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기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구체적이고 새로운 방법
최영찬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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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시듣기]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하며 더 잘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영어 리스닝이라는 방법과 대조하면서 설명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즐겨할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잘 듣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데 있다. 양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는데

그 양이 특별한 양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반 양이라는 것과 평범한 저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찬 이라면 누구나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어느 해엔가는 새해 벽두에 '하나님의 음성듣기'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책에서는 그 분들의 말을 인용을 하고 있고 저자의 간증도 간간이 실려 있어서

다시 한번 책의 내용을 되새김 할 수 있었다.

 

앞 부분에서는 영어의 리스닝과 대조를 하느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서

지루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영어를 반복적으로 듣고 쓰고 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반복해서 들으라고

강조하고 있고 실제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말씀들을 다양한 사례를 적용해서 적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기도라는 루트를 통해서 보다는

묵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라는 점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끝 부분에 가서는 제목과 연관된 다시듣기를 활용한 실제 적용법을 실어 놓아서 도움이

되었다.

 

사람마다 체험한 것들이 달라서 확실한 정답이 없는 것이 영성에 관한 것인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라는 것도 일반적인 견해는 있지만 정답은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저자는 달라스 윌라드나 헨리 블랙커비, 조이 도우슨이나

오대원 목사님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었던 영적인 스승들을

모델로 참고하고 있다.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 양적인 읽기에 치중한 나머지 단 몇절을 읽더라도 말씀을 깊이로

읽는 것을 흔히 간과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저자는 깊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그것에서 더 나아가서 반복적

듣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음성듣기가 영적으로 더 발전 된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처음 받았을 때의 아기 같은 말의 상태에서 방언기도를 자주 많이

 활용하면서 방언기도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이러한 듣기를' LT'라는 말로 칭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좋은

듣기 연습이라고 한다.

 

'1온스의 묵상은 1톤의 암송과 같은 가치가 있다'는 조이 도우슨의 말처럼 깊은 묵상을

통해서 나에게 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적으로 많이 읽는 것 보다는 질적으로 단

몇절의 말씀이라도 붙잡고 하루 종일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내게 들려 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양은 그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대원 목사님의 말씀처럼 '묵상은 그리스도인의 왕관에서 잃어 버렸던 보석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말씀을 깊이있게 묵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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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크리스천의 잘못된 믿음
찰스 프라이스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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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크리스천에게도 잘못된 믿음이 있을까? 예수님을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믿음도 올바른 믿음이 있고 그렇지 않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연륜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찰스 프라이스 목사님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모세 ,사울과 다윗의 사례를 통해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을 어떻게 키워 나가며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교회 안에서나 사역을 위해서 행하는 일들이 때로는

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사역 자체나 전도자체에 올인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지 못하고 그 분을 상실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 왔지 그 분의' 능력안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비극은 하나님이 직접 일하도록 허용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자신이 품은 헌신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이 개입하실 자리는 더 좁아지게 된다. 시작은 하나님께 맡겼어도 마지막까지 맡기지 못하는

믿음.-착한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아노라'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끝까지

맡기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런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진리이시다. 내가 믿든 믿지 않든

내가 복종하든 복종하지 않든 하나님은 불변의 진리 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복종할

 때만 그 분을 진리라고 인정하고 받아 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믿음은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이다.우리가 가진 믿음이 크고 작으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대상이

진리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누구나 어떤 믿음의 형태든 가지고 있다.  우리가 믿음의

 크기를 재단하면서 분량을 논하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믿음이란 것이 분량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의 '유용성'에 맞추면서 믿은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 보게 되었다. 나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이 주님이시라면  다른 필요성이

제기 되면 또 다른 형태의 주님을 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종으로 두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진리이시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필요 때문에 그 분이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는 순종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울의 문제에 개입하실 수 없었던 이유를

이것과 관련 지어서 설명하고 있다. 사울의 경우에서처럼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어느 문제에도 개입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 어떤 능력도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란 점이다.

기도를 하면서도 순종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순종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사울에게 닦쳤던 비극이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 '선택적 순종'을 했기 때문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대목 '선택적 순종'이란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 왔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믿는 믿음,

주님을 자신의 종으로 두려는 습성, 그리고 변덕스런 순종등을 옳지 못한 믿음의 범주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서 보이는 옳지 못한 믿음의 유형을 볼 수 있었고

 전도의 방법에서도  얼마나 옳지 못한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자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직시할 수 있었다.

