 요소가 담겨있다. 앨리스라는 이름이 있지만 깡통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로봇이 아이들의 양육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나라의 국가 양육시설 ‘아이들의 집’에서 아이들의 전반적인 케어를 담당한다. 사이비 집단의 침입에 박살이 났다가 약간은 삐걱거리는 상태로 수리되어 다시 아이들을 돌본다. “로-봇은 일-관성 있습-니다. 사람-만 변덕-입니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작가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데모꾼이라 자처하는 작가인지라 그의 작품에는 현 사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꼬집음이 있다.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함이 SF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디스토피아적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SF소설은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세상을 기반으로 상상하는데 더 좋은 세상은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집>은 유토피아적 요소가 담겨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의 불장난으로 부모도 준비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태어나 버림받거나(버림 받으면 주로 백인들의 나라로 입양된다) 방치, 폭력 등의 학대를 겪으며 법이 보장하는 친권의 강력함아래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처벌뿐인 현실을 아득히 넘어선 미래를 보여준다.

온 나라가 돌봄과 양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으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가족이 있는지조차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집도, 교육도 필요하다면 국가가 지원한다. 모든 국민들이 한달에 한번 돌봄 의무를 이행하며, 의무를 이행하는 국민들도 높은 확률로 양육시설 ’아이들의 집‘에서 성장해왔다(부모와 가족이 있음에도 아이를 맡길 수도 있고, 아이가 직접 찾아올 수도 있으며, 언제든 집으로 돌아가도 좋고, 머물러도 좋다) 우리의 사회에서의 보육원과는 사회적 위치도, 인식도 천지차이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 관심을 제공하는 것이 대기중 질소처럼 당연하고 팽배한 것으로 여기는, 모두가 육아앞에서 평등한 세상. 끔찍한 어른들이 작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책 속의 사회는 현실보다 더 이상적이다.

뉴스에서 양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주먹을 부르는 소식이 많이 들려오지만 아동학대의 80퍼센트가 친부모에 의해 자행된다는 것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아동학대 정황이 있다고 신고를 해도 아동학대를 자행한 친권자가 아니라고 하면 돌려보낼 수 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에도 너무나 큰 실망을 하였다. 친권이라는 권한이 그렇게 강하다면, 그에따른 책임이나 처벌도 그만큼 강력해야 하지않나.

아이들은 무엇 하나 스스로 선택된 것이 거의 없는 상태로 사회화된다. 그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첫번째 장소이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가정'이 세상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학대와 그에따른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 전부인 아이들은 그것이 학대인 것을 알까?

그런데 어떻게 아이들의 증언만이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법적 분쟁에서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것은 소의 제기로 인해 이득이 있는 자가 적극적으로 하게 되어있다. 그럼 학대에서 벗어나는 소에서는 아이에게 이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육아뿐만 아니라 현 사회가 직면한 것들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책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이 가루, 사각형, 색종이 등 사람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책을 덮고 글을 쓰고 나니, 문득 애기들 태명 지을 때 개똥이 같은 사람같지않은? 이름을 지어주지않나? 그 이유가 귀신들이 사람이라 알아채지 못하게, 그래서 해코치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출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알고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오래 살아서 노인이 되어야 한다.”라던 문장과 맞물리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유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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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까?
케일럽 에버렛 지음,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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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윤선생영어라고 아시는지😁 매일 아침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하며 영어교재를 공부했는지 체크받으며 우리말이 아닌 다른 언어를 처음으로 배웠더랬다. 나중에는 교재를 읽으며 녹음해야 하는 것이 공부가 아닌 숙제로 느껴져 그만두게 되었지만 영어에 대한 그리고 언어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게 된 평생의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제법 충족시켰다.
고등학교 때에는 이과는 일본어 독어 중에서 선택하게 했고 말이 선택이지 거의 일본어를 선택하는 것을 종용당했다.

(덕분에 일본어의 기본을 배우기도 했고 부모님 인증 외국어로 잠꼬대를 한 최초의, 어쩌면 마지막일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괜시리 독어를 배우는 몇몇의 소수들이 부러웠던 기억 때문인지 문과에게만 열렸던 독어수업이 부러웠었는지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스페인어 중국어 등 교양수업에서 고등학교 때 보다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서 매 학기 하나씩 무조건 초급수업을 신청해서 들었었다(전공자는 교양수업에서 배제시키는 멋진 시절이었기에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배울 수 있었다)

얕고 넓은? 언어 공부의 경험을 하고나서(대부분 다 까먹어서 효율성은 제외하고)좋았던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시선이 넓어졌다는 것은 이런나라가 있구나, 이 언어에는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나눠져있구나, 우리나라처럼 존댓말이 있구나 같은 것들을 배우며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넓어짐이었다.

하지만 #언어가세계를감각하는법 (#케일럽에버렛 지음 #위즈덤하우스 출판)을 읽고 나서 왜 시선이 넓어졌다고 느꼈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로, 이 순서대로 나열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언어도 존재하였고, 좌,우 같은 나를 기준으로 상대적방향감을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하지않고 동과 서 처럼 객관적 위치로만 표시하는 언어 등 다양한 전문적이고 표지의 디자인보다는 훨씬 학술적인 내용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필요성에 인한 것이 시작일테이고, 그 시작에 기여하는 것은 사람을 둘러싸고있는 환경이다. 그 환경을 다른사람과 공유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가 만들어지고 각자가 처해있는 환경(지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문화적 요소도)이 언어에 고스란히 녹여들 수 밖에 없다.

