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는가 - 지구 끝에서도 살아남는 작고 여린 잎에 숨은 강인함에 대하여
곽준명 지음 / 현대지성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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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현대지성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성실히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동물은 스스로 느끼고 또 반응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다. 그에 비해 식물에 대해서는 동물에 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덜하다. 자신의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태양이 비치는 곳을 향하거나, 자연환경에 따라 스스로 모습을 조금씩 바꾸는 정도의 식물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식물도 생생히 느끼고,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과거의 일을 기억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 _ 저자 소개>

생명공학을 전공한 곽준명 저자는 처음부터 식물에 관심이 있기보다 동물에 더 흥미를 느꼈다. 제약회사에 들어가 약을 개발하는 연구원이었던 저자는 '동물실험'이라는 난관에 봉착한다. 동물의 생명을 끊지 않는 연구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결국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식물을 이용한 분자유전학으로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동물들처럼 뇌도 신경망도 없고, 말을 할 줄 모르는 식물에 대해 연구할수록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_ 목차

1장 식물의 생존법

2장 대화하는 식물

3장 지구를 지키는 식물

4장 식물의 감각


책의 모든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나무나 식물 관련 책을 종종 읽어왔지만, 고다 아야 ⟪나무 ⟫ 와 같은 에세이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 책을 읽었기에, 식물의 생육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이 책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르던 지식을 쌓아가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했다.


예술 분야에 ⟪서양미술사 ⟫가 있고, 과학 분야에 칼 세이건의 ⟪ 코스모스 ⟫ 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식물분야에 이 책 ⟪ 식물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고 기억하는가 ⟫ 가 있다고 본다. 책의 맨 뒤에 <참고문현>의 방대함만 봐도 이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있다.



<_ 인상적이었던 부분들>


_ 피할 수 없는 가뭄, 물 부족을 이겨내는 식물


물 부족이 불러오는 문제는 비단 마실 물이 부족해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물이 부족해지면 결국 우리가 먹을 식량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밥이나 빵, 면처럼 우리가 주식으로 삼는 움식 대부분이 작물에서 온다. 고기와 유제품은 동물에서 얻지만 소나 돼지, 닭 등의 가축을 기르기 위한 사료의 주재료는 옥수수와 같은 작물이다. p.104


기후 위기와 이상 현상으로 미래에는 물 부족 사태가 초래할 것이고, 동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불가결하다. 작물이 자라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식량 고갈의 문제가 닥치게 된다. 생수조차 구하기 어려운 미래가 닥쳐올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자 막연히 불안한 미래이다.


하지만 식물연구를 통해서 앱시스산이 작용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다 보면 가뭄을 이겨내는 식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앱시스산 : 물이 부족할 때 식물의 대응 반응을 촉발하는 것으로 식물 호르몬의 일종이다. 기공 조절뿐 아니라 식물의 성장을 늦추거나 씨앗의 발달과 발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막연하기만 했던 미래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책을 통해서 희망을 엿보았다. 어딘가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식물과학자들의 연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읽은 옌롄커 작가의 ⟪ 연월일 ⟫ 이 생각나기도 했다. 가뭄으로 땅이 말라버려 작물 하나 자라지 않는 대지에서 강아지와 할아버지가 옥수수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 노력이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꼈다.


_ 뿌리가 사는 땅 속은 더 치열하다.


나는 막연히 땅 속은 평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 편견이 깨지게 된다.


땅 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인근에 자리 잡은 다른 식물들의 뿌리와 곤충,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까지 온갖 위협 요인이 득실거린다. 식물은 이 모든 위협을 피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물과 양분을 흡수해야 한다. p.148


식물은 땅속의 여러 위협요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화학물질을 만들어 내고 주위 한경을 자신에게 맞추고 조율한다. 그러기 위해서 '뿌리삼출물'을 방출하는데, 같은 종과는 서로 침범하지 않고 잘 지내고, 다른 종의 식물에게는 접근 금지 경고와 위협을 가한다.

