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발매된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의 하나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읽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는 제목에 끌렸고 책소개를 통해 간략히 들여다 본 내용에 호기심이 동했다. 


제베린은 어려서부터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법한 것들에 깊이 빠지는가하면 무심코 지나칠 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만의 상상력에 취하곤 했다. 제베린은 사랑에 관해서도 독특한 시각을 지녔는데 그가 생각하는 남녀의 사랑이란 두 가지 극단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상형은 매우 고상하고 단아하고 기품있고 지조 있는 여성이거나 차라리 어떤 미덕도 정절도 기대할 수 없는 가혹하고 냉정한 여자였다. 그가 생각하는 결혼은 전자와 결혼해 행복한 여생을 조용히 보내거나 후자를 택해 사랑의 고통을 겪으며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제베린이 휴양지에서 만난 반다라는 미망인은 빼어난 미모와 감수성을 지닌 자였다. 제베린은 금새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신념을 전해 준다. 반다가 생각하는 여인의 사랑은 비교적 통속적인 관념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여자란 존재는 자신이 가진 무기, 즉 매력을 이용해 남자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노력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매력을 휘둘러 상대방으로부터 이득을 챙기는 것을 부덕하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감정, 특히 여자의 감정은 상황에 따라 돌변할 수 있어서 요조숙녀도 순식간에 요부로 탈바꿈할 수 있고 사악한 여인도 어느 순간 성녀로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다의 생각에 남자는 이성이라는 기준 하에서 움직이는 경향이 있지만 여자는 감성에 치우쳐 결정을 내리는 존재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 어떤 행동이라도 취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제베린과 반다는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 가까워졌다. 제베린이 반다에게 바란 사랑은 그의 사랑에 대한 관념에서 후자를 언급된 철저하게 지독한 악녀의 역할이었다. 제베린은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질투하게 하여 그의 사랑을 들끓게 만드는 사랑을 갈망했다. 반면 반다는 남편과 사별 후 자신의 이성관을 정립하게 됐다고 말하며 그것은 바로 어떤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이었다. 마음이 향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이 식으면 다른 상대방을 찾아 떠다는 유랑과도 같은 형태의 사랑이었다.


제베린이 반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에 그의 이상형인 지독한 악녀를 묘사하며 반다에게 그런 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반다가 입고 있는 모피, 그 모피로부터 제베린은 강한 힘과 지위를 느끼고 모피가 지닌 폭력성을 숭배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제베린은 반다에게 모피를 입은 비너스, 즉 강력한 위계와 힘을 지닌 여신이 되어 자신의 사랑을 받아줄 것을 청한다. 반다는 제베린의 요구에 잠시 망설이지만 결국 승낙하게 된다. 제베린은 자발적으로 반다의 노예가 되었음을 스스로 시인하고 그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한다. 반다가 채찍으로 그의 몸을 학대하고 말로써 그의 명예를 더럽히지만 그는 그런 고통에서 오히려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었다. 제베린과 반다의 일반적이지 않은 애정행각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수위가 높아진다. 채찍 한 대도 쉽게 휘두르지 못해 망설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제베린을 노예로 부리고 학대할 수 있는 자신의 지위와 힘에 만족감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진다. 


제베린의 사랑을 알지만 그의 마음을 개의치 않는듯 다른 남자를 만나 애정행각을 벌이고 제베린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실수가 없는 상황에서도) 가혹한 학대와 인격 모독을 일삼는 반다는 제베린이 의도한 '강력한 악녀', '자신을 지배하는 독녀'가 되어 갔다. 제베린은 반다의 언행이 불손해지고 강력할수록 더욱 그녀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보인다. 채찍을 맞다 보면 오히려 희열에 이르고 그녀의 가혹한 부림에도 되려 사랑이 깊어진다. 반다는 제베린의 이런 성향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베린을 더욱 학대할 수 있는 비책으로, 혹은 제베린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할 수 도 있을 방안으로써 다른 남자와의 애정의 도피를 택한다. 


반다에게 물리적으로 버림받기 직전(사랑의 견지에서라면 진즉 버림받은 상태로 보였다) 제베린은 반다의 연인에게 심한 채찍질을 당하고 그들의 도피를 겪음으로써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반다의 처지는 '디오니스우스의 황소'를 떠올리게 한다. 

아첨 잘하는 신하가 시라쿠스의 폭군을 위해 새로운 고문 도구를 고안해냈다. 쇠로 만든 황소인데, 그 안에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을 집어넣고 불을 지펴  쇠로 된 황소가 달궈지면 그 안의 사형수가 고통에 울부짖게 되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치 황소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디오니스우스는 그 장치를 고안해낸 사내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그 도구를 시험하기 위해 그 사내를 가장 먼저 쇠로 만든 황소 안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일반적 사랑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랑을 다룬다. 소위 마조히즘(masochism)이라 칭해지는 성격을 지닌 제베린이 반다라는 여인을 만나 그녀가 가진 성향인 사디즘(sadism)을 일깨워 놓는다. 제베린은 그가 당한 온갖 모욕과 고통에도 반다를 증오하거나 복수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 분노했을 뿐이다. 반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후 수년이 지났을 때 반다가 보내온 소포에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는 작품을 소중히 하고 경외감을 느끼는 모습은 여전히 그가 일반적 사랑과는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반다와 헤어진 후 주변의 여인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여성관에 대한 대화를 토대로 유추해보자면 반다의 모피를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모피로부터 파생되는 폭력과 지위를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베린이 '모피를 입은 마르스'가 된 것이다. 


제베린의 사랑도, 반다의 사랑도, 내가 꿈꾸는 사랑은 아니다. 나는 소시민답게 일반적인 사랑을 꿈꾸고 그를 좆으며 살고 있다. 다만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 밖에 있는 사랑을 접함에 있어 이것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음을 느끼고 사랑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을 더욱 수고하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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