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의 눈
토마 슐레세 지음, 위효정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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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가정을 이룬 남녀는 아이가 생기면 자기 이상으로 그 작은 아이를 평생토록 사랑한다.
빨리 크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그 아까운 아이가 또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어 자기의 목숨같은 아이를 그의 부모에게 내민다.

너무나 빨리커서 아쉬웠던 자식의 어릴 적을 쏙 빼닮은 그 작은 생명체를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십년 전 그때로 두 눈의 수정체에 맺혀있는 자기 자식을 힘들게만 하지않는다면, 어떨때는 부모보다 더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위대한 사랑꾼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10살이라는 나이 밖에 되지않는 그 아이가 한시간 동안 시력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채.

손녀에게 일어난 세상의 암전이 언제 또 일어날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 할아버지 ‘하비’는 만약 세상을 그 예쁜 두 눈에 담을 시간이 얼마 남지않았다면 암흑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피워낼 수 있도록 진정한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3대 미술관 루브르, 오르세, 보부르를 일주일에 한번씩 데려가기 시작한다. 딸이 부탁한 정신과의사에게 데려가 진료를 보게하는 대신에 말이다.

하비만의 규칙, 한 주에 딱 하나의 작품만. 처음엔 아무 말 없이 최대한 작품에 집중하기. 자신을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는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내던 감상시간은 점점 작품에 감화하면서 모나의 마음에 변화들을 일으킨다.

얼마전 ‘심미안’에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의 작가는 중년이 되어서 눈에 문제가 생겼었는데(물론 실명이 되지는 않았다)그 때 든 생각이 그 전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아놓아서 다행이다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해지는 시력 대신에 청각과 같은 다른 감각들이 더 예민해져서 몰랐던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굉장히 긍정적인 작가의 마인드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본다라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겪어보지 못한 것들을 상상해야할 때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알지못한 채로 세상을 살게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더욱 더 앞으로 보지못한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새로운 것에 기꺼이 손을 뻗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녀 ‘모나’를 보고 조바심을 느낀 ‘하비’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기준이 바뀔지언정 세상은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만들어 낼 것인데 그에 상응하는, 아니 인류에서 다시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불멸의 것들을 보고 느끼고 오롯이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상상도 하기 싫지만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암흑 속에서 더듬거리며 살아가야하는 순간을 가장 잘 대비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너무나 어려 평생의 미의 기준이 되기에는 부족한 만화 캐릭터용품과 유아를 위한 디자인의 벽지를 바른 모나의 방이 앞으로의 모나 인생에서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정말 무서운 일일 것이다.

둘만의 52주간의 미술관 나들이는 관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꼭 두눈에, 그로인해 마음 속에 눈을 감아도 자기안의 회랑에서 생생히 보여야 할 미의 기준뿐만 아니라, 그 작품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치관들을, 응원을, 진심을 전한다.

말 그대로 인생수업이었다.
점점 작품에 빠져들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모나를 보고 하비도 새로운 인생을 배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그 시간은, 어른스러운 것이 아닌 유아에서의 탈피와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의 성숙을 보여준다.

하비와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모나와 같은 인격체가 될 수 있을까?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차가 있는 이 둘은, 그 사이의 인생을 복에 겨운줄 모르고 세상을 두 눈에 담던 나에게 과분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고뇌, 고통의 삶을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묵묵히 살아냄으로 자기의 철학을 루틴이라는 태도로 담아낸 것이 예술이라 생각한다.
수십년을 담금질한 하비도, 이제 태도를 담금질하기 시작한 모나의 삶도 멋진 예술이다.
이 예술을 두 눈 으로 내 마음에 담을 수 있어 #모나의눈 (#토마슐레세 씀 #문학동네 출판)은 평생 기억될, 또 오고싶은 미술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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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인간을 말하다 - 예술로 만나는 삶의 기쁨과 슬픔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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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는 5000억을 넘어섰고, 우리나라의 김환기, 이우환, 천경자 같은 화가들의 누적 작품 판매액도 1000억을 상회한다. 그냥 평면 그림한장일 뿐인데 왜 이렇게 비쌀까? 이렇게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소유하려는 사람은 무슨 연유에서 그림을 구매할까?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왜 전시회, 공연장을 찾아가서 음악, 회화, 조각 등의 예술을 적지않은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일까?

#예술인간을말하다 (#전원경 씀 #시공사 @ 출판)
제목부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예술이란 한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사유가 담겨있다.
그 사유는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친절히 쉽게 보기좋은 색감으로 그려져있을수도있고(여기서 ‘그린다’란 상징적인 뜻이다. 그림으로 조각으로 음악으로 문학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삶의 성찰, 사유를 ‘그려낼 수 있다’, 비밀 일기장 처럼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꼭꼭 감춰두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생을 살아오면서 알고있다.
모두가 겪는 삶 속의 구체적인 사건들은 다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깨달음은 비슷한 결로 나아간다는 것을.
그래서 서로 다른 삶임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격려하고 위안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결국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의 사유(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모두)를 어떤 형태로든 꾸준히 묵묵히 ‘그려내면’ 예술이 아닐까.

