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쿡 - 누들로드 PD의 세계 최고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이욱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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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운 것은 한 접시의 요리를 앞에 놓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법이었고, 음식을 만드는 일과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었다. 또한 그것은 타인의 요리, 다른 문화의 음식에 감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고, 좋은 음식과 그것을 우리에게 준 자연에 감사하는 법이었다. (p. 317 에필로그)

 

 

<누들로드>를 들어본 적 있는가?

C에게 <쿡쿡>의 저자 이욱정에 대해 설명하며 물었더니 대뜸 "에로만화영화 '누들누드'?" 잘 알고있노라며 자신만만했다. 그렇다. 일부의 사람들은 '누들누드'와 혼동할 수 있다. 저자도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조연출을 모집했더니 '누들누드'와 혼동한 지원자가 19금 소재를 공중파에서 방송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들누드>는 KBS에서 제작한 국수를 통해 본 인류 음식 문명사로 실크로드마냥 세계 국수의 역사를 추적하는 유명 다큐멘터리다.

 

다채로운 음식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먹거리에 있어 진정한 올림픽 레이스가 펼쳐지는 런던에서 그의 말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런던에 모여 있는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은 거듭되는 이종교배로 진화해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런더너들은 요리에 관해 철저한 코즈모폴리턴, 지독한 잡식성이 되었다. 내가 런던에 매혹된 것도 바로 이 문화적 믹스 앤 매치였다. (p. 296-297)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론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이지만 더 나아가선 요리를 통한 세계인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요리학교가 위치한 영국 런던의 도시에 대한, 영국의 요리 프로그램과 스타 셰프들에 대한, 서점 빽빽하게 들어찬 수많은 요리책에 대한, 요리학교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동기들에 대한, 진정한 한식세계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가 르 코르동 블뢰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2년, 그것도 엄청 바쁜 2년이었지만 그 2년동안 그는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에 걸맞은 만큼의 배움을 얻은 것 같다.  

 

일단 남미나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라틴문화권 친구들은 떠들썩하고 화끈하다. 요리하는 스타일도 거침없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옆자리에 앉게 되면 좀 시끄럽지만 그들과 어울리면 항상 유쾌하다. 서유럽 국가 출신들은 자기주장과 요구가 분명하고 논리적이다. 시연수업 중 셰프가 교과서의 레시피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요리를 하면 대충 넘어가지 않고 바로 따져 묻는다. 깍쟁이들이 많은 편이다.

아시아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다. 모르는 것이 있어도 손들고 질문하는 법이 없는 반면, 교실 맨 앞자리에 앉는 공부벌레들이 많다. 손놀림이 서양인들에 비해 날렵해서인지 요리 테크닉이 상대적으로 뛰어나고 섬세하다. 담배인심도 좋고 노트도 잘 빌려주는 등 정이 많은 편이다. (p. 277)

 

서양친구들은 논쟁에 능하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다. 한국에서 촬영하다 보면 말 잘하는 셰프 찾기가 갈치살에서 잔가시 골라내는 것만큼 어려운데, 유럽에서는 학생들조차도 자기 요리에 대한 철학이 뚜렷하고 표현이 유창했다.

나는 좋은 요리사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말하기라고 생각한다. 셰프의 언어능력은 자신의 요리를 타인에게 설명한다는 뜻을 넘어서, 레스토랑의 격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셰프가 식탁에 멋지게 나타나 전남 신안에서 막 잡아온 신선한 병어로 만든 이 요리는 이러저러한 화이트와인에 곁들여 드시면 기막힌 풍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화이트와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하고 설명하는 순간, 손님은 그 요리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다. 요리에 담긴 스토리를 들려주는 셰프의 달변은 식탁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p. 301)

 

<쿡쿡>은 '누들로드 PD의 세계 최고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란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PD답게 시종일관 요리학교와 요리사와 요리에 관해 객관적이고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나 역시 책의 소재에 앞서 저자의 프로필을 보고 이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책 앞날개의 저자소개 '음식을 제대로 알아야 좋은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전 재산을 털어 2년간의 요리유학을 떠난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에 입각한 요리학교 입문이란 용기에 먼저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것도 직장 10년차 40대란 나이에. 몇 개월 전 온갖 짐을 걸머쥐고 히스로 공항에 내리던 날이 새삼스러웠다. 날씨는 추웠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그러나 나는 우울에 침잠되지도, 비관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영국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p. 198)

 

그리고 코르동 블뢰에서의 요리유학을 <셰프의 탄생 - 500일의 레시피>란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유학에서 돌아온 후 고은 시인의 <만인보>('시대'와 '사람'에 대해 30여년에 걸쳐 완성한 시집. 4001편, 주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 5,600여명이 등장한다.)같은 음식 전문 PD를 꿈꾸며  <요리인류>(2014년 방영) 8부작을 준비중이다.

