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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추격전
튤리안 차비진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님이 싫어서 도망쳤던 사람-요나의 이야기. 주일학교에서 자주 들었던 설교로 기억하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의미없아 받아 들여졌던 요나서가 이렇게 심오한 깊이가 있는 책인 줄 몰랐다.
저자가 풀어낸 요나서에는 죄의 속성과 거기에 비해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에 무게가
실리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색다른 단어가 나온다.
십자가 복음이 신약성경 사복음서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던
요나의 이야기 속에도 있다. 그것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요나의 죄와 우리의 죄,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
되면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요나라는 인물속에 있는 것이다,
불순종한 요나의 삶을 관통하며 흐르는 복음의 진수를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는 요나서의 강해와 아울러 문학적인 시도 나오고 요나를 그린 그림을 형상화 하면서 그림속에서도
이야기를 끌어내며 신앙의 적용점을 짚어 주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책 속에는 두가지의 큰 대지가 나오는데 요나와 하나님의 상반된 마음이 그것이고 이렇게 다른 점을
대비 시키면서 죄와 은혜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뒷 부분에서는 이제까지 강해한 요나서를 통해서
어떻게 그 내용을 삶에 적용 시키며 살아 가야 할지를 원초적인 복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멸하실 충분한 권한이 있음에도 왜 끝까지 요나를 쫓아가셨을까? 의아해진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해서 그럼에도 요나를 쓰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사역이나 일 보다는 그 일을
맡은 사람을 더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요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실패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중심으로 살지 않아서 실패했던 요나, 그렇다면 복음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이다, 질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를 이기려고 했고 자신에게 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실수를 범했다.
니느웨 사람들만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요나에게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과 선지자라는 우상이 있었다.
"당신의 우상은 무엇인가?"........ 저자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되묻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모습 속에도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우상이 잠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지만
요나에게 참된 회개는 없었다,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이 없는 이유는 참된 회개가 없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회개는 샬롬이 흘러가는 호스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피해 달아 날 수 있음을 통해 순종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마음과 행동-주종이 뒤바뀐 순종, 회칠한 무덤과 같은 순종을 하나님도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요나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선'과 요나가 생각했던
인간적인 선의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요나의 마음 속에 자만심으로 응어리진 '응당한 일의 댓가'를 바라는
우얼적인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바라시는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완벽하리만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도망자를 끝까지 추격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와 같은 반역자들을 포기할 충분한 권리가 있으심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깊은 자비심이다,
책을 통해서 보여지는 트라이앵글의 큰 삼각 구도는 '큰 것'이다, 우리의 '죄'가 크고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 하나님의 '선교'가 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선교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발견이다.
성실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 충실하든 그렇치 않든 우리 모두는 어느쪽으로든 요나처럼 독선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요나, 선지자인 요나에게도 구원과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끝까지 추격하시며 하나님이 그를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추격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더 두려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끝까지 요나와 니느웨를 추격하셨다면 나도 어디에 머물든지 어디에 있든지 끝가지 추격하실 것이다,
그것이 두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누구 못지 않게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요나의 영적인 빈곤이 나의 빈곤과 같음 앞에서 나약함를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추격과 요나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선교사명 때문에 막을 내렸다.
하나님의 선교사명- 즉 '하나님의 관심'은 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어서
니느웨도 요나도 모두 구원과 자비를 경험하게 되었다,
요나서가 다는 선지서와 다른 점은 요나의 메세지가 없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도망자 요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죄악 앞에서 복음의 우월성과
하나님 은혜의 절대적 필요 ,복음과 비복음적인것들의 분별. 자신의 자존(自尊)적인 감정이 한낮 가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도 다른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요나서는 하나님이 싫다고 도망치면서도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첫번째 책이 된다,
"복음은 모든 도망자들을 추격한다.
혼자 힘으로 선해지려 노력하면서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과
제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을 다 좇는다.
둘 중 어느 방향으로 달아나건 우리에겐 복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