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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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려심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난 전 인류의 장대한 유대를 주목하라.
누구나 졸릴 때는 졸리다.
잠자라, 폼포코 가면. 잠자라.
정의의 사도니까 게으르면 안 된다고 대체 누가 정했어?‘ (P324)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라니. 게으름뱅이에게 모험이란 행복을 방해할 무시무시한 사건이다. 심지어 주인공인 ‘고와다’는 보통의 게으름뱅이가 아니다. 게으름 때문에 너무나도 바쁜 거룩한 게으름뱅이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 기숙사 방에서 에어컨을 켜고 ‘장래에 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개정하며 뒹구는 고와다의 행복한 주말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너구리 가면과 시대착오적 검은 망토를 걸치고 교토 거리에 나타난 정의의 사도 폼포코 가면이다. 괴이한 차림때문에 등장 초기에는 교토 시민들의 신고로 경찰에게 쫓기기 일수였지만,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교토 어디든 달려가 도움의 손을 내미는 그는 이제 어엿한 인기 있는 정의의 사도로 자리 잡았다.
이 이야기는 개인적 사정으로 고와다에게 영웅 2대를 물려주려는 폼포코 가면과 게으른 주말을 지키기 위한 고와다, 그 주위 사람들의 교토 기온 축제 요이야마가 열리는 어느 토요일 하루의 기록이다.

제목과는 다르게 고와다는 주인공이라는 타이들을 달고 있으면서도 책 페이지 절반이 지나도록 국수가게 한쪽 광 방석 위에서 수상가옥 누워 한손에 망고프라프치노를 들고 바캉스를 즐기는 꿈속에 빠져 있고, 정작 이제 은퇴를 준비하려던 폼포코 가면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쫒는 덴구브란 유통업체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쫓기며 모험 중이다. 내면의 게으름뱅이에게 지지 않으려는 투쟁도 곁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폼포코 가면에게 납치되어 하루가 시작된 고와다의 주말 하루가 그렇게 행복한 게으름 속에서 끝날 리가 없다. 지옥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무간국수 축제, 타인의 행복을 소소한 악행으로 불행을 만들고자하는 대일본침전당과 덴구브란의 폼포코 가면 습격사건에 이어 너구리 신 하치베묘진까지 등장까지 정신없는 하루가 펼쳐진다. 내 자신도 그리 부지런한 편이 아니기 때문인지, 어느샌가 게으름을 사수하려는 고와다를 응원하고 있다.

“있잖아, ‘굴러가는 돌맹이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말 알아?”
“압니다.”
“다시 말해 부지런해지자는 거야. 알겠어?”
“....좀 더 이끼가 끼어 부드러워지겠습니다.” (P57)


게으름뱅이란 보통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능동적이고 보람찬 하루를 보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는가. 영웅도 자신 안에 게으름뱅이와 싸운다. 폼포코 가면도, 비밀조직의 수령 5대도 게으르고 싶어한다. 아무리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도 게으르고 싶을 때가 있지 않겠는가. 주말이 지나야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 마다 고와다의 대사에 점점 이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쯤 게을러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다. 이끼가 끼어 부드러워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말이다.

저자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을 처음 만난 것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였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자신도 마법과도 같은 환상적인 교토의 밤거리를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기온의 축제다.

게으름뱅이 고와다, 정의의 사도 폼포코 가면, 세상에서 가장 게으름뱅이 탐정 우라모토, 탐정의 조수이지만 미행 미숙, 방향치 주말탐정조수 다마가와, 충실한 휴일을 지향하는 온다, 모모키 커플, 비밀조직의 수령 알파카를 닮은 5대,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고와다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축제의 하루를 나도 함께 분주하게 보낸 느낌이다.

그래서 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나도 졸기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내면에 존재하는 그 게으름뱅이가 내 속에서도 꿈틀꿈틀 일어나고 있는 중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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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세상의 끝 포르투갈
길정현 지음 / 렛츠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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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유럽의 서쪽 끝, 포트 와인, 언젠가 꼭 한번 혼자서 훌쩍하고 떠나보고 싶은 곳. 나에게 포르투갈은 그런 곳이다. 언젠가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서유럽 가장 끝자락 ‘카보 다 호카’에 서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라는 상상만으로도 좀 더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책 속에는 화려한 색의 줄무늬 집들이 가능한 코스타 노바,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화려한 산타 마리아 다 비토리아 수도원이 있는 바탈랴, 세상의 끝이자 다른 세계로 출발하는 시작점인 카스카이스의 카보 다 호카, 천장이 아름다운 신트라궁이 존재하는 신트라 등 아름다운 도시들로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손꼽히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영감의 대상이 된 ‘렐루 서점’은 사진만 봐도 그 매력에 푹 빠져 버릴 것만 같다. 