뿌리도 의사를 표현한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각자가 살아내기 위해 힘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_ 식물도 과거를 기억한다


인간은 과거를 잘 기억한다. 그 과거가 좋은 기억일때보다 좋지 않았던 일이라면 잊혀지지 않고 심하면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한자리를 지키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식물에게 과거의 위협이나 스트레스는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가뭄이나 고온 혹은 물리적 충격이나 병원균의 공격 같은 스트레스를 경험한 식물은 그렇지 않은 식물보다 유사한 환경 스트레스에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p.175


그런데, 뇌가 없는 식물은 어떤 식으로 기억할까. 책에서 말하기를, 식물의 학습은 모두 세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첫 번째는 단백질의 형태로 기억하고, 두 번째로는 DNA에 흔적을 남겨서 저장한다.


< 느낀 점>


책 안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실험에서 애기장대라는 모델 생명체를 사용하는 이유, 동물보다 더 정교한 식물의 알아차림, 뇌 없이도 판단하는 식물, 농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간을 공격하는 식물이란, 식물도 소리를 내는 점,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는 식물, 대기를 정화하는 식물, 등 다양하고 전문적인 지식들로 가득하여 읽는 내내 책을 통해 신비로운 식물의 세계를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기후 위기'에 따른 심각성과 식물을 통해서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중금속에 오염된 토양을 살릴 수 있거나, 가뭄을 이겨내거나, 영하의 날씨에도 얼지 않는 식물의 힘은 가시적으로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현 가능한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리고 작은 식물이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단단한 생명체라는 점이 경이로웠고, 큰 울림을 주었다.


나처럼 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한번 읽고 끝날 책이 아니라. 재독해야하는 책이다. 책을 덮고 식물이라는 생명이 더욱 소중하고 새롭게 다가왔다.


자그마한 몸집으로 큰일을 도맡은 식물의 미래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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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의 조건 : 야망은 큰데 왜 아직도 평범한가 ㅣ 세계척학전집 6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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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성실히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세계척학전집 책이 또 나왔다...!!!

여섯 번째 책이다.

5권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6권이 또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 좋은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세계척학전집 시리즈 중에서 이 책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를 초월자라 부른다.

자기를 넘어선 사람. 더 정확히는, 자기를 넘어서는 중인 사람이다. p.5


초월자는 반대 방향에서 출발한다. 그의 원점은 자신이다.남이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에서 시작하고, 남의 추락이 아니라 자기의 전진에서 가치를 길어올린다. p.32


책 제목의 '초월자'는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자기중심이 굳건한 사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다. 이 책은 '자기 극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 길은, [ 진단-해체-저항- 도약 ] 네 파트로 나눌 수 있고, 각 파트 안에는 6~8개의 챕터가 있다. 이번 책은 한 챕터를 읽고 나면, 한 달 동안 자기 자신을 관찰하라고 조언한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도 축적'이라는 문장에서 책의 진지함과 독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 세계척학전집 철학 편 ⟫에서도 나왔던 니체가 이번 책에서는 주를 이루고 있다. 니체 외에 24명의 사상가들의 핵심 내용이 있지만, 첫 챕터의 시작과 맨 마지막 마무리를 니체가 자리하고 있다. [ 니체의 르상티망], [ 니체의 위버멘쉬 ], 그리고 제일 마지막 [ 니체의 영원회귀 ] 이렇게 3챕터가 담겨있다.


< 강자는 바쁘다 VS 약자는 기억한다 >


책 속 예시 ) 일주일 전 다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그때 했어야 할 말들이 뒤늦게 줄줄이 떠오른다. (...) 며칠째 같은 장면을 재생한다.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p.23


"능동적인 인간에게 망각은 일종의 건강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 ⟫


책에서 든 예시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 일을 곱씹어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강자인 것이고, 초월자이다. 어제 받은 상처를 곱씹고, 다음날도 똑같은 생각을 계속한다면 약자인 것이다.