 

자칫 복음을 왜곡해서, 아니면 믿음을 자신의 뜻에 따라 변덕스럽게 선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충고의 메세지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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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의 아이들 - 이민아 간증집
이민아 지음 / 시냇가에심은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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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 다섯개를 주고 싶은 간증집이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씨의 딸 이민아씨의 간중집인데

 이어령씨가 자신의 책에서 이민아씨에 괸한 간증을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이유가 딸의( 시력 손상)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였다고

밝힌바가 있었다. 그 간증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이렇게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정말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너무 무관심하게

대한것은 아닌지"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고난도 이런 고난이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무수한 고난을 10년 이상 겪으면서도

그는 평안을 유지하는 법을 알았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을 할 정도로

그에겐 평안이 넘쳐나고 있었다.

 

옥합을 깨는 마리아의 믿음을 넘어서서 돌을 치우는 마르다의 믿음까지 승화된

그의 믿음이, 고난의 단련을 통해서 정금같이 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저자도

수년 후에나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가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섭리를 다시 깨닫는 것은 그가 겪은 고난이 너무 절절하기 때문일까?

 

22살에 결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좌충우돌 어린나이에 아이를 키우며 학업과

양육이라는 무거운 짐에 4년만에 다시 이혼을 하고 둘째 아이는 특수자폐증을 가진 아이.

그래서 10년 이상을 밤낮으로 눈물로 지새며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갑상선 암은 괜찮으니 아이만 낳게 해 달라는 모성으로 부르짖으며 고난을 헤쳐갔던

저자가 3번의 암의 재발과 5년 이상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시력손상을 겪으며 헤쳐 나왔을

가시밭길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읽으면서도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 마음이 너무

아려왔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애지중지하면 사랑을 쏟았던 첫째아이를 잃고 나서는

기도할 힘을 잃었다는 대목에서는 같은 아픔으로 공감이 되면서 그 폐허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해 내었을까 그 다음이 궁금해졌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겨우 15년 밖에 되지 않는

유약한  믿음을 가졌는데.... 어떻게 했을까. 1년간을 기도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일부러 강한척 아닌척 해도 그건 가면을 쓴 자신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아버지 앞에 솔직하게 짐을 내려놓고 하소연 하는 모습을 더 신실하게
받으시는 분이다.  불속을 지나고  물속을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곳을 반드시 통과 해야만 하는 진리를 우린 너무 늦게 깨닫곤 한다.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가기 싫어도 하나님이 가자고 하시니까, 하자고 하시니까

할 수 없이 사역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선 하나님을 원망하며 좌절의 자리에 있을텐데 그래도 땅끝에서

신음할 사람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치유로 그 하나님을 전하다가 예기치 않은 때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말씀으로 큐티하고 기도하다가 자신의 암을 기적적으로 치료받는

큰 은혜가 임하게 된다. 의사가 치료불능이라고 선고했던 갑상선 암을 10년동안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라도 치료 받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힘들다고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했을 때 하나님은 쉽게?(다음 날 아침에) 고쳐 주셨다.

 

누구에게나 신앙의 위기는 닦쳐온다. 신앙의 회색지대가 있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시실을 아는데 도무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이 '겟세마네의 고뇌'를 어떻게 잘 풀어

가느냐가 이후의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리 웬즈가 말한 '예배자로서의 삶은 내가 알지 못하는 회색지대를 인정하고 끌어 안는

삶이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하고 보여준 사례가 바로 이민아 목사의 지나온 신앙의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 중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분석해서 그 둘의 믿음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말씀의 해석이 마음에 많이 와 부딪쳤다. 나에게서 옮겨야 할 돌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

내가 해야 할 그 마지막 관문, 돌을 치우는 수고를 해야 하나님이 내게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마리아와 마르다를 통해서 고난의 때, 절망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었다.

 

"믿음은 매우 아픈 것이다."

믿음에 지치는 것을,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것을 참는 싸움이라서 그렇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고 믿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을 참고 넘어서는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너무 아프다.

 

내가 이 상황에 처했을 때 나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도 이것을 넘어서야 이 돌을 마지막으로 치워야 하나님이 냄새나는 곳으로 들어 올 수

있으시기에 억지로라도 돌을 옮기는 수고를 해서  나와 함께 가시자고 손 내미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역이다.

사역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돌을 치우는 것이다. 단지 사역은 그 수고를 함께 거들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나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그냥 그경하는 것. 이것이 사역이다.