결국 그가 하고픈 말은 인간은 요리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는 건 코스요리와 비슷하다. 세상맛을 배우는 애피타이저(전채요리)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아 목표를 성취해야 하는 메인요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 식당에서야 전채-메인-디저트가 순서대로 이어지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이의 인생은 달콤한 디저트부터 먼저 즐기다가 메인요리라는 도전의 시간을 영원히 맛보지 못하고 끝나기도 한다. 반면에, 일에 미쳐 버둥거리다가 달콤향긋한 디저트를 아예 맛보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평생 자기 길을 못 찾고 변죽만 울리다가 끝나는 전채요리 인생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코스요리는 어찌 보면 공평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순서도 제각각이다. (p. 8-9)

 

인생은 퀴진인가, 파티세리인가? 내 멋대로 살아도 인생 후반전에 되살아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열린 세계일까? 아니면 뿌린 대로 거둘 수밖에 없어 결국 정해진 법칙에 따라 결말이 나는 닫힌 세계일까? (p. 245)

 

* KBS스페셜 <셰프의 탄생 - 500일의 레시피> 다시보기

http://www.tudou.com/programs/view/ZTMb6ghhe9Y/?resourceId=0_06_02_99?fr=2

 

  

좋은 레스토랑이, 그것도 수많은 좋은 레스토랑이 나오려면 50, 아니 100년은 족히 걸린다. 뛰어난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오너 셰프가 몇만 명을 넘어 몇백만 명이 있어야 하고, 그걸 알아보는 안목을 갖춘 고객이 몇백만 명 혹은 몇천만 명은 있어야 비로소 그 나라의 음식이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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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와 거기 - GQ 에디터 장우철이 하필 그날 마주친 계절과 생각과 이름들
장우철 지음 / 난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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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4월, 버드나무, 앤트위프, 이소라, 곶자왈, 논산, 애니멀 콜렉티브, 파초, 홍상수의 여름영화들, 어제 내린 눈, 동영배의 봄, 산 세바스티안, 백화등, 엠/엠 파리, 루 뒤몽, 권부문에게 중요한 것, 암스테르담, <무서록>, 한니발 렉터, 머스크, 층운과 적운, 푸른빛과 싸우다, 드리스 반노튼, 선암사, 캠벨얼리, 나쓰메 소세키의 남자 주인공, 엄마와 금강에, 베를린, 설국, 포의풍류도, 밤섬, 농부 홍순영, 김녕, 파리, 에릭 로메르의 묘비, 진도, 그 이름 나미, 하얏트 로비를 걷는 몇 초, 런던, 뱅크스 바이올렛, 모임별의 연주회, 서울 택시, 긴자, 괴산, 평양, 능소화는 언제 피는 꽃이었나, 비치 보이스, 이화동, 으름...

 

책을 받아들고 바로 외출 가방에 넣었다.
왠지 잠자리에선 개연성있는 소설을, 지하철이나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짜투리 시간에는 에세이를 보겠다는 습관이 나도 모르는새 자리잡았다. 그러나 다음날 외출에서 몇 장을 읽고는 일주일이 넘도록 가방에 그저 넣고만 다녔다. <여기와 저기> 'GQ 에디터 장우철이 하필 그날 마주친 계절과 생각과 이름들'이라는 부제인 이 책의 첫느낌은 정말 두서없는 여기와 저기에서 여기 저기의 사진들과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이었다. 평소 에세이를 즐겨 읽지만 이번 책은 다른 책들과 꽤 다른 읽을거리였다. 호기심이 급감했고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 후회도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책을 뒤적이면 공감하는 글귀가 자주 얼핏 보였기에 다시 손에 들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여전히 저자의 의도를 이리저리 추리해보지만 역시 몰랐었다.