 

 

책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흰 바탕에 파란색으로 다양한 문양과 그림이 그려진 포르투갈 특유의 타일 장식을 ‘아줄레주’라 부른다고 한다. 라퐁텐 우화 38가지가 그려진 아줄레주 시리즈가 보관된 상 비센테 지 포라 수도원이나 15세기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아줄레주가 전시된 아줄레주 박물관은 포르투갈을 여행하면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 되었다.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4분간 리스본을 덮친 대지진은 리스본을 독특한 도시로 만들어버린 듯 하다. 16세기 초 지어진 ‘콘세이상 벨랴 성당’은 성당의 한쪽 벽만 무사히 남아 그 벽은 그대로, 그 외에 다른 부분은 18세기 중반 복원되었다고 한다. 한 성당이 다른 시대가 공존하는 장소가 된다는 건 무척 특별한 느낌일 것이다.
반대로 ‘카무르 수도원’은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지붕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기둥, 뼈대만 남은 상태로 복원 중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현재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는 많은 화려한 성당이나 수도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여러 성당들 만큼이나 웅대한 뼈대만을 지켜낸 카무르 수도원을 꼭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 일까.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도시들과 저자의 생각들을 읽는 것만큼이나 초콜릿 컵에 담긴 포르투갈 전통 술 ‘진쟈’, 다양한 요리들, 케이스가 화려한 통조림들, 포르투갈의 상징인 ‘바르셀루스의 닭’, 익숙하면서도 낮선 ‘라퐁텐 우화’, 참고하기 좋은 쇼핑 리스트 등이 담긴 책 중간 중간 삽입된 ‘여행자의 노트’도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여행 에세이를 읽다 보면 같은 장소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감정상태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회사 일과 사람에 지쳐 타인의 소리조차 거부했던 저자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멀고, 사람이 적고, 새로운 것들이 많은 곳을 찾아 포르투갈로 떠났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여행의 시작은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충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나에게도 역시 포르투갈은 언젠가 꼭 가 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 여행이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고 싶은 그런 나라이기 때문인지 여행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일상에 지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항상 여행이다. 언젠가 소중히 아껴두던 포르투갈로 떠나는 날이 오면 이 책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 같다.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사실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면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걸 일일이 다 따지면서 산다는 건 어쩌면 피곤한 일이지만, 아예 분별 자체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버거이든 샌드위치이든 그런 건 소소한 일이고 별 중요한 게 아니지만, 적어도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정도는 생각하며 살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 정도 피곤함은 기꺼이 감수해야 할 일이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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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잡학사전 - 우리말 속뜻 사전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이재운 지음 / 노마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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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아두고 자주 꺼내 보게 될 것 같은 책을 만났다.
분명히 잘 알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단어의 의미를 타인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사실은 어디에 어원을 두고 있는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사용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이 책은 그런 궁금했던 부분들을 해결해주는 제목 그대로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말 사전이다.

1045개의 단어를 ‘ㄱ’에서 ‘ㅎ’까지 순서별로 그 단어들의 본 뜻, 바뀐 뜻, 보기글로 구성 되어 있고, 앞 페이지의 목차 이외에도 맨 마지막 부분에 ‘찾아보기’로 찾고 싶은 단어를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가 되어 있어서, 책의 제목처럼 사전을 읽는 느낌을 준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휘뿐만 아니라, 은어, 비속어, ‘확실히, 진실로’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아멘’ 같은 종교적 언어나 샌드위치, 유토피아 같은 외래어도 수록되어 있어 다양한 어휘를 만날 수 있다.

