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벤 존슨
이찬란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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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번쯤, '내 인생은 이걸로 끝이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나 또한 그런 적이 있다. 계획은 틀어지고, 돈은 부족하고, 기대했던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진짜 이렇게까지 한다고 싶을 정도로 일이 꼬이는 날도 있다. 세상이 나만 골라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 그럴 때면 우울감은 더 깊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이 찾아온다. 나만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괜히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한다.

<<나의 벤 존슨>>을 읽으며 오래전 TV 화면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했던 사람이 단 며칠 만에 영웅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바뀌었던 이야기. 어릴 때는 스포츠 뉴스의 한 장면으로 지나쳤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모습이 꼭 사람 인생 같았다. 가장 높이 올라갔다고 생각한 순간 추락하기도 하고,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도 하는 것.

소설의 주인공 호달 역시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인 청년이다. 가족을 모두 잃고 고시원 생활을 이어가지만 밀린 방세 때문에 그마저도 쫓겨난다. 갈 곳도, 기댈 사람도 없다. 그러다 우연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자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괜히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수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자꾸 호달의 삶을 침범한다. 귀찮고 불편해야 할 그 관심이 이상하게도 호달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건 작가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호달도, 중년 남자도, 학교를 떠난 청소년도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어쩌면 실패자라는 낙인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들로 그린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로.

요즘은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누군가의 일에 관심을 가지면 오지랖이라 하고,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배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조금의 관심조차 귀찮게 느껴질 때, 오히려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그래서인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윗집 아랫집 살면서 밥은 먹었느냐 묻던 시절. 온 동네가 서로의 사정을 알고 살던 시절. 때로는 귀찮고 간섭처럼 느껴졌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그런 시절의 온기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책장을 덮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의 인생을 결론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실패했다고, 늦었다고, 끝났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누구의 인생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끌어올리는 힘은 결국 자기 안에 있지만, 그 힘을 찾게 만드는 건 때로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응원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조용히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미래가 불안한 청년에게, 사람과의 연결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리고 지금 잠시 삶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빠르게 달리는 법보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이야기라 더욱 마음에 남았다.

>> 이 서평은 럽북(@lovebook.luvbuk) 서평단 자격으로 시원북스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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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생각 수업 - 수학적 모델링과 과학적 사고를 둘러싼 30가지 질문
주하오난 지음, 이지수 옮김, 김지혜 감수 / 미디어숲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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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수학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했던 생각이 있다.
"이걸 배워서 어디에 쓰지?"
피타고라스 정리를 외우고, 함수를 그리고, 미분과 적분까지 배웠다. 시험이 끝나면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고 성적표가 나오면 그걸로 끝이었다. 솔직히 학교를 졸업한 뒤 피타고라스 정리를 직접 활용한 기억은 거의 없다. 원기둥의 부피를 구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학은 계산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한 도구.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혼나는 과목 정도였다.
그런데 <<수학자의 생각 수업>>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수학에서 배워야 했던 것은 공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었구나.

한때 '뇌섹남'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예능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었다. 출연자들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여러 방향으로 접근했다. 어떤 사람은 수학적으로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른 가설을 세웠다. 막히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방송에서는 짧게 편집되어 나왔지만 실제로는 몇 시간을 고민해야 풀리는 문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모습이 유독 멋있었던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정답을 맞혀서가 아니었다.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멋있었던 것이다.

이 책 역시 답을 알려주기보다 생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현실의 문제는 교과서처럼 친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집을 구할 때도, 자녀 교육을 고민할 때도 문제 아래 조건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어떤 요소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 모두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수학적 모델링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 중에서도 과학적인 접근을 좋아한다. 감이나 믿음보다 근거를 확인할 수 있고, 필요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아 검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말하는 수학적 모델링은 무척 흥미로웠다. 어떤 현상이 나타났을 때 가설을 세우고, 그 이면의 원리를 찾아가며, 결과를 검증하는 사고법 말이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다. 답이 없는 문제만큼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사고가 자란다고 말한다. 전염병 확산, 인공지능의 판단 과정, 자원 배분 같은 사례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숫자보다 먼저 질문이 등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현실의 문제는 정답이 하나가 아니다. 자료가 부족할 수도 있고, 처음 세운 가정이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다른 관점은 없을까?'
'이 결론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학교 교육에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문제를 푸는 연습은 많이 하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질문하는 연습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대학에 가면 다르다. 강의도, 과제도, 논문도 결국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정답을 외우는 능력보다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자의 생각 수업>>은 학생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수학이 싫었던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수학을 어디에 쓰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 쓰는 것이라고.




>> 이 서평은 럽북(@lovebook.luvbuk) 서평단 자격으로 미디어숲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 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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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하는 청년들 - ‘풍요로운 고립의 시대’에 홀로 남겨진 이들에 관하여
강지윤.양민희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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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은둔 청년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한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먹고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 보였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뒤 친구들과 멀어졌고, 작은 방 하나가 그의 세상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적은 용돈으로 살아가는 생활에도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무기력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인터뷰 중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하던 순간 마음이 멈췄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 생일인데 괜찮다고 말했지만, 제작자가 건넨 작은 케이크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돈도, 성공도 아닌 누군가의 관심과 연결이었다는 것을.

