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와 거기 - GQ 에디터 장우철이 하필 그날 마주친 계절과 생각과 이름들
장우철 지음 / 난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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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 4월, 버드나무, 앤트위프, 이소라, 곶자왈, 논산, 애니멀 콜렉티브, 파초, 홍상수의 여름영화들, 어제 내린 눈, 동영배의 봄, 산 세바스티안, 백화등, 엠/엠 파리, 루 뒤몽, 권부문에게 중요한 것, 암스테르담, <무서록>, 한니발 렉터, 머스크, 층운과 적운, 푸른빛과 싸우다, 드리스 반노튼, 선암사, 캠벨얼리, 나쓰메 소세키의 남자 주인공, 엄마와 금강에, 베를린, 설국, 포의풍류도, 밤섬, 농부 홍순영, 김녕, 파리, 에릭 로메르의 묘비, 진도, 그 이름 나미, 하얏트 로비를 걷는 몇 초, 런던, 뱅크스 바이올렛, 모임별의 연주회, 서울 택시, 긴자, 괴산, 평양, 능소화는 언제 피는 꽃이었나, 비치 보이스, 이화동, 으름...

 

책을 받아들고 바로 외출 가방에 넣었다.
왠지 잠자리에선 개연성있는 소설을, 지하철이나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짜투리 시간에는 에세이를 보겠다는 습관이 나도 모르는새 자리잡았다. 그러나 다음날 외출에서 몇 장을 읽고는 일주일이 넘도록 가방에 그저 넣고만 다녔다. <여기와 저기> 'GQ 에디터 장우철이 하필 그날 마주친 계절과 생각과 이름들'이라는 부제인 이 책의 첫느낌은 정말 두서없는 여기와 저기에서 여기 저기의 사진들과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이었다. 평소 에세이를 즐겨 읽지만 이번 책은 다른 책들과 꽤 다른 읽을거리였다. 호기심이 급감했고 왜 이 책을 선택했을까 후회도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책을 뒤적이면 공감하는 글귀가 자주 얼핏 보였기에 다시 손에 들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여전히 저자의 의도를 이리저리 추리해보지만 역시 몰랐었다.

 

봄밤 이후로 마음이 움직였다. 몇년 전의 기록 먼곳에서의 기록 낯선 이의 이름이 문득, 이소라 그녀를 연상케하듯 모든 날들이 오늘이 되어버린다. 역사와 지금이 맞물리고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미아동이 아니고 이화동 삼거리에 살거나 살았거나 한 70, 80년대의 오늘 이야기에 백발을 상상했지만 추리해보니 3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저자가GQ에디터로서 그리고 지극히 개인으로서 그 동안 살아온 지금들.
세상 모든 것들은 따로따로 있지 않음을 알았다..... 거기에 있는 것과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어떻게든 이어져 있었다..... 모두 여기 있으므로, 추억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기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책 뒷표지에 쓰인 글귀를 정말 책을 덮는 순간 공감했다. 이소라의 현재주의처럼 바로 지금.

 

 

사랑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지겹지 않을까요?
아니요, 사실 오늘 죽잖아요. 내일 죽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내 임종의 순간은 오늘이란 말이에요. 제가 서른일곱이지만, 지금을 살고 있지만, 결국엔 나 죽는 날도 분명히 오늘일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럼 너무 빠른거야. 사랑이고 이별이고 그런 거. 한낱 이별 나부랭이. (p. 50 봄 - 겨울, 이소라)

 

 

책의 편집이며 디자인도 심상치 않다. 여백이 적은 가득차 보이는 텍스트에 어떤 쪽은 양쪽 페이지가 가운데 정렬을 해놓은 듯한 낯설은 배열. 사진마저도 수년전부터 최근까지 여기와 저기의 사진이 두서 없이 담겨 있다. 결코 잘 찍은 것 같지만도 않은 사진들까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마지막 봄'이라는 챕터. 가끔 정말 어울리지 않거나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마지막 부분 태양의 인터뷰...
특히 좋았던 부분들은 낙서. 지금의 순간들을 엮은 책이어서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문구가 많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왜 <여기와 거기>가 끌렸는지 알았다. 뭔가 특별하다!


이태 전 동짓달엔 한남동 리움에서 오원 장승업이 그린 <매화도>를 봤다. 글쎄, '봤다'는 만족스런 서술이 아니다. '느꼈다'는 의미로는 옳으나 얕아서 퇴짜. 그때를 기록하는 제법 합당한 말은 '오원 장승업의 <매화도> 앞에 섰다'이다. 서 있었다. 다가가지 못했다. 연신 서로의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장어들이 그럴까? '장승업은 미쳤구나.' 그날의 감상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p. 68 봄 -그러나 우리는 매화를 보지 못하고)

 

소나무숲이나 느티나무 아래서도 같았나? 매화에겐 쉽지 않은 기품이 있다. 밑동부터 덩치를 불리고 보는 여느 고목나무들과 달리 처음 심을 때부터 그랬을 것 같은 알뜰한 몸매는 매화만의 소신이다. 620년 세월이 무색하도록 여위웠지만 놀랍도록 섬세한 밀도가 그 여윔의 배후다. 엉킨 가지의 율동이고 북실북실 이끼를 키우는 아량이고 어느 방향에서든 균형을 거스르지 않는 고고함이다. (p. 71 봄 -
그러나 우리는 매화를 보지 못하고)

 

소세키 소설 속 남자들의 걸음걸이를 안다.