은어, 비속어를 포함한 이유는 그 단어의 본래 의미를 알게 되면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병할 놈’이라는 단어의 ‘염병’은 장티푸스를 의미하는 말로 ‘염병을 알아서 죽을 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의미를 알게 되니 타인에게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단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무지란 무의식으로 타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비속어가 아니더라도 의외로 무서운 뜻이 담겨져 있는 단어들도 많았다. 종종 사용하곤 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의 ‘도무지’의 기원인 ‘도모지’는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발라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죽이는 조선시대 형벌이라고 한다. 말의 기원을 알고 보니 ‘정말 어찌할 수도 없다’라는 지금의 의미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도루묵’이나 ‘퉁맞다’ 같은 단어에서 연상되는 의미와는 다른 재미있는 유래를 가지고 있는 어휘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홍두깨’, ‘빼도 박도 못하다’같은 어휘들이 예상외로 많아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가관이다’처럼 ‘볼 만 하다’라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는 남을 비웃을 때 많이 사용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해버린, 본래의 의미와 현재 사용하는 의미가 상반되게 바뀐 어휘들도 있다. 언어란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현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어떤 의미에서 태어난 것인지를 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처음 타인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많은 부분 판단하게 된다. 말은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통로다. 나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말에 평소 너무 관심 없이 소홀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과도 같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단어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다. 말에 담긴 유래나 본래의 의미가 평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이렇게나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번 봐서 이 책에 담겨있는 모든 단어의 뜻을 기억할 순 없지만, 생각날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자주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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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필립 마티작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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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독특하고 신선한 로마사가 찾아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왕과 영웅들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정도 전 14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어느 여름 로마의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제빵사, 세탁부, 술집 여주인, 무역업을 하는 상인, 후견인의 눈치를 보는 상원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니 무척 유쾌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여섯 번째 시간인 00:00~01:00 모두 잠든 밤을 책임지는 순찰대원을 시작으로
02:00~03:00 로마의 아침식사를 책임지는 제빵사,
06:00~07:00 길바닥 수업이 싫은 남학생,
10:00~11:00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선언하는 소녀,
17:00~18:00 마음의 평정을 잃은 요리사,
22:00~23:00 환호 속에 검을 뽐내는 검투사를 거쳐
마지막 자정 23:00~00:00 기꺼이 오락거리가 되어 주는 식객까지 하루 24시간 24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로마인의 이야기가 합쳐져 로마라는 거대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진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고고학, 역사적 사실 등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만들어져 각각의 인물들이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 24명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개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재미있는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네로 황제가 일으켰다고 잘못 알려진 로마 대화재 같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 고대 로마 철학자, 역사가들이 남긴 저서에 담긴 글, 시들이 내용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있어서 현실감을 더해준다. 

로마에서 자정은 밤의 여섯 번째 시간이라고 불렸다. 이야기는 깊은 밤 치안유지와 화재예방에 힘쓰는 야간 순찰대원이 근무에서 시작된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상거래가 많이 이루어지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더욱 화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큰 재앙이었다고 한다. ‘방화범'은 로마인들에게 최악의 욕설이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로마법은 현재 서양과 그 영향을 받은 많은 나라들의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2000천 년 전 로마에는 이미 범죄, 상업 뿐 아니라 매춘업, 세탁업 등에 대해서도 법률과 세금이 정해져있고,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조사하는 법학자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벌써 소방차나, 알람시계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해의 길이에 따라 시간을 조정하고, 물시계를 이용하여 원하는 시간에 소리를 나게 하는 ‘클렙시드라’라고 불리우는 알람시계가 관공서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이 주문하여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 로마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시대의 로마와 현재. 2000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공부 하기 싫어하고, 상원의원은 자신보다 더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후원자의 눈치를 보고, 연애에 빠진 소녀는 바람을 피운 남자친구에게 상처를 받으며, 술집에서는 즐거움과 소란스러움이 공존한다. 장이 서는 날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수레들로 인해 교통 정체가 일어나고, 학생들은 받아쓰기를 틀리면 체벌을 받는다. 상인, 세탁부, 요리사, 석공. 모두 자기 직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읽는 내내 생생하게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평소 역사를 어려워했던 사람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 하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다룬 책이 로마 뿐만 아니라 나라 별, 시대별로 많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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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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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타인에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또한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외국어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집’과 'My home' 같은 단어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공동체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 같은 국가 별 문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언어를 자의가 아닌 이유로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자신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에게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로 친숙한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 은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잃고 문맹이 되어버린 작가가 프랑스어를 새로 배우고 다시 글을 쓰게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질병과도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읽기와 쓰기에 몰두하던 그녀는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모국 헝가리에서 썼던 시와 글들을 모두 두고 남편과 갓난 아이, 그리고 사전이 든 가방만을 들고 스위스로 망명을 하게되고, 프랑스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다.
학습이나 취미가 아닌 삶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어의 상실과 탄생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의 글은 그래서인지 작고 가벼운 책의 크기에 비해 무척 무겁다.

간결한 문장 속에 담긴 책 속 그녀의 이야기는 항상 현재형이다.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P9)

'시작‘
네 살의 그녀는 ‘읽는다’라는 전쟁을 이제 막 시작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P112-113)

그리고 문맹이 된 그녀는 새로운 언어와 함께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 망명길 속에서도 그녀는 사전과 함께였고, 이제 또 다른 사전과 사랑에 빠졌다. 조국을 잃고, 언어를 잃었지만, 공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소리에 운율을 맞추어 그녀는 이제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와 함께 사전을 손에 들고 언어를 배워나간다. 소설과, 희곡들. 그녀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태어난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작가들처럼 글을 쓰진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의 고통에 무릎 꿇지 않고, 사랑하는 언어의 상실을 이겨낸 그녀의 글은 간결하지만 큰 울림으로 내 마음속을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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