<<은둔하는 청년들>>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은둔하는 사람을 세상과 단절된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말 개인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가 사람들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는 결과일까. 이 책은 방 안에 머무는 청년들의 삶을 따라가며 고립이 의지 부족이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은 고립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에서 찾는다. 실패하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뒤처지면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청년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는 사람을 성장시키기보다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책에 담긴 다양한 사례를 읽으며 이러한 현실의 심각성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감했던 부분은 '풍요로운 고립'이라는 시선이었다. 배달 음식과 온라인 서비스, SNS 덕분에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선택한 고독은 휴식이 될 수 있지만, 밀려난 고립은 전혀 다른 문제다. 책을 읽으며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인정과 비교, 경쟁이 너무 무거워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서른 전에 결혼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그 기준이 달라졌듯, 앞으로는 청년들을 끝없는 경쟁으로 평가하는 시선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은둔하는 청년들>>은 청년을 고치는 방법보다 사회를 바꾸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누군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힘은 비난이 아니라 관심과 이해라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해준다.

취업과 진로 문제로 미래가 불안한 청년에게, 자녀와 청소년을 이해하고 싶은 부모에게, 나아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미래를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고립이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은둔을 남의 이야기로만 여기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며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 이 서평은 은행나무(@ehbook_)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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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플러스 휴먼 - 보통 인간의 한계를 깨부수는 AI 진화 전략
김미경 지음 / 어웨이크(AWAKE)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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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를 사용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처음 챗GPT가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앞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떠들썩했지만,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내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호기심에 몇 번 질문을 던져보긴 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과물도 어딘가 아쉬웠다.
"역시 나랑은 안 맞네."

그렇게 한동안 AI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한 게시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어떻게 만든 걸까 궁금해졌다. 결국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나씩 따라 해보기 시작했고, 이미지를 만들고 사진을 수정하다 보니 생각보다 쓸 만한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아직도 버벅거릴 때가 많지만, 어느새 일상 곳곳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김미경의 플러스 휴먼>>을 읽으며 유난히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기술 앞에서 망설이고 헤매던 사람이 직접 부딪히며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거리감이 없다. 대단한 성공담이라기보다 먼저 길을 걸어본 사람이 건네는 경험담에 가깝다.

특히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AI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챗GPT가 화제가 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AI는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을 존재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기계가 될 거라고 막연히 여겼다.
하지만 저자는 AI를 인간의 능력을 넓혀주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AI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질문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실제로 내가 AI를 다시 사용하게 된 이유도 비슷했다. AI가 갑자기 똑똑해져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질문하는 방법을 조금씩 익히면서 결과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자가 말하는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에는 다양한 사례도 등장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회를 만든 사람, 늦었다고 생각하는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덕분에 AI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AI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 사용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안내한다. 한 번 시도했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포기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순둘의 나이에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저자는 말한다. 지금은 모두가 초보자라고.
하지만 저자는 4060세대를 단순한 초보자로 보지 않는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일을 이끌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AI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 다시 말해 질문할 힘을 가진 세대라고 말한다.

<<김미경의 플러스 휴먼>>은 AI 사용 설명서라기보다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다시 도전할 용기를 건네는 책이다. AI가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 시작이 막막한 사람,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어쩌면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낯선 문 앞에서 "나도 한번 해볼까?" 하고 시도하는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 이 서평은 어웨이크(@awakebooks.kr)로부터 책을 협찬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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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장수 박세죽 ㅣ 푸른숲 역사 동화 14
김해원 지음, 양상용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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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너무 흔해서였다. 학창 시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늘 이런 말이 따라왔다.
"큰 ○○○이요? 작은 ○○○이요?"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여럿 있었고, 사람들은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기준을 찾았다. 성적이 좋은 아이, 키가 큰 아이, 예쁜 아이, 날씬한 아이. 이름보다 먼저 비교가 따라붙었다. 그 순간이 참 싫었다. 나는 그냥 나인데, 왜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야 할까. 왜 내 존재를 설명해야 할까.

<<고기 장수 박세죽>>을 읽으며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세죽은 백정 마을에서 자란 소녀다. 엄마를 대신해 고기를 팔러 다니지만 사람들은 세죽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저 백정의 ㅅㄲ라고 부른다. 세죽이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나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싫었지만, 세죽은 이름보다 먼저 따라붙는 차별이 싫었을 것이다.
난 그저 세죽이일 뿐인데.

왜 누군가는 나를 백정의 ㅅㄲ라고 부르는 걸까.
어린 세죽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사랑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죽의 변화가 더 크게 다가왔다.

세죽은 처음부터 용감한 아이가 아니다. 놀림을 받으면 상처받고, 차별을 당하면 위축된다. 하지만 양반집 딸 선옥을 만나고, 연극 무대에 서고, 학교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남들이 붙여 준 이름표를 떼어 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 과정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그려져 더욱 마음을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책 속 여성 인물들도 인상적이다. 몸이 불편해진 뒤에도 굽히지 않는 엄마 가실, 세죽을 응원하는 마을 사람들, 신분의 벽을 넘어 친구가 되어 주는 선옥까지. 그들은 세죽을 대신해 싸워 주기보다 세죽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곁을 지켜 준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실제 역사를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는 것이다. 형평운동이라는 낯선 역사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아이들,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평등이 왜 중요한지 저절로 알게 된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은 인스타그램에서 '모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하다. 엄마라는 호칭 다음으로 많이 듣는 이름이다. 누군가 "모도"라고 불러 줄 때마다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쌓아 온 시간들이 함께 떠오른다.
세죽 역시 그런 마음이었을까.

태어나면서 얻은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지켜 낸 이름. 존재의 이유가 되어 주는 이름.
<<고기 장수 박세죽>>은 이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백 년 전 한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세상 앞에 당당히 내놓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 이 서평은 푸른숲주니어(@psoopjr)로부터 책을 협찬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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