 

봄밤 이후로 마음이 움직였다. 몇년 전의 기록 먼곳에서의 기록 낯선 이의 이름이 문득, 이소라 그녀를 연상케하듯 모든 날들이 오늘이 되어버린다. 역사와 지금이 맞물리고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미아동이 아니고 이화동 삼거리에 살거나 살았거나 한 70, 80년대의 오늘 이야기에 백발을 상상했지만 추리해보니 3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저자가GQ에디터로서 그리고 지극히 개인으로서 그 동안 살아온 지금들.
세상 모든 것들은 따로따로 있지 않음을 알았다..... 거기에 있는 것과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어떻게든 이어져 있었다..... 모두 여기 있으므로, 추억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기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책 뒷표지에 쓰인 글귀를 정말 책을 덮는 순간 공감했다. 이소라의 현재주의처럼 바로 지금.

 

 

사랑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지겹지 않을까요?
아니요, 사실 오늘 죽잖아요. 내일 죽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내 임종의 순간은 오늘이란 말이에요. 제가 서른일곱이지만, 지금을 살고 있지만, 결국엔 나 죽는 날도 분명히 오늘일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럼 너무 빠른거야. 사랑이고 이별이고 그런 거. 한낱 이별 나부랭이. (p. 50 봄 - 겨울, 이소라)

 

 

책의 편집이며 디자인도 심상치 않다. 여백이 적은 가득차 보이는 텍스트에 어떤 쪽은 양쪽 페이지가 가운데 정렬을 해놓은 듯한 낯설은 배열. 사진마저도 수년전부터 최근까지 여기와 저기의 사진이 두서 없이 담겨 있다. 결코 잘 찍은 것 같지만도 않은 사진들까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마지막 봄'이라는 챕터. 가끔 정말 어울리지 않거나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마지막 부분 태양의 인터뷰...
특히 좋았던 부분들은 낙서. 지금의 순간들을 엮은 책이어서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문구가 많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왜 <여기와 거기>가 끌렸는지 알았다. 뭔가 특별하다!


이태 전 동짓달엔 한남동 리움에서 오원 장승업이 그린 <매화도>를 봤다. 글쎄, '봤다'는 만족스런 서술이 아니다. '느꼈다'는 의미로는 옳으나 얕아서 퇴짜. 그때를 기록하는 제법 합당한 말은 '오원 장승업의 <매화도> 앞에 섰다'이다. 서 있었다. 다가가지 못했다. 연신 서로의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장어들이 그럴까? '장승업은 미쳤구나.' 그날의 감상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p. 68 봄 -그러나 우리는 매화를 보지 못하고)

 

소나무숲이나 느티나무 아래서도 같았나? 매화에겐 쉽지 않은 기품이 있다. 밑동부터 덩치를 불리고 보는 여느 고목나무들과 달리 처음 심을 때부터 그랬을 것 같은 알뜰한 몸매는 매화만의 소신이다. 620년 세월이 무색하도록 여위웠지만 놀랍도록 섬세한 밀도가 그 여윔의 배후다. 엉킨 가지의 율동이고 북실북실 이끼를 키우는 아량이고 어느 방향에서든 균형을 거스르지 않는 고고함이다. (p. 71 봄 -
그러나 우리는 매화를 보지 못하고)

 

소세키 소설 속 남자들의 걸음걸이를 안다.

시계를 차고
대문을 나서
모퉁이를 간략히 돌아
대로를 만나
전차가 지나도록 기다리고는
언덕길을 오르며
생각하며
생각인 줄 모르고 생각하며
수많은 감촉을 실은 간직하며
손길이 집요한 정원이 딸린 집으로 들어서는 그의 이름을 하마터면 부를 뻔했다.
도쿄는 한여름이었다. (p. 79 여름 - 夏目)

 

 

 

1989년 서대전역 앞 삼성아파트 31평형 12층에서 사촌누나는 인켈 전축에서 나오는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를 등나무 소파에 파묻혀 듣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포즈라고 생각했다. (p. 83 여름 - 낙서 - 여름방학)

 

아름다울 텐가요?
이것은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스물여섯 살 송철이 형이 썼던 시에 들어 있던 말. 그 시의 제목이 '제비집이 있는 집'이었는지, <생각하는 나무> 연작 중 하나였는지, 나는 1994년의 내가 아니라서 그만 잊고 말았다. 어느 밤 형에게 "형 그 시 제목이 뭐였죠?" 물어서 <은사시나무>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걸로 해둔다. 어떤 것들은 그런 채로도 따뜻해서, 열고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p. 87 여름 - 낙서 - 아름다울 텐가요?)