니체의 사상으로 저자는 쉽게 설명해 준다.

강자는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쁘고, 약자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느라 바쁘다.


<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


[ 에머슨의 자기 신뢰 ] 챕터에서도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에머슨의 ⟪ 자기신뢰 ⟫를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책을 덮은 적이 있다. (나는 책 중도 하차를 매우 잘한다.) 어려웠다. '모방은 자살이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핵심을 알지 못했고, 책이 어렵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에머슨을 이해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게 되었다.


책 속 예시 ) 어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다. 번뜩였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너무 단순해 보여서, 이미 누가 했을 것 같아서, 틀릴까 봐, 웃음거리가 될까봐.

오늘 뉴스에서 그 생각을 본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고, 찬사가 쏟아진다. 혁신적이고, 천재적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나도 어제 그 생각을 했는데,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부러움은 무지이고, 모방은 자살이다. 좋든 나쁘든 자기 몫을 받아들여야 한다. _ ⟪ 자기신뢰 ⟫



위의 예시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우리는 사회에서 늘 눈치를 보며 행동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종종 마주한다. 에머슨은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 다시 니체로 돌아가다. [ 영원회귀 ] >


마지막 챕터 [ 니체의 영원회귀 ]에서는 나의 고정된 생각의 틀이 바뀌는 통찰을 마주했다. 그 통찰은 깊은 울림을 주었고 순간 내면이 고요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당신의 삶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무한히 되풀이된다." p.366



니체는 어느 날 호숫가를 걷다가 위의 문장이 번개처럼 머릿속에 들었다고 한다. 이 생각에 압도된 니체는 며칠을 눈물을 흘렸다. 영원회귀라고 하는 이 사상은 가장 큰 긍정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고 책은 말한다. 똑같은 어제가 오늘, 그리고 매일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자.


초월자는 다시 살겠다고 말한다. 운명을 받아들인다. 보통의 사람은 영원회귀를 반가워하지 않고 몸서리쳐한다.


자기를 넘어서는 일은 더 나은 삶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삶을 영원히 원할 만큼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p.372



이 책의 저자는 니체의 방대한 책을 압축하여 쉽고 간략하게 핵심만 우리에게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가 두꺼운 니체의 수많은 책을 읽었다면, 그 핵심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우리의 수고를 덜어준다. 저자 이클립스의 어릴 적부터 계속된 책 사랑과 끊임없고 방대한 독서 습관으로, 이 책을 손에 든 내가 많은 시간을 아끼는 혜택을 보는 기분마저 든다.


위의 내용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리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려 해도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단 몇 페이지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책의 대부분의 예시가 나였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였다. 초월자가 아니기에 더 깊게 다가왔다. 깊은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파헤치는 기분이 들어,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만나기도 했다.


이 책은 평범한 우리라면, 살면서 실수도 종종 하는 우리라면,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초월자가 아니어도 좋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우리의 내면을 알아차리고, 자주 마주하고 돌아봄이 중요하다.


그래서 1독으로 덮어버리고 마는 책이 절대 아니었다. 읽고 또 읽고, 여러 번 읽어내야 내 것이 되는 책이었고,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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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개
엘리자베스 매켄지 지음, 김진희 옮김 / 비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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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비채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좋은 책 제공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현대의 삶은 날이 갈수록 완전무결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추구하는 분위기이다.

누군가의 작은 실수, 어설픈 행동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왜 그랬어? 제대로 했어야지."

"그런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야?"

라며 명확하고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시선들을 보낸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조금은 서툴고, 어딘가 어설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혀 완벽하지 않고, 싸우기보다 회피전략으로 맞선다.

그런데 허둥지둥 곳곳에서 여유가 묻어나고, 등장인물들의 너른 마음이 드러난다.