 

교회가 이런 사역을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보여 주는 그런 교회. 베데스다 연못 갗은 그런 교회. 바디메오가 소리 지를 때에 멈추어 설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시대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저자는 간증을 하면서 이 모든 일들이 요단강에서 그 강 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건져 가지고 나온 길갈의 돌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 돌들로 이제는 신앙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잃은 아들 대신 얻은 이 지구상에 있는 땅끝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려 하고 있다.

 

저자가 예수님에게로 눈을 돌리는 가장 힘든 투쟁을 하며 여기까지 걸어 온 사실들을

길갈의 돌을 줍듯이 주어서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어떤 부흥회의 말씀 보다도 더 큰 은혜를

받았다. 바로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기회가 되면 저자의 간증을 직접 들으면서 더 깊은 은혜를  맛보고 싶다.

 

올 들어서 추천하고 싶은 책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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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할례 - 참된 크리스천의 마땅한 증거
김승욱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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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기본으로 돌아 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초등학교 때 배운 도덕 예의 범절의 기본만 몸에

배어 있어도 남에게 지장을 주지 않고 살아 갈 수 있고 셈법과 사회생활의 기본 지식만 갖추고 있어도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이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이 가장 든든한 뼈대가 되는 기둥이기 때문에 오랜시간 몸에 배어 습관으로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도 그들이 살아 가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주신 것이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이면서 뼈대가  되는 말씀들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그 명령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섬기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인데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에서도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제일 첫째에 두고 있고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실 성경은 십계명이나 교리문답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해설해 놓은

설명서라고 하면 너무 비약된 것일까?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섬기고 매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앞자리에

모시고 사는 삶을 살고  무엇보다 그 분을 우선 순위에 두고 제일 먼저 경외 하는 일.

 물질이나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그 분을 가장 사랑하는 일. 이 모든것이 축약된

  그 분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고

 이 책에서는 이런 다섯가지 내용들을 우리가 어떻게 잘 지켜 나가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다.

 

 할렐루야 교회에 김상복 목사님의 후계자로 오신 김승욱 목사님이 할렐루야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키기 위해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들이다.

 

신명기 11장 12절에서 16절의 말씀이 위의 다섯가지 명령들을 요약한 말씀이고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가장 잊지 말고 심비에 새기고 지켜야 할

핵심중의 핵심인 하나님의 명령이자 애타는 권고의 말씀이다.

 

어떤이는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그러나  이것은 주관적인 자신의 판단에

 의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주일를 잘 지키고 있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잘 하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도 나를 향해서 박수를 보내고 계신가?라는 질문 앞에 마땅히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평가나 자신의 평가가 아닌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코람데오(  Koram  Deo) "  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우선순위'가 정확히 세워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라면

어떤 불가능이나 불평도 감수해야 하는' 절대적인 순종'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75세에 약속을 받아서 그 말씀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5년 후인

100세에 이루어 졌는데 그는 기다리는 25년 동안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의지했다. 오늘날과 같이 성경이나 신앙의 선배들이나 붙잡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음에도 한결 같이  기다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은 위의 다섯가지 요소들이 모두

포함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기다리는 동안 3번 하나님이 나타 나기는 하셨지만 약속이 이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한결 같이  말씀만을 의지했고 붙잡고 살았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원형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우리가 '지연된 만족'-장차 있을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란 진리를 깨닫게 된다.

 

야곱은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는 기막힌 사실을  천사와 씨름하던 밤에 깨달았으니

그것이 바로 불행이면서 야곱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 깨달음이었다.

그 때까지 살면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은 분명히 비극이지만 다행인 것은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한치의 의심도 없이 붙잡고 살며 '정금같이

나올 날'을 기대하고 사는 삶, 야곱처럼 늦게라도  하나님이 내 곁에 항상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신뢰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지금도 내 곁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진리를 보게 한다.

신명기 11장 13절의 중심절은 늘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명령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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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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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완, 영선, 경혜- 이 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의 불평등한 삶, 자화상을 표출해 내는 인물들이다.

선우, 박감독 그외 출판사 사람들.

이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은 불평등한 여성들의 삶을 충분히 보상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제기만 할 뿐이다.

 

공지영 작가가 사회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라지만 소설 속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천천히, 혜완의 입을 통해서 그의 동창들인 영선과 경혜의 우울하고 음침한 그림자만을 보여 준다.

물론 자신을 포함해서.

 

왜  세여자 모두가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질긴 끈처럼 온 몸에 두르고 살아야만 했던걸까?

우울하고 어두운 혜완의 방에 처음으로 울린 전화 벨 소리로 시작해서

마지막 친구 영선의 죽음을 전화벨로 들으면서 까지 전화벨은 이들 모두의 운명처럼

그렇게 낮고 어두운 마음의 방을 통해서 혜완의 목소리로 나타난다.