우리가 예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괜히 두 눈을, 두 귀를 멈추게 되는 무언가들을 경험하는 이유가 바로 예술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인간성의 한 부분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라고 해도 작품이 인정받고 돈 걱정없는 평화로운 나날을 모두 맞이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삶을 살다 죽고나서야 인정받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도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예술가이다.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만 예술가인 것은 아니지 않나.
예술을 해온, 삶 속에 예술이 가득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술가인 것이다. 이목을 끌기위해, 말에(글에)설득력을 주기위해 유명한 예술가가 레퍼런스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식이 부족해 <예술,인간을 말하다>에 실려있는 예술가들의 절반 이상을 몰랐다(여전히 모른다😇)분명 유명한 예술가들이겠지만 내가 모른다면 그냥 일반인이라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나갔고 다 읽고 덮고 무언가를 느끼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정한책생활13th 분들과 함께 읽으면서 대화도 통했으니 문제가 없었던 것이 마..맞을 것이다.

결국 이름값은 예술을 말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 중 좋았던 작품들은 처음 보는 작품들도 많았고 그들의 작품에서, 작품에 녹아있는 예술가의 인생의 일부분을 공감하고 나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다.

그렇게 예술은 내가 몰랐던 나의 진짜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기억나는 시점에서부터 평생을 감정은 절제하고 드러내지말고 다른 사람을 너무 믿지말고 자신을, 본심을 숨기라고 끊임없이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교육받는다.

그렇게 감정을(속마음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다보면 어느순간 나 스스로도 그런 것들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인생은 여러가지 색을 잃어버리고 온통 잿빛이 된다.
한 길 앞도, 내 속도 흐릿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살다보면 삶이 무료해지고 힘든 마음을 달랠 방법이 없어진다.

그럴 때, 잊고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톡 하고 건드려서
잃어버렸던 색들을 하나씩 되찾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니체의 니힐리즘을 따르는 니힐리스트들은 이 세상이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규칙들을 부정하며 스스로 자기만의 기준을 세워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는데에도 예술이 도움이 될 것이고 그 이후의 삶 자체도 예술 그자체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을 예술가처럼 살아야한다.
삶이 가져다주는 경이에 눈뜨고 자신을 자기 뜻대로 표현하며 사는 것. 그렇게 예술을 남기는 것.

자신만의 갤러리를 자신의 예술로 채우기를.
그렇게 스스로를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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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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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당장 내 주위의 현실을 한가지 색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색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름다운 색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회색이나 검은색을 대답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환경에 대한 인식은 제각각이고 그와중에서도 주로 비관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제법있으며,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나는 내 주위를 적어도 계절감이 나타나는 색이나 그때의 나의 심정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정도는 되더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가? 배가 불렀나?속 시원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전혀 아니다.
나보다 많이 벌고 좋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럼 무슨 차이일까?
그 차이를 #심미안수업 (#윤광준 씀 #지와인 출판)에서 찾았다. 바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도 주변이 보이지 않는, 시선이 가려진 경주마 같은 시기가 있었다. 지금만 참으면 나중이 괜찮을거라는 믿음으로 현재를 희생했다. 하지만 참은 것으로 보답받은 내일은 또다른 참음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는 끝이 없었다.
눈가리개를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주변을 돌아보고 내 눈에 귀에 입에 이쁘고 좋고 맛좋은 좋은 것들을 삶에 들여놓아야 했다.

“일상이 아름다우면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예술이야말로 불행을 견디게 해주는 가장 좋은 보호막이다.”
작가의 말 중 이 두마디 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이유와 볼 가치는 충분했다. 아니, 차고넘쳤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낯섦과 진입장벽은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래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심미안’을 가지는 것도, 발전시키는 것도 모두 실제로 가서 경험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기꺼이 전시회로, 미술관으로, 공연장으로 가야한다.
아무리 유명하다는 작품도 사진으로만 본다면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비슷한 화풍의 그림이 화가가 헷갈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다보면 재미가 없어지고 나와의 맞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하지만 정말 스스로의 삶에 아름다운 것을, 내가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것을 넣고 결핍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시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몇 번의 실패에도 도전해봐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몇 번의 실패에도 계속 시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심미안 수업>에서는 실패를 줄일 수 있는 몇가지 방법들을 충고해주기도 한다. 가장 쉬운 도전인 전시회 관람에서는 왠만하면 무료보다는 유료전시를(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어 흥미를 높이기고 좋고, 긍정적 반응에도 유리하다), 함께 갈 사람을 잘 고르고(혼자보다 예술을 사랑하고 전시회 경험이 많으며 취향을 강요하기 보다는 꼭 봐야할 작품을 추천해주거나 감상에 도움이 될 일화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무척이나 좋다), 가능한 여유롭게 시간을 할애하여 찬찬히 구경해보고, 전시회에 대해 미리 제공된 정보를 챙겨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사진을 찍어보는 등과 같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감상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며 어떤 것이든 맘껏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작품들은 감상하다보면 예술품이 걸려있고 진열되어 있는 장소(위치)가 굉장히 중요하고 음악감상도 공간이 무척 중요하기에 자연스래 건축으로 취향이 자연스래 확장되는 경험을 누리기도 한다.

