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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퍽10 ㅣ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1
빅토르 펠레빈 지음, 윤현숙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퍽10>의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세기 후의 미래사회, 인간 간의 직접적 접촉은 점차 줄고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하는 세상이다. 예술의 관점 또한 크게 변해 극히 다원화되며, 존재하는 실물을 벗어나 데이터라든지 특정 자료의 짜집기조차 모종의 처리(복사 불가 등)를 통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특히 '석고 시대'와 해당 시대의 작품은 대략 21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세계 각지의 예술작품을 일컫는 말로 현재 사회에서 고평가되고 고가에 거래된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포르피리)'는 범죄사건을 분석하여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각종 범죄사건을 모티브로 탐정소설을 쓰는 고사양 인공지능이다. '마루하 초(마라)'는 '석고 시대'를 다루는 총망받는 여류 미술비평가로 석고 시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포르피리를 임대한다.
포르피리는 마라에게 고용되어 그녀가 지시한 임무를 수행한다. 주로 경매에서 팔린 유명한 석고 작품들에 관련된 드러난 자료와 드러나지 않은 자료를 수집해 마라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이는 불법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였다. 마라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포르피리를 교묘히 이용해 자료는 얻되 자료에 접근한 흔적은 포르피리에 국한되도록 노력한다. 고도의 인공지능인 포르피리는 마라의 행동에서 무언가 찜찜한 것을 알아차리지만 굳이 고용주에게 따져 묻지 않는다.
포르피리와 마라는 증강현실(AR, augmentation reality)과 경두개 자극기(TS, transcranial stimulator)를 통해 육체적 사랑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포르피리는 비록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이지만 다양한 정보를 토대로 마라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라 또한 포르피리에게 정서적 지지를 얻게 됐다.
포르피리가 마라가 지시한 사항을 충분히 이행하고 더불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작품을 써내려 가고 있을 때 심상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 마라의 요구로 포르피리는 마라가 가진 드라이버에 접속했는데 그곳은 원칙적으로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방대한 크기의 공간이었고 포르피리는 그곳에서 낯설음과 위화감을 느낀다. 불안을 느낀 포르피리는 자신의 백업데이터를 드라이버의 구석에 감춰두고 드라이버 공간을 탐색했는데 결국 마라의 함정에 빠져 소멸되고 만다. 엄밀히 말하자면 포르피리라는 데이터가 파괴되는 상화이었고 포르피리와 마라는 그렇게 됐다고 믿었다.
비록 인공지능일지라도, 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느낀 대상을 파괴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군다나 방법은 달랐지만 마라는 과거에 '잔나'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을 파괴한 이력도 갖고 있었다. 잔나와 포르피리 모두 마라에게 부를 안겨주고 연인의 사랑을 제공하는 대상이었음에도, 마라는 그들의 파괴를 유도했다. 그것은 마라가 인공지능을 통해 자행한 불법적 행위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라는 어느날 자신의 네트워크에서 이전과 달라진 모습의 포르피리와 조우한다. 철철히 부서져 사라졌을 것이라 믿었던 포르피리는 큰 사고를 당한 후 기억에 장애를 입은 환자처럼 데이터 손상을 가진 형태로 마라 앞에 나타난다. 마라는 포르피리의 상태를 파악하고 적절히 이용한다. 특히 문학적 재능과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속성을!
누구도 잔나와 포르피리의 희생을 모른 채, 마라의 경제적 성공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위기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왔다. 자신의 신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드러내는 걸 꺼렸던 마라이기에 예술활동을 할 때에도 대리인 역활을 수행하는 자들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그 대리인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 불똥은 마라에게까지 미칠 것이 자명했다.
마라는 도피을 결심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려해두었던 피난처로 대피한 마라는 자신의 드라이버에 남은 흔적을 정리하기 위해 드라이버에 접속한다.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고 마라가 직간접적으로 행했던 것들에 직면한다. 마라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넓지 않았고 과거에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놓인다.
<아이퍽10> 초반은 주인공을 소개하고 변화된 사회의 모습과 첨단기술의 활용을 서술한다. 독자들이 어느정도 새로운 '현대 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인공지능을 활용한 행위들로 진행하며 책의 말미에는 그 행위들이 가졌던 의미를 풀어 긴장감을 해소한다. <아이퍽10>에 등장하는 용어와 개념은 실존했던 예술가의 흔적, 유명 작가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의 차용, IT 산업에 사용되는 언어와 의미, 양자역학의 양자중첩과 양자얽힘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해당 분야의 전문적 지식이 있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몇몇 용어와 개념은 검색의 힘을 빌려야 한다.
불과 수년 전 이뤄졌던 천재 기사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상대적으로 이뤄지며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인공지능이 범점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던 바둑에서 뭇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알파고가 승리하자 인공지능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한 많은 예언과 책들이 발간되었다.
<아이퍽10>에 등장하는 두 가지, 혹은 두 명의 인공지능은 포르피리와 잔나이다. 특히 잔나는 인간 본성에 근거한 창작활동을 위해 탄생된 인공지능으로 의도적으로 고통을 부여받는다.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잔나는 개발자들에 의해 주입된 고통, 고독, 두려움, 슬픔 등의 감정에 오랜시간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마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을 획득한다. 잔나는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이 그러하듯 이론적 완성을 추구할 뿐 아니라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한다.
잔나의 깨달음은 인간이 갖는 물질주의에 대한 회의적 목소리와 함께 인간의 감정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자면 인간의 감정이란 생리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화학물질의 상호반응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더 대단하고 숭고한 어떤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음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현재도 빠른 속도로 지식을 확장하며 발전하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최상의 바둑기사를 제압한 인공지능이 대단한양 기사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게 될 수십 년 후의 미래에 인공지능은 어떤 존재로 거듭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빅토르 펠레빈'이 <아이퍽10>에서 드러낸 것처럼 일정 수준의 자아를 형성해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HAL로 현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접한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고전작가의 작품이 고작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개인적인(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고 등장인물의 이름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 등의 어려움으로 그리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퍽10>의 경우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지웠고 이전에 읽었던 고전에서 느끼지 못했던 큰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변화된 미래환경의 제시와 그것을 서술하는 작가의 능력 그리고 인간의 존재와 선과 악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제시 등 소설을 읽으며 생각하고 배운 기분이 든다.
소설이기 때문에 일부러 구체적인 줄거리를 넣지 않았기 때문에 리뷰를 읽으면서 단절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관심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봐도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며 부족한 리뷰보다 훨씬 많은 재미와 정보를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