정글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와 북극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가 각자의 생존 환경에 최적화되어 발달했다는 이야기를 실제 그 문화와 인식을 가진 생활권에서 직접 저자가 함께 생활하며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지 그렇지 않고 그냥 카더라식으로 전해들었다면 분명 믿지않고 외면 했을 것이다.

괜시리 시베리아 반도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겪었던 끔찍한 실화를 고백한 책이 떠올랐다.

그녀는 곰에 물려 광대뼈와 턱관절의 대부분을 잃어 인공턱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으며 동물원 우리 안 동물처럼 구경당하는 것에 인류애를 상실하며 괴로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절반을 잃은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가 두려움과 마주하는 저자의 실화가 처절하게 담겨있다.

이 책이 생각났던 이유는 이 원주민들의 언어에 반은 인간, 반은 곰을 뜻하는 단어 ‘미에드카’가 존재했다는 것 때문이다.
대체 어느나라의 말에 이런 뜻을 가진 단어가 또 존재하겠는가. 이 원주민만의 환경 덕분에 만들어진 표현, 세상의 인식인 것이다.

그래서 문화와 환경이 다양한 만큼 언어도 다양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어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사라지거나 여러요인으로 인해 언어가 합쳐지고 비슷해진다면 그만큼 이전에 있었던 문화와 환경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많게는 수천조각의 피스가 맞물려 하나의 작품이 되는 레고에서 몇개의 조각만 빠져도 연결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이 언어를 만들게 했고 언어가 사람의 사고를 만들어내는 이 순환고리가 느슨해지면 사람의 사고도 유연하지 못하고 녹이슬어버릴 것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범위가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세상은 온전함을 잃어버릴 것이다.

서로가 다름을 이해하고 이해를 넘어 당연히 다를 것이다 인정하고 그 다름이 귀한 보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그래야 이 다양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으로 표현되는 다양함의 유대가 잘 유지되고 그로인해 더 오롯이 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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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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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진화라는 개념은 수백년간 생물학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를 구별짓는 뚜렷한 특징들, 발현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발현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가 생물학에서는 당연히 근간이 되고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생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진화해서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위해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 형태의 이유에서 첫번째, 진화론이다.
이것말고 또 있냐고? 당연하다. 바로 신이 완전무결하게 만들어주셨다라는 창조론이다. 아니 이건 예전에 교황의 권력이 한 국가의 왕의 그것을 넘어섰을 때 주장한 것이 아니야 라고 하겠지만 놀랍게도 사회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에서,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는 아직까지 창조론이 등장한다.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지도 않고 좀비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럼 이러한 진화론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인식되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종의 기원으로 진화라는 개념을 착안해낸 찰스 다윈이 제일 먼저 떠오를테지만, 종의 기원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않다. 그러면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 중 가장 성공하고 널리 읽혀진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다.
물론 진화론의 입장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진보적 성향이 있는 학자이지만 (생명체를 유전자를 전달해 주는 ‘탈 것’에 불과하다는 유전자 만능주의를 신봉하는 것을 넘어 당연한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그럼에도 자연의 생존에 의해 선택된 유전자들만이 살아남아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는 자연선택설을 가장 잘 , 그리고 널리 알린 학자임은 분명하다.

#리처드도킨스 의 신작 #불멸의유전자 (#을유문화사 출판)은 작가의 신념은 더 굳건해졌으나 조금 더 유순해 졌다 해야할까. ‘탈 것’이라는 단어와 견해가 다른 학자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작가는 온데간데없고 수도원에서 필사를 하며 수련한 수도승처럼 뾰족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차분히 정돈된 자신의 생각을 읊는다.

불멸의 유전자. genetic book of the dead. 사자의 유전서 로 생물체를 여기면서 ‘탈 것’으로 폄하했던 생물의 가치를 스스로 끌어올렸다. 유전자를 전달해 줄뿐만 아니라, 계주 육상 선수가 어떻게 해서든 다음 주자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바통처럼, 과거의 존재들의 환경이 생물체의 온몸에 고스란히 새겨져있다고 그래서 이전 세대의 환경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과거를 유추하는 것을 과거 비싼 양피지를 아껴쓰는 방식으로 여러번 겹쳐쓰기를 뜻하는 ‘팰림프세스트‘에 비유한다. 물론 눈으로는 잘 보이지않아 첨단 과학장비들을 동원해야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만한 노력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바로 과거의 것들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진화라는 과정은 어떤 특정세대에서 갑자기 일어나기보다는 매 세대 거의 일정한 정도로 일어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매우 혁신적이기 보다는 보수적으로.
그래서 과거의 진화 양상을 알아내면 높은 정확성으로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킨스의 논리를 지금보다 미래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과학자도 이용가능한 유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가상의 미래과학자 Scientist Of the Future, SOF를 등장시킨다.

이 소프에게는 지금 우리의 현재 생물체의 모습이 ‘사자의 유전서’가 되는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에게 과거도, 미래도 될 수 있는 현실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 전해줄 것들을 내가 아닌 타인(후손)을 위해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며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렴진화나, 학습의 진화 가능성까지. 진화론자의 끝없는 진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여러 시간대가 켜켜이 쌓여있는 퇴적층에 뿌리내린 한그루의 식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썪어 토양이되어 다음세대를 키워낸 과거를 잊지말고 발판삼아 내가 맺은 열매와 후에 썪어문들어질 몸체도 또 하나의 시간대를 의미하는 퇴적층이 되어 다음세대를 살릴테니 말이다.

나의 현재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함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전해질 나의 이야기를 소중히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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