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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 니체와 함께 내 삶의 리듬을 찾는 ‘차라투스트라’ 인문학 강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평점 :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진우 교수가 2019년 포스텍 문명시민교육원에서 주최한 <고전의 재발견> 프로그램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이야기'를 강연한 것을 기초로 집필됐다. 이진우 교수는 <차라투스르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집필한 철학 텍스트가 아닌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기가 되어가는 삶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니체를 전공했음에도 차라투스트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니체의 글을 분석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며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이 아닌 듣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이진우 교수는 독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니체의 사상을 정복하겠다는 공격적인 자세보다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에 담긴 행간에 흐르는 음조와 리듬을 느끼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 담긴 의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문학적 전개를 보이지만 세상에 부딪혀 차라투스트라가 겪는 과정과 그것들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언급은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문학적 줄거리를 아주 짧게 적어보자면,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이 되고자 산으로 올라갔고 산 속에서 수행하며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도 알리려고 노력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차라투스트라를 하잖게 보고 비웃는 자가 눈에 띨 뿐이었다. 다시 산에 오르지만 이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끌려 다시 산을 내려오길 반복한다. 그러나 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무 적었고 그저 현실적 쾌락을 좇는 벌레같은 존재만 넘칠 뿐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절망하지만 포기하지는 않는다. 차라투스트라가 초인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초인으로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노력하자 그를 이해하고 따르는 몇몇을 만나고 함께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의 인간(마지막 인간)을 넘어선 존재, 우월한 인간 정도였을 뿐 초인에 이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 담은 철학적 의미는 엄청난 해석의 다양성으로 인해 아직까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에서 초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 등장하는 '권력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가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느끼기 위해서는 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원회귀, 마지막 인간, 우월한 인간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초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스스로의 가치와 정신을 '창조하는 자'이다. 단발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멸하고 고독과 싸우며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 만들어지는 결정체가 진정한 자아이다.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관념과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뇌하고 사유함으로써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능동적이고 주관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초인으로의 여정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고독으로 자신을 몰아넣기도 하고 고통마저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을 지녀야 한다. 정신의 고뇌를 거치지 않은 각종 제약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지닌다. 힘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권력을 추구한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는 단순히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힘과는 다르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이 되고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동기가 되는 것을 권력에의 의지로 칭했다. 어떤 것, 어떤 상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 권력에의 의지는 세상을 이루는 근간으로 작용할 수 있고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극복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동기로도 작동할 수 있다. 초인이 될려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경멸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마지막 인간'은 현실에 안주하여 일시적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권력에의 의지가 굳셀 필요가 없지만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초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끊임없이 고통을 동반하는 자기성찰을 겪어야 하므로 그만큼 강한 권력에의 의지를 필요로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깨우친다.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인생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 영원회귀의 개념이다. 영원회귀라는 말의 정의는 역설적으로 들린다(삶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한다면 첫 번째 삶과 만 번째 삶을 과연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면 '영원회귀'라는 말이 갖는 역설을 짐작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현재가 전부이며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오는 현재라고 생각했다. 영원회귀 아래에서 삶의 찰나의 순간은 영겁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과거이자 미래인 현재가 무한히 반복된다고 한다면 인간의 삶은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충실한 삶을 강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어떤 것들에 순응하고 굴종하는 충실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충실함을 의미한다. 즉 과거에게도 미래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현재를 살라는 것이다.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에 적힌 여러 문장들을 인용하고 그 문장들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준다. 마치 강단에 선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강의하듯 차분한 말투로 편안하고 담담히 글을 적고 있다. 읽다 보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능한 한 쉽고 재미있게 니체의 의도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이 절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어렵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차라투스트라>를 읽고자 시도했던 것이 서너 번은 되지만 완독한 적은 없다. 내가 마지막 인간에 가까우며 게으른 독자이기 때문에 남들이 주는 빛을 거저 얻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부제는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A book for everyone and nobody)'이다. 여기서 모든 이는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이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잠시 니체의 뒤를 따를 순 있지만 자신의 길을 가고자하는 능동적 인간 유형이다. 이런 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본인의 고통스러운 성찰 없이 남에게서 위로와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탄생했던 시대는 소위 허무주의(nihilism)라 일컬어지는 상실의 시대였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삶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기에 니체는 절망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한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이며 어떤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니체의 질문은 니체의 시대 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위한 안내서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안내서가 그리 쉽게 와닿지 않아 범인들은 안내서를 읽기 위한 또 다른 안내서를 필요로 한다. 이진우의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가 차라투스트라에 다가서기 위한 안내서 역활을 한다. 그의 조언처럼 니체의 문장을 읽으며 문장이 지닌 의미에 탐닉하기보다 문장과 문장사이에 흐르는 리듬을 느끼고 실천적 자세로 같이 질문하고 같이 사유하는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현재도 침대 맡에 <차라투스트라>를 두고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깼을 때 잠깐씩 보고 있다. 니체가 의도한대로 천천히 읽어보는 중이다. 현재 2부 중반부에 이르렀는데 천천히 사유하며 읽는 것에 더해 이진우 교수의 조언에 따라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보려 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보려 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