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펠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공포 영화를 보면 말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지는’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삼두쪽이 오소소소 아래에서 위로 역방향으로 무언가가 쓸어올리는 느낌? 그 불쾌한 느낌에 중독되어 공포스러운 작품들이 여름마다 극장가를 찾아오는 것이겠지?

이런 경험을 하게 하는 공포, 오컬트, 스릴러 장르는 영화 장르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책으로도 ‘장르소설’이라는 범주로 여름에 주로 출판된다. 어릴적 아무 생각없이 이모부 책장에 꽂혀있던 ‘링’시리즈를 보았다가 제법 꿈자리가 뒤숭숭한 경험을 한 이후로 애써 외면한 장르였지만 #디스펠 (#이마무라마사히로 씀 #내친구의서재 출판)은 기차터널이 박혀있는 새빨간 표지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디스펠, 주문의 효과를 무효화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것이 왜 오컬트 소설의 제목을 차지했을까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디스펠>은 오컬트 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미스터리, 수사극의 성향이 강하게 담겨있다. 작가도 오컬트와 미스터리를 적절히 하나의 책에 담으려고 부던히 애썼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 오직 개인의 경험만이 증거의 전부인 오컬트와 논리로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미스터리 추리.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 진짜 봤다, 증거를 보여달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평행선을, 어쩌면 점점 더 멀어져가는 선을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탐정’을 이용했다.
매력적인 탐정이 나와 자신의 논리를 펼치면 다소 논리력이 부독하더라도 탐정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몰입하고, 그 결과 탐정의 말에 ‘설득’되어버리는, 그렇게 사건의 해결이 주는 카타르시스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에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는 ‘덕후’의 길로 들게하는 탐정물.
심지어 <디스펠>에서 그 탐정은 무려 세명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6학년. 학급 내 남자 무리중 하나로 기억되는 스스로를 특별한 한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수단인 오컬트에 심취한 유스케, 자신의 영웅이었던 사촌 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려하는 영원한 반장, 오컬트를 믿지않는 논리적인 브레인 사쓰키, 그 둘 사이에서 중재를 하며 둘의 의견에서 허점을 찾는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인 미나.
이 셋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6학년 시절이 생각나 자기들끼리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늦은밤 외출금지, 스마트폰 없음, 학업외 헛짓?금지, 카페 및 식당 이용 곤란 등)초딩 탐정들임에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좋아했다던데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쓰키의 사촌언니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언니의 노트북에 남겨져있던 7대 불가사의를 하나하나 파헤쳐나가며 그 안에 남긴 단서를 찾아가면서 오컬트파인 유스케와 논리파 사쓰키의 대립이 글의 긴장감을 높인다. 어느쪽 하나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컬트와 논리가 팽팽하게 맞부딪힌다.

그러면서도 유스케가 겪는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도 심지어 주인공이 초딩인 책인데 다섯번 정도 온몸에 소름 오소소소 돋게했다. 주로 밤에 책을 읽고 읽는 동안 비도 제법 왔어서 어우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소름돋았던(말 그대로)책이었다.

오컬트가 너무 강하게 앞으로 나와있었으면 현실성이 떨어져 몰입이 힘들었을테고, 논리가 너무 강했다면 오컬트는 그냥 굳이 왜 넣었는지 알 수 없는, 글 전체가 아쉬워졌을 것이다.
오히려 미스터리에서 논리가 설명해 주지 못하는 약간의 빈틈을 오컬트가 채워줌으로써 사건의 수레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굴러나가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면서 추리에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게 만든다.