 

우연히 평원석 하나를 보기 전까지, 세계는 없었다. 가로 80센티미터쯤 되는 검은 수반에 금빛 모래를 자리 삼아 놓인 평원석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모양의 돌을 평원석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돌의 넓음과 그 돌의 맑음과 그 돌의 단단함과 그 돌의 고요를 느끼고 말았다. 수석은 형, 질, 색, 크기, 그 밖에도 밑모양이니 물씻김이니 하는 용어에 갖가지 분류와 감상 방식까지, 돌멩이 하나로부터 꽤나 '아저씨풍으로다가' 번다해 보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돌을 대하는 마음이다. 마우스 옆에 단단한 돌 하나를 두고 거기에 손을 올리고 쉬면 얼마나 호젓한지,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p. 89 여름 - 낙서 - 수석)

 

"비라는 글자는 정말 비같이 생겼고, 숲은 진짜 숲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는 호랑이도 호랑이 같던데요?"
연애의 말들. (p. 91 여름 - 낙서 - 스물아홉)

 

상허 선생이 이웃에 계셔서 밤에 앵두 한 대접 들고 찾아가는 일을 <무서록>을 펼칠 때마다 그려도 본다. 이태준은 여름에 생각난다. 겨울엔 어김없이 기형도가 그렇듯이. 올여름을 지나면서는 이태준과 더불어 청장관 이덕무의 수필을 또한 읽었다. 18세기의 조선 선비 이덕무의 책 제목은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이었다. 온종일 정자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 그게 참 좋았더랬다. (p. 92 여름 - 낙서 - 상허와 청장관)

 

돌을 바꿔치기 한다. 거제도에서 주운 돌을 섬진강변에 놓기도 하고, 인제에서 주운 돌로 예산저수지에서 물수제비를 뜬다.
일어나자마자 한껏 차려입고 경주 석굴암에 간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차려입고 노을을 맞는다. (p. 112 여름 - 여름이 오면 너에게 가지 않고)

 

이상 <권태> 1977, 동서문화사

이상은 스물여덟에 죽었다. 도쿄에서. <권태>의 이상은 계속 거처를 바꾼다. 산촌에선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져서는 간신히 도회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도시에선 더 큰 것에 대한 욕망과 적개심과 동경으로 치닫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어서 겪어야 할 것이 별만큼인데, 밤하늘을 쳐다보면 별의 말도 들린다. 하여 그는 괴로운가? 행여 행복한가? 이상의 시와 소설이 어떻게 해서든 극단이라면 수필은 그림자와 같다. <권태>를 읽으면 이상에 대한 이상한 선입견이 증발하지만 대신 불안이 온다. 얼굴이 굳는다. 어쩔 수 없이. (p. 158 가을 - 내 책은 오래되었으나)

 

인터뷰의 본질은 아마도 누군가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의 실상은 한바탕 소동극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마저 왜곡된 소동극. (p. 233 겨울 - 인터뷰 그까짓 것)

 

마지막 봄이라면
올해가 마지막 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한다
있었던 일과
했던 말
누워서 달력을 보면
밤과 낮이 동시에 있었다 (p. 315 마지막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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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봄이 와 있다 - 서서히 피어나고 점점 진해지는 서른 살 나의 이야기
김규리 지음 / 예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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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는 늘 예기치 않았던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찾아온다. 걷다보면 생각은 담백해지고, 삶은 단순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일에만 몰두하고, 걸으면서 만나는 것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길의 끝에 와 있는 것이다. (김남희,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중에서)

 

 

이 가을에 '봄' 느낌 물씬 나는 에세이라니,

그러나 고난의 이십대를 살아낸 김규리에게 서른의 지금은 그야말로 봄이다.

 

서서히 피어나고 점점 진해지는 서른살 나의 이야기

"마음의 겨울이 지나고 나면 꽃이 활짝 필 차례다"

 

 

스물다섯을 살고 있는 H가 하룻밤 자고 나면 훌쩍 서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던 그 순간의 불안한 눈빛이 연상되었다. 정작 나만 하더라도 젊은 것 빼고는 좋은 것, 잘 되는 것이 별로 없는 진퇴양난의 미숙한 20대 후반을 살고 있기에 열번이고 백번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젊을 때의 청춘을 떠올리는 것에 진저리치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많은 것에 도전하고 열렬히 원하고 갈망하지만 안되는 것은 끝내 안된다는 진실과 마주하는 나이, 많은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청춘들도 순간의 시간들이 두려워 지는 나이. 그래서 서른, 혹은 서른 즈음이 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슬픈 상상을 하는 나이. 정말 서른이 되고서야 봄이 찾아온 김규리 그녀의 이야기다.

