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메이지 유신 - 흑선의 내항으로 개항을 시작하여 근대적 개혁을 이루기까지!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나카 아키라 지음, 김정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11월
평점 :
산업혁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력이 높아진 열강은 재료의 수급과 생산품의 판매를 위해 앞다투어 식민지 공략에 나섰다.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에 나타나 개항요구를 했을 때, 에도시대를 겪고 있던(서구 열강에 비해 산업화가 덜 돼 있던) 일본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고 1858년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일부 항구를 개방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영사재판권(치외법권), 관세자주권의 결여, 최혜국조관 등 일본측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였으나 당시 중국이 두 차례 아편전쟁을 겪으며 영국에 수모를 당하는 모습은 일본의 조인을 강요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의해 체결되긴 했지만, 조약으로 개항된 3개 항구(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는 수출입이 급격히 증가해 가파른 성장을 보였다. 무역의 발달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신흥거대상인이 등장해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부루주아적 경제가 성장하고 막부 중심의 경제 체제는 힘을 잃었다.
자본주의의 쇄도는 계층의 변화와 분화를 불러왔고 빈부격차를 증대시켜 민중의 반발을 야기했다.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으며 두 세기 넘게 유지돼 온 막부체제를 흔들었다. 기존의 막번체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이 더 주목을 받았다. 천황은 존왕양이 사상의 중심으로 외압의 위기극복을 위한 민족적 상징으로 여겨졌다.
존왕양이 체제(천황을 표면에 내세우고 외세에 맞서고자 했던)는 조정과 막부의 관계를 재구성했다. 조정과 막부, 조정과 웅번(비유적으로 소출량이 만 석 이상인 막부를 일컫는 말로 세력이 큰 막부를 의미)의 세력이 생겨나고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다. 대외적 기치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은 천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와 이득을 채우려 했다.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존양파와 천황을 상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공무합체파 사이의 대립도 정국 혼란에 기여했다.
1867년 쇼군인 요시노부가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의 '대정봉환 '이 일어난다. 막번제는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나라를 통치한다는 이념으로 정당성을 확보했는데 이 전권을 다시 천황에게 돌려줌으로써 막부제의 약화와 혼란스런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 실제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진심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요시노부는 권력을 재탈환하지 못했고 천황 중심의 체제가 더 힘을 받게 됐다.
1868(메이지원)년 메이지정부 수립과 함께 5개조의 서약문을 발표한다.
하나, 널리 회의를 부흥시켜 정치상의 중요한 일을 공론으로 결정한다
하나, 위 아래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활발하게 경륜을 행해야 한다.
하나, 문무백관이 한결같이,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뜻을 이루고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하의 공도를 따른다.
하나, 세계에서 지식을 구하고 천황이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이 서약문은 얼핏보면 막번체제를 뒤로하고 민주주의에 다가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막부의 그림자를 청산하고 신정부의 권력 집중(천황의 권위 강화)을 위해 널리 활용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지만 제도가 정립되지 않아 갈피를 못잡는 사이 피폐해진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켰고 막번제의 잔존세력은 신정부와의 전쟁을 도모했다. 보신전쟁(신정부와 막번의 전쟁)은 막부의 경제부담을 가중시켜 번체제의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통해 신정부의 중앙집권력은 강화된다.
1871(메이지4)년 신정부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임무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그동안 외국과 맺은 조약의 개정에 대한 예비 교섭을 하고 근대 국가의 선진문물을 조사 연구하는 것이었다. 선진국과 동등한 관계에서 교섭을 진행하고 이들의 발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국제공법(국제법)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제도, 재정, 경제, 산업, 군사, 사회, 교육 등 국가 전반에 걸친 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신정부는 알고 있었다.
1873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10월의 정변'을 통해 당시 일본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후 자본주의의 육성과 보호, 산업화, 치안의 강화, 교육제도 개편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의 서구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느 정도 내치가 진행되자 시선을 조선으로 돌렸다. 1875년 일본의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를 침범한 것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분쟁이 시작됐고 조선으로부터 조일수호조약을 조인받았다. 이는 과거 페리 함대가 일본에서 미일통상수호조약을 받은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이후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을 겪으며 조선은 지배체계와 국정운영은 혼란을 겪게 되고 결국 일본과 청나라 뿐 아닌 서구 열강들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 영국과 같은 대국 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소국(네델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을 둘러보며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유신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이들이 나아가고자 한 방향은 천왕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로,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의 승리가 지렛대가 되어 유신정부의 제국주의로 부추기게 된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국내의 소요를 잠재우는 점에서도 이득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얻는 혜택 또한 컸기 때문에 제국주의/군국주의는 지속된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인권과 자유를 강조하며 흘러나왔지만 강력히 탄압되었으며 인권과 자유가 중심이 된 새로운 체제는 1945년 패전을 기점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구 열강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급속도로 적용해 20세기 초반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나라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쇄국을 고집하거나 열강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의지를 불태울 때 세계사적 흐름에 동조하여 국가를 개혁하고 발전시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이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담당한 것이 '메이지 유신(명치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을 읽기 전 막연히 예상하기를, 일본은 19세기 중엽 흑선을 보고 반강제적으로 개국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열강으로 성장해 결국 제국주의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담긴 내용을 보니 메이지 유신 또한 격동의 시기에 굉장히 많은 잡음과 혼란을 뚫고 이루어진 혁명적 과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은 우리와 밀접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사에 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함을 느꼈다. 전체적인 역사적 흐름에 대한 무지와 함께 일본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나 지명 그리고 용어조차 낯설게만 느껴져 <메이지 유신>을 읽으면서도 다른 역사서와 달리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기회를 잡아 일본사 전반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