추리를 맞추는 것도 짜릿한 독서로 남지만, 하다하다 지쳐 끝까지 추리를 해내지 못한 책이 ‘띵작’이라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는 법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디스펠>은 가히 띵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7대 불가사의를 담고있어서 불가사의 하나하나 마다 추리할 것이 넘쳐났고, 6개의 불가사의로 마지막 불가사의를 추리해야했고, 소름 돋게 하는 오컬트적 현상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면서 마지막 남은 힘도 앗아버린다.
그럼에도 마지막은👍🏻 5장은 읽는 내내 모골이 송연했다.
어른이 되어 더이상 작위적인 공포물에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가? 그럼 <디스펠>을 보라. 내 심장 아직 짱짱하구나를 느끼며 우리를 다시한번 괜히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 발을 못내밀던 그 시절의 나로 되돌려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만과 편견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8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선 옮김 / 빛소굴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300년의 시간동안 꾸준하게 사랑받는 이야기는 몹시 귀하다.
특히나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이야기일수록 그런 경우는 더 귀한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랑과 결혼의 모습이 세상이 변하는 속도못지않게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300년 전이면 결혼은 사랑보다는 지참금으로 결정되는 하나의 거래였고, 그에 맞춰 여성들은 피아노, 뜨개질, 바느질, 댄스, 그림,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배우며 좋은 집에 시집갈 준비하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던 때이다.

#오만과편견 (#제인오스틴 씀 #빛소굴 출판)이 300년의 딱 그 시절의 사랑, 결혼이야기이다.
수많은 번역본이 오랜 세월만큼 공개되어 있지만, 빛소굴 출판사의 버전을 손에 쥔 이유는 나의 첫 <오만과 편견> 경험과 관련이 있다. 나는 <오만과 편견>을 책이 아닌 영화로(만) 겪었다. 미모가 절정에 달했던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을 맡아 나의 스무살에 국내개봉을 했었더랬다.(세월 무엇)

혼자라면 당연히 스무살 남성의 패기로(?) 보지 않았을 영화이지만 교수님이 주말에 조원들과 영화를 보자며 예약해 주셨어서 토요일 아침부터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영화관으로 갔었다.
키이라 나이틀리를 그때 처음봐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뭐랄까 좀 더 성숙하게 사랑을 바라보고 동경하게된(연애하고 싶다는 소리)계기가 되어주었다.
글을 쓰며 찾아보니 관람객이 88만명이네 좀 더 많은 사람이 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지금까지도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은데... 각설하고, 빛소굴의 <오만과 편견>은 내가 스물살 때 봤던 그 영화의 한장면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고전을 이제 겨우 몇권 읽어본 책린이가 나의 개인적 서사와 맞물리며 심지어 아름다운 표지를 뽐내고 있는 이 책을 외면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여성 특유의 세밀하고 신비스러운 묘사와 문체에 매료되어 있던터라 오히려 좋았다. 확실히 영화에서보다 세밀한 내용들이 담겨있어서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영국의 한적한 시골지역에 돈많고 잘생긴 미혼남성이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온 동네 미혼 여성들은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일생의 목표인지라 심지어 잘생기고 활발하며 다정다감하기까지한 빙리씨에 혈안이 된다.

딸만 다섯을 자랑하는 딸부자 베넷씨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모로 유명했던 어머니를 닮아 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딸 중 가장 외모가 아름다웠던 맞이 제인과 빙리는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고,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빙리와 그의 친척들의 장단점을 평가하면서도 진심으로 언니의 사랑이, 결혼이 성사되길 응원한다.
빙리에게는 함께 온 친구, 다아시는 수려한 외모와 재력으로 큰 관심을 얻었으나 특유의 ‘오만’함으로 그 인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그러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춤상대로 그냥 그렇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듣고 부정적 인식이 ‘편견’으로 자리잡는다.

누가 알았을까. ‘오만’의 다아시와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 시절 깨어있든, 깨어있지않든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에 마주하는 방법으로 결국 사랑과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시점에서는 아쉽고 이해가 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여성인 스스로를 안타까워 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진 것 만으로도(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런 그녀를 응원해주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것)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는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이다.
아마 그 시절 독자들에겐 더이상의 도파민은 없지 않았을까.

이 글을 쓴 제인 오스틴은 남매들과 부모에게 글쓰는 것을 응원받는 행운아였으나, 그럼에도 누가오면 글을 숨기기 용이하도록 작은 종이에 삐그덕 거리는 문소리덕에 기민하게 글을 숨기기 좋은 접대실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긴 시간동안 이 책이 널리 사랑받는 것은 작가의 유려한 글솜씨도 있겠지만 사랑, 결혼, 차별없이 원하는 것을 노력으로 손에 넣는다는 것의 의미를 독자들의 시대와 연계해 생각해보는 재미때문이지 않을까싶다.