 

서른을 넘기고서야 나는 나에게서 조금씩 편해졌다. 부족한 나를 용서하기로 한 순간부터 말이다. 완벽하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고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너무나 힘들었고, 또 부끄러웠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고서야 조금씩 나를 놔주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

내가 아는 지금의 내가 때가 되면 또 변할지도 모른다. 20대에 나의 30대를 가늠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미래의 불안함보단 오늘을 알알이 즐기며 사는 것. 아픔도 즐기고 고통도 즐기고 땀도 흘리고 즐거움은 더 즐기고. 그리고 가장 감사함을 가슴에 새기며.  (에필로그)

 

김규리의 <내 앞에 봄이 와 있다>는 기대한 그대로 그야말로 말마따나 그녀의 일기다. 다소 신변잡기적이고 뒤죽박죽 매끄럽지는 않지만 그녀 인생의 순간 순간을 글로 쓴 기억 모음. 대체적으로 유명 연예인의 에세이가 그렇듯 다소 쉽고 가볍게 읽히고, 어쩌면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착한 사람이란 포장지로 잘 싸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꿈틀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거룩한 당신, 부모님에 대한 글에서 만큼은 그녀의 진정 어린 사랑과 후회,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하마터면 지하철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다 혼자 눈물흘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뻔 했다. 거인 같았던 부모님이 부쩍 초라해 보일 때, 어느새 늙고 병들어 작아져 계실 때, 심지어 예상보다 빠른 시간 내에 떠나실 때 자식의 벼락같은 슬픔은 크고 작음이 없이 같을 것이다.

 

나는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 그리고 지금도 늘 그런 마음이다. (p. 69)

 

그래도, 그래도 해야지. 표현은 못 하셔도 마음 깊이 즐거워하실 테니까.

아버지, 당신은 내게 피와 살을 주셨고 사랑과 지혜를 알려 주셨습니다. 제가 비록 당신께 젊음을 돌려드릴 순 없지만 늘어가는 주름만큼이나 행복한 일 만들어 드릴게요. 당신의 웃음이 제겐 희망입니다.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p. 99)

 

책은 전반적으로 짧막한 그녀의 생각 혹은 좋은 글 따위,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자 사랑의 표현, 아프리카 봉사활동에서 배운 삶의 자세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낯선 여행지에서의 낭만 가득한 일기 외 여배우로서의 삶과 일상으로 이뤄져 있다.

이를테면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날의 자기 믿음, 수영을 처음 배우던 날의 깨달음 같은 추억부터 누워만 있던 육체와 나아가 마음을 함께 일으키고 다잡아준 등산 예찬, 최근 작 <무신> 송이를 연기하던 마음까지. 사실 내가 김규리라는 배우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현정아 사랑해> 드라마 제목때문이었다. 꼭 내게 하는 달콤한 말 같았기에. 이후 미인도에서도 아름다웠고 특히 <댄싱 위드 스타>에서는 최고의 노력과 인내를 보여주었다. 김규리 그녀는 한 사람으로서 또 대한민국의 여배우로서 조금씩 더 성장하고 발전하여 아름다워지고 있는 중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서 또 다른 하루를 급히 시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다. 피렌체에 왔다고 그 성격이 변할 리 없다. (p. 172)

산을 오르며 깨달았다. 나에겐 언제나 변명이 많았음을. (p. 252)

 

책은 물론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작은 위로를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자 김규리 스스로가 책을 냄으로써 느낀 만족과 행복이다. 그래. 그녀는 이 책으로 인해 조금 더 행복해졌을 것 같다. 그럼 됐다.

 

 

내가 이른 아침에 너를 찾아가도, 내가 늦은 밤에 너를 찾아가도, 이유는 묻지 말고 반갑게 나를 맞아주면 좋겠어. 이유가 중요하지만, 이유가 중요하지 않은 날도 있지. 내가 울고 있거든, 내가 웃고 있거든, 나를 꼭 안아줘.

