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폭력 - 운명이라는 환영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2
아마티아 센 지음, 김지현.이상환 옮김 / 바이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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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이슈, Issues of Our Times'는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W.W. 노턴 출판사에서 제작한 시리즈로써 선도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을 선보이고 독자들의 사고를 독력한다. <정체성과 폭력>은 '우리시대의 이슈'의 두 번째 작품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유명한 '아마르티아 센'의 저작이다.   


제목에 사용된 '정체성'과 '폭력'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최근 읽었던 '마크 모펫'의 <인간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어떻게 사회 형성에 기여하고 정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 재앙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다양성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는 '나와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종, 민족, 언어, 종교 등 개인을 구성하는 수많은 '정체성'의 차이는 개인 간의 혹은 사회 간의 분쟁의 소지가 되곤 한다. 때문에 <정체성과 폭력>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가 진지하고 흥미롭게 다가왔고 저자가 정체성과 폭력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지에 대한 궁금해졌다.




모든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 하에 살아간다. 인종, 민족, 국가, 종교, 취미, 사회적 지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들로 인간의 정체성이 표현될 수 있다. 정체성의 다양성이 파괴되거나 무시되어 호전적인 정체성이 강조될 때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잘못 기술하고 그들을 유일한 정체성 만으로 평가해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t), 인도의 힌두/무슬림 폭동 등은 단일한 정체성 만을 강조할 때 드러날 수 있는 폭력의 예시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정체성이란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근본적으로 정체성이란 선택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인종이나 민족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지만 종교, 취미,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은 개인의 기호와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정체성이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한계 내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끊임없이 선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어느 것도 그 사람을 판단하는 유일한 정체성이 될 수 없다. 


개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다양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분류 기준에 따라 능동적으로(직업 등) 정체성을 획득하거나 수동적으로(민족 등) 얻기도 한다. 소속된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은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경험이 그 사람의 충성심이나 가치관을 변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이러한 경험을 '충성도 필터(loyalty filter)'라고 칭했고 정체성의 선택과 우선순위의 부여도 충성도 필터에 영향을 받아 바뀔 수 있다. 정체성은 제한된 범주 내에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정체성을 획일적이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편협하고 위험한 접근 방식이다.


학자들은 종종 세계를 문명에 따라 선을 그어 분류하고 문명 간의 차이와 충동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범주화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행위이며 부당하고 잘못된 토대 위에 탑을 쌓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명론적 접근법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방대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과 현대의 기준에 비춰 평범하지 않은 사례들이 주는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을 모순없이 지닐 수 있다. 소속된 다양한 집단과 관련된 상이한 정체성들은 무수히 존재하고 공존할 수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문명론적 접근법의 편협한 분할은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상호작용을 무시함으로써 좁고 굴절된 시야를 제공하게 된다.


정체성의 다양성을 도외시 한 해석은 비단 문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교 영역에서도 억지로 분할해 나눔으로써 정체성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외면해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특정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부과된 선입견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해요소로 작동하며 종교적 정체성을 지나치게 부각해 더 중요할 수 있는 요인들(정체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낳는다. 

종교적 정체성을 악용해 폭력을 용인하도록 조장하기도 하는데, 이런 행위는 혼란을 불러와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고착화시킨다. 분명한 것은 같은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개인의 우선순위와 선택은 상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20세기 중반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을 끼쳤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피지배자는 서양 제국주의에 반발하고 자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반발적 자아 인식(reactive self-perception)'을 낳았다. 서구적인 것이라 주장되는 것들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으로 비서구적인 것을 자국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유'와 '개인주의'가 서양에서 비롯됐다는 것에 대한 반발로 동아시아는 '수양'과 '도리'를 강조하는 식이다. 비교적 최근의 세계사가 유럽 주도로 이뤄진 것은 맞지만 문명의 장구한 역사는 과학이나 사상의 발전은 전 세계에 걸쳐 이뤄진 성과의 결집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서양에서 제기된 주장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현대 과학과 사상을 서구적인 것으로 인지하는 실수를 범하고, 비서구 지역은 마땅히 주장했어야 할 역사적 기여를 뒤로한 채 반서구적 성질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서구적인 것들에 비해 비서구적인 것들이 미개한 것 같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기도 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정체성이 올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서구와 비서구의 대립이 아닌 내생적, 외생적 정체성을 모두 수용해 다원적 정체성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탈식민화는 고립된 정체성과 우선순위로부터 해방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문화는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상호작용한다. 문화적 운명의 환영은 자칫 숙명론에 빠져 체념하고, 정체되고, 퇴행하는 사회를 야기할 수 있다. 문화적 자유란 우선순위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자유를 의미한다. 문화는 정체성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문화가 가변적인 것처럼 정체성도 가변적이며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듯 다양한 정체성 또한 존재한다.


세계는 눈부시게 풍족하면서도 동시에 참혹하게 피폐하다. 세계화를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심화된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손꼽히는 화두로 남았다. 전체적 부는 증가했음에도 세계의 약자들이 누릴 수 있는 몫은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아 이들로 하여금 상대적 빈곤, 소외, 박탈, 무시, 굴욕을 느끼게 한다. 위의 부정적 감정들은 우위를 차지한 세력에 대한 불만을 낳고 격화되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빈부에 따라 사회를 가르는 정체성의 첨예한 대립을 막기 위해서는 (인도주의적인 접근이든 평화를 위해서든)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필요하고 이는 공정한 배분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세계화는 물리적 거리와 국경의 중요성을 낮추었다. 이주의 물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주민들이 한 공간(나라)에 모이게 됐다. 상이한 관습과 전통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이 원만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크고 작은 갈등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다문화주의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다원적 단일문화주의(plural monoculturalism)와는 구별되는데 다문화주의가 문화적 자유를 수반하는 반면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는 종교적 분리주의를 수반하고 있다.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다문화주의를 지향하고, 각자의 신앙적 정체성에 지나치게 고양된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자행되는 폭력의 근저에는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적 혼동이 있으며 이 개념적 혼동은 다차원의 인간을 일차원적으로 바꿔 버린다. 폭력을 획책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럴싸하게 포장된 단일 정체성의 환영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가치들(다양한 정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피아로 구분해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 몰두해 편협한 시각을 갖는다면 사람과 사회를 온전히 볼 수 없으므로 정체성의 다원성을 함양하고 존중해야 한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많아 신중히 읽게된다.

 

여지껏 읽고 감명받았던 책들도 정체성의 측면을 작위적으로 단일화하거나 중요한 정체성의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문명과 전쟁사를 다룬 몇몇 저작은 분명 정체성의 측면을 획일적 분류로 강하게 규정하고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 기억났다. 솔직히 내가 읽은 대부분의 문명과 사회와 관련된 서적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맹점을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아무 것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위험하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는데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없고 자신의 주장에 알맞은 정체성을 끌어와 사용하는 것이 글을 매끄럽게 이어주고 논거의 일관성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공부하는 자)는 어떤 책을 읽으며 논거로 언급되는 것들이 정당한지, 논리적 모순은 없는지, 다른 요소에 의한 영향은 어떠할지 등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도 저자의 관점에 따라 상이하게 보일 수 있음을 상기하고 여러 관점을 아우르는 독서습관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처럼 문화적 자유를 증대시키고 정체성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바가 크다. 그렇지만 현실적 제약을 감안해 보면 타자(otherness)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은 상호적이여야 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 부분인데, 개인과 정부 나아가 세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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