이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오는 것들에는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 보편적인 것을 보편적이지 않게 특별한 무언가로 세공해내는 능력과 그것을 알아보는 눈.
모두가 멋지다.
영화를 다시한번 보고싶어졌다.그러면 또 이 책이 보고싶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 -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
강주원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쓰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행위 또는 어떤 용도로 사용한다, 이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
#내가쓰이지않은세상에서 (#강주원 씀 #디페랑스 출판)제목에 담긴 ‘쓰이다’는 후자의 뜻을 담고 있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아직 소설을 발표하지 못한 작가 스스로를 담아낸 제목이 감정이입되어 슬펐지만 정작 책을 열고 덮기까지 슬픔은 없었다.

정식으로 소설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고,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치고, 커피를 내렸던, 그러면서도 꾸준히 글쓰기를 해왔던 저자의 인생이 담백하게(가끔 아제개그로 슴슴함을 조절한다.)산뜻하게 담겨있다.

소설가가 아직 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푸념보다는 글쓰기에 관한, 글에 대한,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꾸준히 글을 쓴다면 누구든 작가라는 말을 하던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강주원 작가는 거기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
글을 쓰되, 그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 그것이 작가라고 돈을 받고 받지 않고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이라는 공개된 공간에 글을 적어 올리기는 하지만 평가는 받지 않는다. 조용한 댓글창이 못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드는 것은 아쉬운 평가를 받고싶은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쓸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들었다. 널리 보여줄 것도, 평가받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를 보면 저자는 하고픈 말이 많은 사람이다. 글쓰기에 대한 본인의 생각, 글쓰기 방법론, 자신의 북카페와 글쓰기 수업에 참여해준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뚝뚝한 러브레터 등 다양한 이야기가 간결하면서도 리듬감 있게 담겨있다. 읽기 쉬운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생각이 많으면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에 비해 나는 생각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ISFP로, 좋은게 좋은거라며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은 하나 깊지 않고 스스로도 생각을 했던가?싶은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기록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노트에 적자니 손이 아플 것 같고, 고치기도 힘들고, 컴퓨터에 저장하자니 쳐박혀있는 것 같아 괜히 아쉽고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였고 별 생각없이 읽은 뒤 감상을 대충 적어두는 정도로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여전히 퀄리티는 ‘대충’이나 어느정도 읽은 책과 쓴 글의 양이 많아지고, 독서모임에서 찐 고수들의 읽고난 뒤 사유가 담긴 글들을 보니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듯 책을 읽고나서 떠오르는 질문이 나름 쓸모있어졌다?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다.

여전히 왜 나는 글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 것인지 등단 작가가 되겠다 같은 거창한 목표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쨌든 글을 계속 쓰고 있는 나 스스로는 썩 마음에 든다.

일반적인 예술과 글의 차이점을 저자가 말한 것이 있다.
예술은 피카소가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라고 말했을만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글쓰기는 어린이들의 글쓰기보다 당연히 어른의 글쓰기가 더 낫다. ‘인위적’이라는 요소가 가미되기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던데 나도 공감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툰 나에게 인위적인(적절히 노출 수위를 조절 할 수 있는)글쓰기의 특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반년정도 꾸준히 글을 써오면서 변하지 않고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것을 칭찬받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그런 분들이 나보다 더 오래 글을 꾸준히 쓰고 거기에다가 책에 대해 더한 열정과 진심을 보여주는 분들이라 황송하고 낯뜨겁지만, 이 책은 소설가가 아직 되지못한 저자가 그럼에도 글쓰기를 꾸준히 포기하지않고 써내려 가, 문장이 페이지가 되고, 페이지가 한 권이 책이 된 진정한 변치않은 시간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만두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부터 적당함과 타협하지 마라는 조언을 하는 저자를 보며 작가가 가져야할 소양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 책이 나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하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저자는 이미 자신의 소설을 완성한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지워진 이름들 사이드미러
김준녕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지말고, 명징하게 깨닫고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지워진 이름들 사이드미러
김준녕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디아스포라. 특정 민족이 자의 또는 타의로 기존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현상 또는 그러한 집단.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떠나는 일명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미국으로 향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국민들도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을 때 절박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위상이 많이 올라가고, K-POP과 드라마, 영화와 같은 문화들이 주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저때만 하더라도 동양인들에 대한 시선이 좋지 못했다. 특히나 미국 대도시가 아닌 시골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동양인이 그곳까지 가서 자리 잡을 일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엄청나게 넓은 국가면적으로 인해 시골마을은 거의 자기들끼리 자급자족하며 평생을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머리가 검고 피부가 노랗고 몸집이 작고 자기들과는 다른 냄새가 나고, 영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무시했다.
#김준녕 작가의 #제 (#텍스티 출판)에서 그 시절 미국의 한 작은 시골마을 엔젤타운에서 이름과는 정반대의 인종차별이 발생한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악마취급을 받는다.