_ 줄거리


주인공 35살 페니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직장도 그만둔 상황에서 할머니가 사는 곳으로 오게 된다.그곳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쉼 없는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의사이신 할머니의 담당 회계사 버트 램피가 주인공을 마중나오고 둘 사이에 우정이 싹튼다. 어느 날 버트 램피가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고, 그의 동생 데일 램피와 만나게 된다. 둘 사이의 완벽하지 못했던 대화로 오해가 생기게 되기도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지속한다.


회계사 버트 램피와의 만남 이후 정해진 숙소는 사무실 바닥의 개털이 낭자한 침낭이고, 같이 타고 온 바다색의 차(이름 : 북쪽의 개)는 폐차 직전이다.

친어머니와 새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실종 상태이다.

주인공의 할머니는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고 한 성격하신다. 침입자를 바주카포로 보이는 무기로 위협하는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는 건 비밀작전을 펼칠 만큼 어렵고 정신 못 차릴 일이다.

인자한 할아버지는 재혼한 여성분의 제멋대로에 지쳐있고 손녀에게 와달라고 한다.

호주에 있는 동생은 오랜 기간 비어있는 덤불 같은 집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고 싶어 한다.


소설은 단 하루라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고, 엉망진창인 매일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하나를 막으면 또 다른 하나가 터진다.

좌충우돌, 허둥지둥, 동시다발

이 소설은 에피소드들이 알알이 꽉 채워져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 속 문장 >


"할머니의 어떤 점이 좋으신 건데요?"

"할머니는 독창적 사상가예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어리석은 짓은 용납하지 않으시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요. 그리고 황소처럼 강인하죠. 한 가지 알려줄게요. 당신도 할머니가 개에 뛰어오르는 걸 봐야 해요." p.23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때로는 나보다도 낯선 사람이 더 잘 안다는 사실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p.88


"셔먼,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그리고 너에게는 그 고된 시련에 맞설 기회가 있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아줄 필요는 없단다." p.223


기내에는 무려 여덟 명의 의사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 흥미진진한 상황에 저마다 한몫 거들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비행기 뒤편으로 몰려들었다. p.225


그날 저녁 잠시 나는 온전해진 듯했다. 심지어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삶은 내 주변에서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p.336


"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기 두려운 것 같아요."

"모른 채로 있는 것도 끔찍할 거예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으니까요." p.207


<  _ 감상평 >


블랙코미디의 장인으로 불리는 작가이지만, '블랙'다운 분위기는 거의 느끼지 못하고, '코미디'적인 느낌을 정신없이 받아 웃었다.


웃음도 정신없고,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제대로 수습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마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된다. 심각한 상황이 심각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하며, 독자로 하여금 여유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더 나아가 마지막에는 답답함보다 해방감을 불러온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이 책에서 많은 사건사고가 휘몰아치지만, 그 틈을 파고드는 따스한 빛줄기 같은 다정함과 서로를 향한 자비로운 마음이 담겨있다.

책은 말한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고, 조금 어설퍼도 괜찮다고.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또 그렇게 삶을 대하는 거라고.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빈틈없이 삭막한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함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다.


조금 부족한 나와 타인을 너그럽게 바라봐 주는 마음,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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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 ㅣ 세계문화전집 2
프란츠 카프카.에곤 실레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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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성실히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20대때 프란츠 카프카의 ⟪ 변신 ⟫ 을 읽고 이런 내용의 책이 고전문학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는 점이 무척이나 의야했다.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변신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서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젊었고 삶의 깊이를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나이가 들고, 내가 이 사회에서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고 나서야 이 책을 이해했고, 섬광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인생의 쓴맛을 겪고나서야 책이 토해내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때, 강렬하고 괴기스러웠다. 뒤틀린 자세와 검은 눈동자보다 흰자위가 많은 눈은 무섭게 다가오기도 했다. 옆눈길로 쳐다보는 ⟪ 꽈리 열매를 든 자화상 ⟫ 은 고독하고 외로워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서로 만난적은 없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작가와 화가의 이야기이다.


