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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ㅣ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 예술 분야의 천재가 시대를 넘어 영향을 끼치듯이 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짓는다."
역사를 읽다 보면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 역사에 길이 남을 획을 긋거나 흐름을 바꾸는 일을 하곤 한다. 이런 중요한 순간이 개인의 초월적 능력에 힘입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운명이라고 해야할 지, 우연이라고 해야할 지 애매한 경우도 있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승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고 사가의 주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해석함에 이견이 존재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옮고 그름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세계사를 좌우할만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말해보라 한다면 각자의 지식에 기반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폭넓은 세계사적 지식을 기반으로 누구나 공감할만한 위인과 대사건을 제시할 수도 있을테고 어떤 사람은 지엽적이고 자기중심적(민족, 국가, 가문 등)인 것들에 치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실린 14가지의 에피소드는 '누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답이며, 역사를 뒤흔든 영웅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칫 무심코 지나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위인들에 가중치를 둔 것이라 보인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쓰여진 글을 읽다 보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간결한 문장들을 쌓고 쌓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몰입감을 부여한다. 츠바이크가 극적이라 생각해 포함시킨 역사적 사건(인물)에 대한 '역사가의 기록'은 분명 건조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츠바이크의 글들은 '건조한 역사적 사실'에 건강한 근육을 붙이고 생기있는 피부를 입혀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감상을 자아낸다. 이런 것이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헨델의 재기를 표현하는 츠바이크의 묘사는 츠바이크의 글이 갖는 생명력의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반신불구가 된 그가 재활에 힘써 다시 건강을 회복했을 때 처음으로 마주한 오르간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헨델이 느끼는 환희를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완전희 치유된 몸으로 아헨을 떠나던 날, 헨델은 교회 앞에 멈춰 섰다. 지금껏 그다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지만 이제 은총을 입어 전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대형 오르간이 설치된 합창대 석으로 올라가려니,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자신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왼손으로 시험 삼아 건반을 눌렀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제 주저하며 오른손을 시험해 보았다. 오랫동안 꼼짝 못하고 마비되어 있던 손이었다. 아, 이럴수가! 오른손이 건반을 누르자 은빛 샘처럼 소리가 솟아나지 않는가! 서서히 그는 연주를 시작했다. 즉흥곡이었다. 그는 거대한 흐름에 빨려 들어갔다. 울려 나온 소리는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이며 보이지 않는 탑이 되어갔다. 천재가 짓는 투명한 건물은 그림자 하나 없이 찬란하게 위로 쑥쑥 솟아올랐다. 빛과 소리가 하나가 된 듯 주위가 졸지에 환해졌다.
운명이 힘 있는 자를 응원하고 섬겨 그가 역사를 끌어가도록 안내하지만 가끔 운명이란 미묘한 존재는 변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역사의 주인공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며 조연조차 되지 못할 법한 사람을 메인 무대로 불러오기도 한다.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서술되는 인물들은 광기나 우연이나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그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자들, 주연에 가려 마땅히 받았어야 할 조명을 받지 못한 조연들을 주연으로 승화시킨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남긴 업적이 결코 작지 않지만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 봤을 때 해당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칭하긴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츠바이크의 관심과 글이 가미되자 이들과 이들의 업적이 불멸의 것으로 자리매김 한다.
츠바이크 자신이 작가임을 드러내듯 14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상당 부분이 예술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으로써 키케로, 헨델, 루제, 괴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을 불러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을 남긴 이들이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으로 걸작을 남기게 됐는지를 조명한다. (개인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환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결정에 일부 헌신하는 바가 있을 수 있지만 합리적으로 바라보면 예술 작품은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불멸하는 것이지 인간의 삶 자체를 가르는 바는 아니라 여기지만, 츠바이크의 시선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란 다른 어떤 것들보다 빛나는 역사의 결정체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다루는 글임에도 소설처럼 읽히는 책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주어진 역사적 사실에 살과 감정을 붙여 단순한 역사 이상의 가치를 뿜어내는 것 같다. 이런 점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한다. 역사든, 철학이든, 어려운 주제를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재미까지 더하니 참 매력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츠바이크 선집1'로 발간된 책이다. 때문에 츠바이크 선집 시리즈가 연이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