<제>에서는 삼대에 걸쳐 미국에서 황인종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미국에서 부를 축적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 의 가족과, 대대로 신내림을 받아야하는 무당의 운명을 벗어나기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도망쳐온 ‘준’ 가족, 홀로 미국으로 유학올 수 밖에 없었던 ‘민경’의 이야기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 그리고 98년. 이렇게 시간이 교차된다.
‘한’과 ‘준’이 엔젤타운의 교회를 중심으로 당하는,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다른 것은 불로 태워죽이지 않았다는 것 밖에 없는 인종차별을 당한다. 물론 ‘한’은 경제력으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지대에 머무르지만 ‘준’의 이상행동으로 인해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이 된다. 신내림을 거부해 생기는 신병으로 인해 마을의 아이들이 겁을 먹고, 한국에서 ‘준’을 찾아온 무당 할아버지에 의해 엔젤타운에서 방화와 미스테리한 일들이 발생하자 교회를 중심으로 백인들은 ‘준’의 가족을 응징한다. 그 응징에는 살기위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의 가족이 앞장선다.
하지만 ‘준’을 포함한 그의 가족을 죽음으로 응징하고 나서 ‘준’의 가족들은 ‘마침내’ 평생 ‘한’과 함께하게 된다.

1998년도에서 ‘한’은 수려한 외모와 탄탄한 몸, 막대한 부와 명석한 두뇌와 능력, 자상한 성격.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어 ‘보이는’성인으로 자라고, 이유도 없이(아마 동양인 여성이라서)회사에서 잘려 백수신세인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민경과 결혼하려한다. 모두가 민경을 부러워하지만 한번씩 발작증세를 일으키는 비밀을 가진 ‘한’의 모습을 알고 있는 민경은 결혼을 고민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부모님을 떠올리며 결혼을 결심하고 식을 올린다.
너무나 다른 집안환경과 인물인데도 ‘한’은 왜 ‘민경’에게 집착했을까? 마지막에 가서야 그 의문이 풀린다.
책을 덮고나면 마음이 어지럽다. 어찌해야할까 라는 생각이 온 몸 가득 차오른다. <제>는 독자들의 이런 반응을 바란 것일까?

미국에 머물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과거 이야기라고, 지금, 한국 내에서만 살고 있다고해서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 윗 세대가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미국을 갔듯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해외 근로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이슬람교도 대부분은 해외에서 그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이다.

우리는 해외 근로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아마 익숙하지 않은 피부색과 특유의 냄새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곁에 다가가기 위험한 사람들로 보고있지 않은가?
엔젤타운에서 히에로니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지옥도>에서 지옥부분의 악마들을 죄다 노란색 인간으로 채운 백인들과 같은 시선은 아닌가? 우리가 피해자였다가 피의자일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책이다. 다문화 혐오를 종교적 오컬트와 버무려 뇌리에 강하게 남기는 작품이다. 텍스티가 현실의 측면을 비추는 ‘사이드미러’시리즈 두번째로 내보인 책이다. 사회에 팽배한 여러문제들을 인지하게 하여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멋진 기획이다.
마냥 살아지지 말고 명징하게 의문을 갖고 살아가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