프란츠 카프카 ( 1883.07.03 ~1924. 06. 03 )

- 카프카의 내면에 불안으로 자리잡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숨죽였던 영혼.

- 죽을때까지 무명 작가 / 성실한 관료로 평생을 일하며 꾸준히 글을 썼다.

- 3번의 약혼은 모두 파혼으로 끝맺었고, 40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에곤 실레 ( 1890.06.12 ~1918.10.31 )

- 매독으로 고통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던 아버지는 정신착란으로 집의 재산을 불태워버린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실레의 내면은 뒤틀리고 변형된다.

- 21살에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고, 법정에서 그의 그림 한 점이 불태워졌다. 그 후,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된다.

- 그러나 아내가 임신 6개월에 스페인 독감에 걸려 아이도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실레도 사흘 뒤 같은 병으로 28살에 사망하고 만다.


이처럼 다른 듯하며, 닮은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우연히 이 책으로 만났다. 한 사람의 삶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여정을 번갈아가며 마주하게 된다. 그 여정에서 독자는 두 사람을 비교하기도하고 공통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_두 사람의 공통점 : 아버지라는 존재


저를 지배하는 이 무가치한 감정은 상당 부분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됩니다. p.43

실레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죽음', '뒤틀린 몸', '태아' 의 이미지는 이 가족사에서 출발합니다. 실레가 평생 그린 임산부와 아이,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그림들의 뿌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작된 - 정확히는 아버지의 매독에서 퍼져나간 - 죽음의 행렬이었다. p.73


프란츠 카프카는 평생 권위적인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에곤 실레는 어린나이에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공포를 본능적으로 몸에 익히고 배우게 되었다.


두려움과 공포는 한가지 공통된 형태로 마주하게 되는데, 두사람을 지배하는 요소가 바로 '불안' 이었다. <세계문화전집 1 헤르만 헤세와 반고흐 편>에서는 '안부'에 대해 물었다면, 이 책은 '불안'에 대해 말한다.


_두 사람에게 '불안'이란 무엇인가.


오늘을 사는 당신의 불안에 어떤 대답을 건네고 있습니까? p.315


당신 내면의 방에서 가장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321


두 사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안'입니다. 관료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카프카의 불안은 내면의 깊은 심연으로 파고 들었고, 실레의 불안은 뒤틀린 신체의 선을 통해 외부로 격렬하게 터져 나왔습니다. p.315



한 사람은 내면의 동요를 책으로 표출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내밀하다 쏟구치는 불안의 형태가 이처럼 좋은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나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또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없는 마음 속 소란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런 물음을 나에게 던지는 것 같았다.


' 당신의 불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불안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프란츠 카프카의 글과 에곤 실레의 여러 작품을 동시에 만나면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책에서는 또다른 물음을 던진다.

' 과연 나는 필요한 존재일까?'


두 사람의 마지막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둘 다 자기 자신을 평생 검열했고, 누군가로부터 검열당했고, 그러면서도 그 검열의 자리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p.376


이 책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 변신 ⟫이 수록되어있으며, ⟪ 관찰 ⟫ 이라는 작품, 그리고 카프카의 비밀노트도 만나볼 수 있다. ( 그리고 이 책의 작가 홍선기 단편소설도 수록되어있다 ) 카프카의 친구가 카프카의 유언을 거부한 덕분에 우리는 작가의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에곤 실레의 변형된 육체와 카프카의 ⟪ 변신 ⟫ 의 벌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언제든 그러한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글과 사진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카프카의 ⟪ 심판 ⟫에서는 에곤 실레가 감옥에 투옥되어 느낀 수치심과 억울함을 위로해주고 대변해주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인생의 부조리한 여러 상황들과 개인의 무력함을 그 누구보다 잘 표현한 카프카를 이 책을 통해서 더욱 깊고 친밀하게 만났다.