그래주면 나는 그냥 기분이 좋아질 거야. (박광수, <앗싸라비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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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 나남문학번역선 12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정혜자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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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썼다는 사실이 놀라운,
그러나 일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
 
 
한 장 한 장 쉽사리 넘길 수 없는 무거운 소설이다.
3일간 꼬박 밤을 지새워가며 눈시울이 붉혀졌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애틋하고 억울하기를 몇번이나 겪어야 했는지 모른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십여 년 전 일본인 작가가 쓴 식민지 조선인 강제징용에 관해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수의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우리나라 간 역사문제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선뜻 책장을 열기까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몇 장을 읽기도 전에 보통의 일본인 시선이라 믿기 힘든 만큼의 죄의식과 고달픈 우리 선조의 당시 묘사에 넋을 잃었다. 저자의 실제 의식에 어떠한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책 속에서 만큼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소수의 일본인이었다. 어째서 이십 년이나 흐른 지금에서야 이 책이 한국어로 번안 출간되었는지 무척 안타깝다. 동시에 이제라도 이 책을 발견해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 나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1943년 가을 어느 화창한 날의 급작스러운 강제 징용으로 일본의 탄광 노동자로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지옥에서 끝없이 탈출하고자 했던 조선인들, 해방 이후 여전히 가난하기만 했던 조선, 그리고 또 한 번의 비극 한국전쟁, 제주 4.3사건과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의 삶까지. 그야말로 우리 역사 속 손꼽히는 모든 비극들이 일본작가에 의해 세세하게 그려진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에 눈을 감고 타국을 유린했던 흔적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려 했다. 그들은 지금, 죽은 자 위에 구축된 역사를 말살하려고 한다. 나는 죽은 이들의 역사를 지켜 그들의 절규를 우리 세대에 전하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세 번째로 대한해협을 건넌 이유이다.
17세 소년이었던 주인공 하시근이 40여 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널 결심을 하기까지 그의 삶은 오롯한 그의 것이 아니었다. 폐석산에 두고 온 동료 조선인들의 피와 넋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생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는 그 날 그는 비로소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세계 역사 속 모든 비극은 근원이 같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쩌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 것인지, 심지어 조선인이 조선인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왜 꼭 그랬어야만 하는지.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재일 한국인 환자들과 심층적으로 만난 결과물로 <해협>이라는 대단한 한국 역사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일본인이기에 쓸 수 있었던 내용까지, 잔인한 비극들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붙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아버지. 연락하려 해도 한국과 일본이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두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 나라일지도 모르지요." (p. 248)
 
 
독일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끊임없이 역사를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자신의 행위에 눈을 감고 타국을 유린했던 역사의 흔적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려 했다. 한민족에게 '열등민족'이라는 낙인을 찍고 무력침략과 경제적 착취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추진했으며,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근거지로 한민족의 저항에 폭력과 탄압을 계속 자행한 일본. 5천년의 역사와 함께 고유 글자마저 폐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성과 이름까지 강제로 개명시켰던 일본.
그러한 과거의 일본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일본인의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까.
...
'모든 원한은 강물에 흘려버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피해를 입은 쪽에서 할 말이지 가해자가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p. 64)
 
우리는 미래에서 배울 수는 없다. 과거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다. (p. 65)

 

그리고 그들의 애처로운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배 곯고 얻어맞고 우리는
지옥에서 석탄을 캔다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라가 명을 다해 나라를 도둑맞고
우리는 가축 같은 삶을 산다오
... (p. 144-145)
 
 
 
*오탈자?
p.132 / 12번째 줄 / "기쿠지 빈장님." -> "기쿠지 반장님."
p.400 / 16번째 줄 / 남자로써 그 이상의 모욕은 없어. -> 남자로서 그 이상의 모욕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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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송한나의 뮤지엄 스토리 -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황학동 도깨비 시장까지
송한나 지음 / 학고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당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았습니까?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많은 한국인들이 놀랍게도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박물관을 비롯한 세계적인 박물관에 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아직' 못 가본 사람이 많다. 나 역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자연사 박물관,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뮤지엄, 피츠버그 앤디 워홀 뮤지엄 등 미국을 비롯한 해외여행 시 투어 리스트에 유명 박물관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국립중앙박물관조차 가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에서야 아니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던 얼마 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발걸음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도. 가야 할 데가 많다!!

 

사실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영상 자료, 소장품의 정보화, 박물관 종합정보시스템 등 첨단 유비쿼터스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행사도 연중 끊이지 않는다. 2010년에는 세계 박물관 중 관람객 수 아시아 1, 세계 10위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p. 106)

이처럼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 혹시 나와 같이 안타깝게도 아직 못 가본 분들이 계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다녀오기를 권한다.