 

왜 여자는 남자의 음식이 되어야 하고, 왜 여자는 남자의 배게가 되어야 하고

음식이 되어야 하고, 그의 가방이 되어야 하고, 그의 옷이 되어야 하는가?

한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사물로 여자를 보는 이중적인 잣대, 남자의 시선이

이 각자의 개체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여자는 단지 하나의 사물일 뿐이라는 의도적인 표식이다.

이것들 각자가 다시 하나로 통합 될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다.

 

소설 속 화자(話者)인 혜완은 자신의 이혼과 새로운 만남에 대해서

 영선,그리고 경혜의 일들을 나지막하고 음울한 목소리로

들려 준다. 자신의 남자 선우와의 만남과 헤어짐도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자라는 존재가 남자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불평등하고 불편한 사람이라는

 암시를  주면서.

 

'이미 식어 버린 커피에 하얀크림은 섞이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의 이해심도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혼 별거, 이런 상황에선  아무런 것도 작동을 하지 못한다.

 다 식어버린 커피같은 마음만 남아서 프림처럼 겉돌기만 한다.

이런 상황이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을 더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남녀의 심리묘사- 그 간극을 읽어 내느라 내용이 아주 지리할 만큼 책장이 넘겨지고

쉬엄 쉬엄 읽어 가며 한 템포  느리게 읽어 내려 가야 할 책.

 

"~하지 않아도 됐을 것,그러나 이건 선택이었다.

다만 그 선택 속에는 예기치 않던 상황들이 늘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가끔 운명이라 부르고 싶어했다."

 

"누구도 행복하지만은 않고 누구도 불행하지만은 않다.

불행이란 단지 나날의 사건일 뿐이다."

 

혜완의 이혼도 영선의 죽음도 단지 자신의 선택에 따른 운명이었을까?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포함 된 것, 이것이 운명이다.

비껴갈 수 없는 그 무엇 강력한 힘. 바로 그것.

그러나 그 운명이 불행하대도 행복하대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

단지 흘러 가는 시간 속에 소멸 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우리 속엔 영선이 있고 혜완이 있고 경혜가 있다.

이혼을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그로 인해서 자살을 하고

바람난 남편에 맞서서 똑같이 다른 남자를 만나 어긋난 길로 향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형태는 같은 모습들.   두명의 여자에게선 희생과 의연한 모습이

다른 여자 경혜를 통해서는 자유분방한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여자의 모습일 뿐이다.

 

어제의 나의 모습이 오늘의 나이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이란 단지 자신이 선택한 길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굳이 '운명'이란 굴레에 가둔다면

일생이 불행하거나 자신을 비하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삶의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사랑'을 빼고 나서도 일부러 차선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혹 차선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할 일이다.

 

선택이 운명을 가름한다.

단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소설 속에 그려진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모두가 나쁜 남자의 유형들이다. 이 원리대로라면 남자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고

여자들은 모두가 남자에게 얽혀 사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모두가 픽션일 뿐이다.

 

세상엔 완전히 나쁜것도 완전히 좋은 것도 없다.

 

그 사람들의 마음과 상황이 그렇게 하도록 떠 밀었을 뿐이고

그 떠밀림에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남자들만 있을 뿐이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낮과 밤이 있고 음이 있고 양이 있듯이

어둠과 밝음이 늘 교차하고 왕래하며, 돌고 도는 지구처럼

음은 더 도드라지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며 시선을 날카롭게 채 가고 있다.

 

그러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 가거나

아니면 불시착한 별처럼 낯선 땅에 정착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고 운명이었다면 말이다.

 

살아가며 여자로서  겪어야 할 수치와 모욕들- 이런

모욕을 감당할 수 없다면 누구도 자신을 발닦개처럼 밟고 가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몸에서 나오는 때처럼 모욕이 그토록 징그럽게 싫었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밟고 지나갔다면, 자신을 널부러 뜨려 누군가가 밟도록 허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말들은 지금  출판된 책의 제목에 사용된 불경의 문구들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더 담대하게 더 용감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마음을 씻어 잡념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혼자서 자기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남자와 함께 어울려 살며 겪어야 할

여자의 어쩔 수 없는 굴레를, 불평등과 불합리를 내 세워  조근조근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기 보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사회의 부조리와 남녀의 불평들을 걷어 치우고

가볍게 깃털처럼 살아가라는 말을 작가가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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