에곤 실레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예쁘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p.315


에곤실레의 이해할 수 없고 이기적인 선택들과 그의 왜곡되어 보이는 그림에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게 되기도 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안하고 원초적인 내면과 마주하는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완벽하지 않은 인물 그림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책에는 에곤 실레의 다소 투쟁적으로 느껴지는 '시와 편지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그의 성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이 이제껏 겪은 가장 폭력적인 시대를 살고 있어 - 온갖 가혹함에 익숙해져 버렸고 - 수십만이 비참하게 스러지고 있고 - 살든 죽든 저마다의 운명을 견텨내야 해 - (...) - 희망을 잃은 사람은 이미 죽어가는 쪽이야. - 삶이 무엇을 가져오든 견뎌낼 수 있어야 해. p.310


책을 읽어나가면서, 카프카가 바라본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진짜 모습을, 에곤 실레가 그대로 그린 것만 같았다. 반대로 에곤 실레가 그림에서 다 드러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프란츠 카프카가 소설에서 대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서, 이 책의 작가이신 소설가 홍선기님이 왜 두 인물을 한 권의 책에 담았는지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이 뜻깊었고, 좋은 작품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나 볼 수 있어서 책이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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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큐레이션 리커버) ㅣ 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큐레이션 리커버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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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


작년 결혼기념일 여행으로 경남 하동에 간 김에 < 박경리 문학관 > 을 방문했었다. 그때 그곳을 다녀오면서 '토지'를 읽어볼까 생각만 하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서평 모집에서 반갑게도 ⟪ 김약국의 딸 ⟫ 을 접하게 되면서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현재 박경리를 기리는 전시관은 총 3곳이 있다.

토지의 배경이었던 경남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경리 문학공원 >,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박경리 작가의 고향 통영에 <박경리 기념관>이 있다.


박경리의 작품들이 작가 자신의 삶이 많이 투영되어 있지만, 오늘 리뷰의 작품은 통영 지역에서 떠도는 설화를 기반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 김약국의 딸 ⟫ 은 1962년 출간되자마자 많은 사랑을 받았고, 다음 해 1963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864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대원군이 집권하는 시기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를 아우른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p.9


소설의 시작은 통영의 평화로운 전경에서 시작한다. 무척 평화로울 것 같은 도입부와는 상반되게도 소설의 비극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통영의 간창골 마을에는 세 형제가 살고 있다. 그중 김약국의 아버지 봉룡은 성질이 급하고 포악했으며 자신의 두 번째 처 숙정과 어린 아들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숙정을 잊지 못해 고향에서 욱이 도련님이 찾아오고 이를 본 남편 봉룡은 아내를 다그치며 매질을 한다. 봉룡은 화를 참지 못하고 욱을 살해하고 그의 처 숙정도 자결하고 만다. 어린 아들만 남은 이 집을 사람들은 '도깨비 집'이라 말하며 꺼려한다.


김약국은 어진 한실댁과 결혼하고 슬하에 딸 다섯을 둔다. 딸들은 저마다 성품이 다르다. 아들을 두지 못한 한실댁이지만, 딸 다섯을 성심껏 키운다.


첫째 딸 용숙은 욕심이 많고 성미가 고약한 면이 있고 잇속을 잘 챙겨 돈을 버는 재주가 있다.

둘째 딸 용빈은 머리가 좋고 지혜로워, 김약국이 의논할 일이 있을때마다 종종 둘째 딸과 상의한다.

셋째 딸 용란은 다섯 자매 중에서 가장 용모가 뛰어나지만, 말괄량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

넷째 딸 용옥은 인물은 제일 떨어지지만, 성심이 곱고 인내심도 강하며 살림도 알뜰히 잘한다.

막내딸 용혜는 어리광쟁이로 상냥하고 귀여운 면이 있다.