물론 모든 분야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고 차이점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예전에는 무용해 보이던 것들이 유용한 것으로 보이는(이렇게 디자인까지 확장된다)실로 행복으로 가득찬 삶으로의 선순환으로 심미안은 우리를 이끈다.

그 순환은 우리 삶이 무채색의 아무것도 없는 단조로운 것으로 남아있게 두지를 않는다. 끊임없이 나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지는 마법을 부린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행복이라는 마법이 가득찬 판타지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모두가 마법같은 인생을 살기를 바라며.

인생에 마법같은 사건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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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음악 - 양차 대전과 냉전, 그리고 할리우드
존 마우체리 지음, 이석호 옮김 / 에포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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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20세기. 지난한 인류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어쩌면 가장 다양하고 찬란하고 새로운 무언가들로 넘쳐난 인류사를 통틀어 황금기가 되었을지도모를 20세기는 전쟁으로 인해, 독재자들에 의해 유럽을 힙쓸었던 흑사병과도 같은 처참한 양의 피를 흘렸고, 이데올로기라는 칼로 다양한 방향으로 자라나던 가지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잘려나갔다.

1,2차 세계대전과 쉽게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냉전이란 이름의 고름을 터트리던 시대가 어느정도 지나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라고 말해도 거짓이 아닌 시대로 오면서 또다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지구촌 전세계의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닥다리로, 주로 듣는 사람들이 노령층이라는 이유로 주류가 되지 못했던 ‘클래식’도 입맛에 맞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고, 젊은층의 청자들과 함께 나이들어갈 스타 아티스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주류로,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있다.

그런 클래식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애호가들의 플레이리스트는 여전히 아픔 이전의 시대인 20세기 초에 머물러있다.
매일 샐 수 조차없을만큼 쏟아지는 현대 대중음악만큼은 아니더라도 클래식 작곡과라는 학문이 여전히 남아있고, 분명히 매년 작곡상을 수상하는 작곡가가 존재함에도 애호가 대부분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추가되지 않는다.
심지어 두번의 세계대전, 냉전 중에도 수많은 음악가들이 음악가수보다 훨씬 많은 곡들을 만들어놓았을 것이 너무나 당연한대도 이 곡들도 우리의 플레이리스트에 물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예전부터 여전히)당대의 최고 오케스트라의 셋업리스트에도 오르지 않는다.

대체 왜 클래식이라는 장르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전쟁과음악 (#존마우체리 씀 #에포크 출판)이 그 이유를 담고있다.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 인류 최악의 독재자들이 펼친 정책들의 설명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 책에서는 그 당시에도 음악이 가진 힘이 상당했음을 인정한다. 히틀러의 치세에 있는 독일인들은 대부분 글읽기가 가능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에는 까막눈이 많았다. 차이가 분명한 두 부류의 일반인들에게 공통으로 가슴을 울리는 공통어로 음악이 선택되었고, 그 당시의 음악은 ‘클래식’장르가 대세였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장르였으니 정통성을 내세우기에도 좋았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클래식에는 이름만큼이나 애매한 기준이 있었다. ‘구시대적’ ‘신세대적’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나 애매했다라는 것이다. 클래식과 아방가르드, 상대적이었다. 아방가르드도 누군가에는 전형적일 수 있는 것이고 미술의 그것처럼 기조가 확실히 나눠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이름이 섞여있는 것은 죄다 퇴폐로 낙인찍었고, 그럴 수 없을 만큼 유명하고 좋은 것은 유대인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외면했다.

이미 흑인들의 음악이 비흑인들의 심금을 울려 인류통합의 경지에(음악에서만)이른 재즈가 미국에서 흥했던터라 민족의 단결성을 유지해야 했던 독재자는 당연히 모든 것을 배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별된 클래식, 체제를 광고하기위해 쓰여진 곡들은 시대를 지나 아픈손가락이 되어 ‘비나치화’라는 이름으로 금지되고, 상처를 들어내 상처가 있음을 알리는 것보다 외면하고 감추는 것이 훨씬 쉬운일이라 1930년 이후의 20세기 음악들은 필요에 의해 잊혀져 버렸다.