시계를 차고
대문을 나서
모퉁이를 간략히 돌아
대로를 만나
전차가 지나도록 기다리고는
언덕길을 오르며
생각하며
생각인 줄 모르고 생각하며
수많은 감촉을 실은 간직하며
손길이 집요한 정원이 딸린 집으로 들어서는 그의 이름을 하마터면 부를 뻔했다.
도쿄는 한여름이었다. (p. 79 여름 - 夏目)

 

 

 

1989년 서대전역 앞 삼성아파트 31평형 12층에서 사촌누나는 인켈 전축에서 나오는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를 등나무 소파에 파묻혀 듣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포즈라고 생각했다. (p. 83 여름 - 낙서 - 여름방학)

 

아름다울 텐가요?
이것은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스물여섯 살 송철이 형이 썼던 시에 들어 있던 말. 그 시의 제목이 '제비집이 있는 집'이었는지, <생각하는 나무> 연작 중 하나였는지, 나는 1994년의 내가 아니라서 그만 잊고 말았다. 어느 밤 형에게 "형 그 시 제목이 뭐였죠?" 물어서 <은사시나무>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걸로 해둔다. 어떤 것들은 그런 채로도 따뜻해서, 열고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p. 87 여름 - 낙서 - 아름다울 텐가요?)

 

우연히 평원석 하나를 보기 전까지, 세계는 없었다. 가로 80센티미터쯤 되는 검은 수반에 금빛 모래를 자리 삼아 놓인 평원석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모양의 돌을 평원석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돌의 넓음과 그 돌의 맑음과 그 돌의 단단함과 그 돌의 고요를 느끼고 말았다. 수석은 형, 질, 색, 크기, 그 밖에도 밑모양이니 물씻김이니 하는 용어에 갖가지 분류와 감상 방식까지, 돌멩이 하나로부터 꽤나 '아저씨풍으로다가' 번다해 보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돌을 대하는 마음이다. 마우스 옆에 단단한 돌 하나를 두고 거기에 손을 올리고 쉬면 얼마나 호젓한지,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p. 89 여름 - 낙서 - 수석)

 

"비라는 글자는 정말 비같이 생겼고, 숲은 진짜 숲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는 호랑이도 호랑이 같던데요?"
연애의 말들. (p. 91 여름 - 낙서 - 스물아홉)

 

상허 선생이 이웃에 계셔서 밤에 앵두 한 대접 들고 찾아가는 일을 <무서록>을 펼칠 때마다 그려도 본다. 이태준은 여름에 생각난다. 겨울엔 어김없이 기형도가 그렇듯이. 올여름을 지나면서는 이태준과 더불어 청장관 이덕무의 수필을 또한 읽었다. 18세기의 조선 선비 이덕무의 책 제목은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이었다. 온종일 정자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 그게 참 좋았더랬다. (p. 92 여름 - 낙서 - 상허와 청장관)

 

돌을 바꿔치기 한다. 거제도에서 주운 돌을 섬진강변에 놓기도 하고, 인제에서 주운 돌로 예산저수지에서 물수제비를 뜬다.
일어나자마자 한껏 차려입고 경주 석굴암에 간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차려입고 노을을 맞는다. (p. 112 여름 - 여름이 오면 너에게 가지 않고)

 

이상 <권태> 1977, 동서문화사

이상은 스물여덟에 죽었다. 도쿄에서. <권태>의 이상은 계속 거처를 바꾼다. 산촌에선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져서는 간신히 도회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도시에선 더 큰 것에 대한 욕망과 적개심과 동경으로 치닫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어서 겪어야 할 것이 별만큼인데, 밤하늘을 쳐다보면 별의 말도 들린다. 하여 그는 괴로운가? 행여 행복한가? 이상의 시와 소설이 어떻게 해서든 극단이라면 수필은 그림자와 같다. <권태>를 읽으면 이상에 대한 이상한 선입견이 증발하지만 대신 불안이 온다. 얼굴이 굳는다. 어쩔 수 없이. (p. 158 가을 - 내 책은 오래되었으나)

 

인터뷰의 본질은 아마도 누군가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의 실상은 한바탕 소동극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마저 왜곡된 소동극. (p. 233 겨울 - 인터뷰 그까짓 것)

 

마지막 봄이라면
올해가 마지막 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한다
있었던 일과
했던 말
누워서 달력을 보면
밤과 낮이 동시에 있었다 (p. 315 마지막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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