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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가끔 그런 책이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부터 이 책은 분명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 작가의 9주기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6년부터 2010년까지 출간된 소설, 산문, 동화에 수록된 서문과 발문, 작가의 말 67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2019년,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29명의 소설가들이 써내려간 단편들이 담긴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수록된 글 하나하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후배 작가들의 작가에 대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해서 더욱 한문장 한문장 음미하며 읽어나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멜랑콜리 해피엔딩이 다른 작가들을 통해 박완서 작가를 떠오르게 한다면, 이번 책은 ‘작가의 말’을 통해 40년의 작가인생 동안 만들어온 그의 작품세계와 삶에 대한 생각들이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듯 했다.
서문과 발문만을 모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고 감동적일 줄을 몰랐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을 상상해보게 되고, 예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애정과 만들어지기까지 노력, 쌓여 가는 충실한 삶의 시간들이 오롯이 담겨있는 작가의 말들이 정감 있고 솔직하게 다가온다.
데뷔작인 ‘나목’의 1976년, 1985년, 1990년 재출간된 발문들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첫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작품의 재출간, 개정판의 각 서문, 발문을 연대별로 모은 구성은 작품을 처음 썼던 과거와 같으면서도 달라진 작가의 감정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이 볼 수 있게 해주어 좋았다. 무엇보다 소설전집을 비롯하여 '나목'뿐만 아니라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같이 여러번 재출간되어 다양한 작가의 말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오랜시간 꾸준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때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거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하고도 달랐다.
그 시기를 발광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정신의 숨구멍이었고, 혼자만 본 자의 의무감이었다. (P47, 목마른 계절[1987년] - 발문)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집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이 있고, 그 일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나는 그들을 보살피고 기다리는 게 전부고 그 일이나마 하루하루 놓쳐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나도 뭔가 나만의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같이 열정적인 여자가 계속 그 일정을 가족에게만 쏟는다면 종당엔 가족관계를 지옥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P39, 창밖은 봄[1977년] - 서문)
1997년 출간된 소설집 ‘창밖은 봄’의 작가의 말 <작가 자신이 쓴 박완서 연보>에는 쓸쓸한 어린 시절부터 전쟁, 결혼, 출산, 여성, 어머니, 작가로서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풀어나가는 자신의 연보는 그의 작품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슬프고 기쁘고 쓸쓸하고 따뜻하다.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2010년 여름에 출간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서문에 담긴 한 문장이 마음속에 남는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 40년의 작가로서의 인생 마지막 인사말은 여전히 한없이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