이 책은 그런 클래식의 공백을 채우는 클래식으로 영화음악을 제안한다.
그 시조로 오페라의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로 삼으며, 오페라에서 주인공을 위한 모티프를 만들듯,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위한 테마곡이 만들어진다는 유사성은 물론, 할리우드를 위한 음악을 쓴 1세대 작곡가들은 히틀러가 불법 음악의 생산자로 위험인물 명단에 올린 ‘퇴폐 음악가들’이라는 역사적 이음선까지 제시한다. 이 1세대 작곡가들에게 사사받은 영화음악가들도 마땅히 클래식작곡가이나 전문가(학계, 비평가)로 인해 비하되며 일반인들이 둘은 연관짓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큰 인기를 얻음에도 클래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화음악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클래식으로도, 영화음악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잊힌 작곡가와 작품이 다시 연주되어 마침내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끊긴 음악의 역사를 이어붙일 수 있다.

내가 알고있던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인지하고 시도해보는 것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기꺼이 한번은 도전해봐야 하는 일이지 않나싶다.

우리 안에 있는 탐험가정신을 깨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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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원전대로 읽는 세계문학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영귀 옮김 / 새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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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그레고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글 시작이 아닌가 싶다. 기출 지문으로 고등학교 때 많이 봤던 글이었는데 돌이켜보니 해충으로 변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저 작품이 의미하는 것,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애만 썼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처음으로 오롯이 마주한 #프란츠카프카 의 #변신 (#새움 출판)은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쉽지않았다. 함의적인 문장도 사용되지 않고 절대적 분량도 적었는데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나는 것이 과장을 조금 더해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끝을 향해 다가갈 때 글 속 인물들의 갈등은 커져감에도 오히려 글을 읽는 내 마음은 편안해뎌갔다. 책을 덮고 나서야 어느정도 내 마음이 그랬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레고어가 겪고있는 상황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어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넓은 집에서 부족함없이 보살피기 위해 기꺼이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외부로 돌아다녀야 하는 출장 영업사원을 수년동안 계속 해왔다.
집에서 돈을 벌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사업을 말아먹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레고어였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레고어가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니 해충으로 변해있었다는 설정보다, 벌레가 되었음에도 출근해야한다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는 모습과 결국 달라진 그를 보았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참 가슴아팠다.

벌레가 된 자신을 보고 당황스러워하고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정상인데 아무렇지않게 일어나 출근하려고 하는 그레고어에서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짐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았고, 유일하게 날 어떻게 볼까 걱정하는 것도 가족 뿐이었다.

그레고어만 바라보며 돈을 벌 수 없을거라 여겼던 나머지 세가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돈을 벌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레고어의 소외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유일하게 해충이 된 그레고어를 살뜰히 챙기던 여동생도 점점 오빠의 케어에 시큰둥해져간다.

그러다 결국 그레고어는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그의 방은 당장 버릴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무언가들을 쳐박아두는 곳으로 바뀌고 그레고어가 바닥과 벽 천장을 기어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된 방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아버지가 그에게 던진 사과가 박혀있는 등은 썩어가는 모습에 화가났다.

그럼에도 그레고어는 끝까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사랑했다. 결국 그레고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못하는 ‘저것’이 되어버렸고, 잠과 같은 마지막 숨을 뱉어냈지만, 그레고어가 살아있을 때의 문장과 그레고어가 죽은 뒤 문장의 서술자가 여전히 그레고어인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큰 차이가 없다. 이미 그레고어는 인간의 형상, 해충의 형상 무엇이든 상관없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어서야 비로소 세 가족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가는 모습을 그레고어는 어떤 심정으로 보았을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젊은 그레고어를 보면서 퇴직 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던 아버지 세대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평생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제2의 인생을 기대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
집에서 밥 세끼 다먹으면 삼식이 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던데, 그 희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결국 그 희생의 무게는 점점 바래져간다. 그것이 희생의 덕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그레고어만큼의 큰 짐을 떠안고 있지는 않지만 K장남의 입장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해충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레고어는 모든 짐에서 벗어나 본능에 따라 여기저기 기어다니며 하고싶은대로 했고 그때서야 스스로를 조망했다라는 사실도 씁슬했다.

이렇게 다들 오롯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기는 힘든 세상이다.
책임지는 이도, 책임져지는 이도 살기퍽퍽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필요없는 해충같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어의 특징인 수많은 쉼표를 최대한 살리면서 원문의 뉘앙스를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 새움 출판사 버전으로 나의 첫 <변신>을 경험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카프카의 복잡한 심정이, 알다가도 모를 인간군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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