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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 ㅣ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기 드 모파상 지음, 이형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프랑스 문학은 친숙하게 다가온다. 언어에 기인한 것인지 정서적 공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주관적인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프랑스 문학 작품은 몰입과 공감이 쉬웠음을 떠올리게 된다. 빅토르 위고, 앙투안 드 생텍쥐베리, 알베르 카뮈, 에밀 졸라, 스탕달, 알렉상드르 뒤마 등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작가들 뿐 아니라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기욤 뮈소 같은 현대작가들의 수많은 작품이 한글로 출판되고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그가 1893년 43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까지 300여 편의 소설을 남겼고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은 모파상의 단편 소설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한 20편을 소개하고 있다. 사랑이 주제라는 공통점을 공유할 뿐, 각 작품이 다루는 사랑은 종류도 흐름도 결말도 그리고 독자의 감상도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은 고즈넉한 저택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결혼이란 가족을 구성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한 제도적 구속인 반면 사랑이란 마음에 일어난 정열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십 번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할머니의 말에 소녀는 당혹스러워 한다. 소녀는 사랑이란 지고지순한 순정의 발로로 일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오는 축복의 순간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와 소녀의 사랑에 대한 대화 혹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에 이어 19가지 사랑이 이어진다.
분위기에 취해 불륜을 저지른 후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단지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여인의 사랑,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빈곤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자신하는 연인들의 사랑,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고뇌하는 젊음이의 애달픈 사랑, 그리고 일방적인 정염에 휩쓸려 상대방을 자신의 울타리로 불러오지만 그 결말이 자신 외 모든 사람을 곤궁에 빠뜨리는 사랑도 담겨 있다.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닌 죽은 자의 물건을 몰입해 그 물건을 통해 죽은 자를 소환해내는 기이한 사랑, 너무나 사랑했던 연인이 죽어 땅에 묻히자 그녀의 시신을 통해서라도 다시 만나고자 시도한 섬뜻한 사랑, 그리고 미물이라 여겨지는 새(bird)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첫눈에 반해 연심을 품었음에도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여인을 먼 발치에서 수십 년을 지켜보다 열정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드러내야 했던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원치않는 결혼을 하게 되자 마음의 병을 얻어 죽어가는 여인의 사랑과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 형부가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여인의 극단적 선택이 부른 비극과 후회, 마음을 준 연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절망감에 극단적 선택을 해야 했던 사랑을 소개하기도 한다.
단순한 여흥처럼 사랑의 대상을 쉽게 바꾸는 인스턴트적 사랑, 지적 장애자임에도 사랑에 대한 열망은 가득했지만 결국 버림받아 좌절한 사랑, 부인의 정욕에 시달려 자신이 죽을 것이라 여겨 부인에게 정부를 안겨주는 웃지못할 남자의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에 소개된 사랑은 젊은 시절 잠시 스쳐간 여인이 낳은 남자를 보며 자신의 아들이라 확신하고 그의 초라한 형편에 깊은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지위와 명성이 위해를 입을까 두려워 선뜻 나서지 못하는 노인의 사랑이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에 수록된 7권의 책 가운데 모빠상의 <어떤 정염 : 모빠상 단편집>은 '사랑'이라는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특히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떠올려보게 되는데, 사랑이란 일생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쏟았던 한 가지를 칭할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마음을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될 수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대상과 시기에 따라 사랑이라는 것은 기쁨, 희열, 만족 등의 긍정적 감성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내가 마음에 담아둔 어떤 것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박탈감, 고통, 슬픔 또한 내 사랑이 좌절된 데에 대한 '사랑의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가족, 친구, 동료, 때로는 어떤 물건일지라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행복하고 풍성한 삶이란 인생의 종장에 내가 많은 것을 사랑했고 내가 많은 사랑을 받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모빠상이라는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는데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세트가 출간됨으로써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지났을 좋은 작품을 만날 기회를 얻은 것 같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의 다른 책도 <어떤 정염>이 선사한 것과 같은 재미와 감동을 줄 것이라 여겨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20편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가운데 내가 가장 서글프게 생각했던 여인에 대한 애잔함을 적어보고 싶다. <의자 수선하는 여인>에 등장하는 의자 수선공은 부모로부터 지독한 가난과 의자 수선법을 물려 받았다. 삶에 치여 자녀에게 마땅히 쏟아야 할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하는 부모와 그녀의 신분과 행색을 꺼려하고 혐오하는 타인들. 세상은 그녀를 더러운 무언가로 여기는 듯 했고 안타깝게도 그녀 또한 그런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며 지냈다. 부모와 함께 일거리를 찾아 들른 마을에서 그녀는 돈을 잃고 울고 있는 또래 남자아이 슈께를 보게 된다. 슈께가 안스럽게 느껴져, 간혹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아 모아 두었던 모든 돈을 그에게 건내 준다. 슈께는 보답으로 그녀가 그를 안아도 밀쳐내거나 떄리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인간관계와 사랑의 가치관을 올바로 형성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슈께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돈'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잠시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어린 그녀의 마음 속에 깃든 왜곡과 순수함을 지닌 사랑은 이후로 50년 동안 지속되다 그녀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린다. 그녀의 한결같은 사랑의 대상이었던 슈께는 그녀가 제공하는 금전을 사랑했을 뿐 그녀를 향한 애정은 전혀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지인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해 털어놓고 슈께에게 자신의 마음과 자신이 평생을 모아온 '돈'을 그에게 전해달라고 청한 뒤 숨을 거둔다. 그녀의 소식과 유품(돈)을 들고 슈께를 찾아간 대리인은 슈께의 반응을 통해 보상받지 못한 그녀의 사랑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나 또한 첫 단추를 잘못 꿴 그녀의 사랑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뒤틀린 사랑조차 갈망해야 했던 그녀의 환경에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슈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간직했던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 것인지, 눈을 감는 순간에도 하늘로 올라간 후에도 행복했길 바라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