 

 

 

세상의 모든 박물관은 나란 존재가 오늘 여기에 있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잘 찾아보면 그곳에 숨어 있던 내가 보인다. 세상에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과연 누가 지루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박물관은 주인공은 유물이 아닌 인류, 곧 나다.

이 책에 나오는 박물관은 모두 내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걸었던 곳이다. 국가대표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부터 수도박물관 같은 작은 박물관까지 각각의 박물관에 깃든 재밋거리를 찾아 소개하고자 했다. 공공미술작품이 놓인 거리도, 북적이는 시장도 소중한 삶의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박물관은 세상을 담고 세상은 박물관을 닮아간다. (머리말)

 

 

<큐레이터 송한나의 뮤지엄 스토리>는 국내 주요 박물관을 비롯해 작은 박물관, 거리의 공공미술작품, 해외 이색 박물관, 본받을만한 다채로운 박물관들을 소개해 준다.

 

처음 소개되는 박물관은 2012년 5월 문을 연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다.

몇 년 전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할머니들의 수요시위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교 과제때문에 고작 한 번 갔던 것이지만, 피해 할머니들은 1992년 1월부터 현재까지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온갖 궂은 날씨에도 매주 수요일이면 휠체어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라도 모인다. 열다섯,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감당치 못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 진실을 위해, 또 미래 평화를 위해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그녀들.

큐레이터의 어원인 라틴어 쿠라cura’돌봄, 치유라는 뜻이다. 좀 아득하지만 무척 사랑스럽고매력적인 어원이라고 생각한다. (p. 15)


어렸을 적 <안네의 일기>를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세계 역사 중 가장 끔찍한 그 일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열세 살 안네, 또래인 그녀의 일기를 읽으며 웃기도 울기도 참 많이 했다.

이후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에 적지 않은 관심이 생겼고 혼자 미국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 이렇게 많은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는 줄은 몰랐다.

 

다윗의 방패라는 의미이자 유대인 공동체의 상징인 다비드 별 뒤로 유대인을 기리는 시와 히브리어로 잊지 말아라라는 말이 새겨진 기념관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여러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답사한터라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라는 단어에는 나름의 절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새로운 세대가 70여 년 전의 사건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세계 곳곳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2,600개 이상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지를 새기며 관람을 준비했다. (p. 34)

 

박물관은 단순히 기억을 보존하는 곳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화석화된 역사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기억을 넘어 기억하는 행위까지 담기 위해 애쓰는 쇼아 기념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p. 40)


외국인들은 한국을 여행할 때 필수 코스로 판문점과 DMZ박물관을 방문한다고 한다. 한국인들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국'에 대해 더 관심이 지대한 외국인들.

군대에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6 25일이면 어김없이 방송되는 6.25전쟁에 대한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도, 북녘 땅의 가족을 찾는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면서도 나는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분단된 땅에서 태어나 일생을 살아온 내게 6.25전쟁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p. 83-85)

 

나 또한 평소 우리나라가 휴전상태이며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때로 외국인이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제서야 '아... 그렇구나... 무서울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한국 관광을 온 외국인들보다 사실은 더 안 가본데 많고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참 가보아야 할 곳이 많다...

 

그렇다고 이 책에 전쟁과 같은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박물관만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내 꼭지 박물관이나 해외 셜록홈즈 박물관 같은 귀여운 곳도 많고, 공공 예술 작품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일명 ‘1퍼센트 법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우리나라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화·조각·공예 등 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문화예술진흥법 제2 9).

거리의 조형물은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작품이라는 것을 깜빡 잊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은 거리에 생기와 표정을 불어 넣어주는 일상 속의 예술 작품이다. (p. 113)

 

<큐레이터 송한나의 뮤지엄 스토리>는 단순히 박물관 안내서가 아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어쩌면 지루한 안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히 얘기하자면 저자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도 상당한 재주가 있다. 에세이 같은 면도 이 책을 읽으며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큰 요소다.

 

박물관은 인류가 남긴 흔적을 모아 공공의 기억을 만드는 공간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순간도 언젠가는 박물관의 한 부분을 이룰 것이다. ‘박물관 같은 삶을 산다는 게 별건가. 나날의 삶을 의미 있는 기억으로 채워나가는 일이다. 그런 박물관 하나쯤 가진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p.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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