" 무자식 상팔자라더니, 자식이란 다 길러놔도 부모가 걱정하기는 마찬가질세. 눈어덕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집사람도 머리싸메고 드러눕고...." 극중 중구영감의 말처럼, 자식 많은 이 집에 어머니 한실댁은 매일매일이 전쟁같다. 한 자식을 챙기면 다른 자식이 일을 저지르고, 남편은 바깥일은 열심히 하지만 집안일에도 아내에게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다섯 딸을 예쁘게 키워 좋은 곳에 시집보내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 꿈꿔왔던 시간이 허망하게, 첫째 딸이 과부가 되면서 그 첫 희망이 무너졌다.


"맏딸이 잘 살아야 밑에 딸들이 잘 산다 카는데."

아들 형제밖에 없는 중구 영감의 부인 윤씨가 걱정을 했다. 한실댁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p.97


이처럼 중간중간 등장하는 불행을 암시하는 구절들에 읽는 내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각기 다른 인물의 특성과 그 성격처럼, 또는 그 고운 성심이 아깝고 애달픈 만큼 다섯딸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조금씩 따라붙는다.


"딸자식이라도 많아서 사위들이나 보믄 외롭잖을 줄 알았는데, 정말 뜻대로 안 되는구나." p.209


사람이 사는 곳에 외로움이 있다. p.415


소설에는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가진 인물들도 등장한다. 김약국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크게 감정이 동요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진 사람으로 칭송받지만, 아내에게는 끝없는 무관심과 차가운 태도를 보인다. 등장인물의 많은 만큼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흔히 주색에 빠지고 방탕함으로써 인생을 죄되게 보낸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탕아의 좌절 이상으로 죄악적인, 타인에 대한 무관심, 자기를 위한 성문을 굳게 지켜온 이기적인 김약국이 지금 자기의 육체가 허물어져 가는 마당에서 어떤 마음의 반려자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애써 지켜온 고독, 그 고독을 즐기기조차 했던 지난날에 비하여 너무나 비참하게 그 고독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p.390


책을 읽으면서, 한 번의 선택으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도 모질게 변해버릴 수 있음이 운명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족에게만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불운의 바람 앞에서 '운명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으로 운명이 바뀐 것인지,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선택에는 시대적인 환경이 크게 작용한다.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여성으로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조'개념과 희생.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지 못하고 억제해야 하고 강요받는 상황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몇 안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의 무서움이 소설에 잘 드러나있다.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밤새 다 읽었는데,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넷째 딸 용옥에게 생긴 일들이었다. 다른 인물들에게는 찾아보면 나름의 불행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만, 넷째 딸에게는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비극이 비켜가지 않고 오히려 세차게 불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 어머니 한실댁의 모습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하지만 소설은 힘든 시간을 딛고 일어서는 삶의 의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치던 바다가 잠잠해지고 햇살이 비치며 고요해져 오듯이, 거대한 불운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다르다는 것은 운명이 아니야. 나는 내 직업상 수없는 인간의 죽음을 보았어. 인간의 운명은 그 죽음이다. 늦거나 빠르거나 인간은 그 운명공동체 속에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꼭 같은 눈동자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말자." p.430


어떻습니까, 용빈 씨 혼자만이 비극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니죠." p.475


이 책을 20년, 아니 10년 전에 만 읽었어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2026년 현재 읽고 있는 나에게 그 옛날 사람들의 삶은 너무도 고단하게 다가온다. 개인이 느끼는 세밀한 감정이나 깊은 내면을 파고들 여지가 없었던 그 시절은 당장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만으로 벅차 보인다. 책에서도 요즘의 소설들과 차이점이 확연히 보인다. 개인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이런 점이 한국 현대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자 묘미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의 다양성과 여러 굵직하고 복잡하게 교차하는 사건들이 촘촘하게 얽혀서 독자들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481페이지의 책을 덮고 나니 자연스럽게 작가의 또다른 소설 ⟪ 토지 ⟫ 의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진다.


책을 읽고나서 옛 드라마도 유튜브에서 보았는데, 대체로 소설을 그대로 반영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한다. 김약국은 극중 인물처럼 좀 더 잘생긴 중년배우로, 다섯딸도 각 캐릭터를 잘 살려줄 여배우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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