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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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었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독서에 취미가 없었던 당시에도 '개미'는 시작부터 결말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20년이 넘은 현재까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그의 작품들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미' 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스토리 전개와 간간히 등장하는 위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특색이라 할만한데 이런 전개는 '심판'에도 묻어나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나톨이 천국에서 재판을 받는 내용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심판'을 흔하디 흔한 짧은 소설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몇몇 부분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머릿속을 맴돈다. 오락적인 측면에 집중해 읽어도 충분히 재밌을법한데 나이를 먹다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인지, 책을 보는 지혜가 쌓인 것인지 오로지 재미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마치 '티벳 사자의 서'의 한 부분을 읽는 듯 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세상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타톨과 카롤린의 대화 중 행운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아나톨은 자신의 인생에서 겪었던 다양한 행운들에 행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런 아나톨을 보며 수호천사인 카롤린이 말한 내용은 엄숙하기도 하고 약간은 섬칫하기도 했다. 

"행운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일에 무지한 자들이 붙이는 이름이에요."

혹시 내 삶도 이런 수호천사들의 조력 덕분에 무사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꼭 그 대상이 영혼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주위에 있는 가족, 친구, 지인들이 보태주는 힘과 희생으로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상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 또한 들었다. 


아나톨의 죄를 묻는 검사로 등장한 베르트랑의 말도 울림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일려고 애쓰죠."

우리네 대부분이 사는 세상을 가벼이 표현한 문장이지만 부인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할 듯 하다. 인간은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리고 어떤 것을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든 선택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소년 감성으로 돌아가보면 꿈이라고 칭할만한 것들이 많았다. 수시로 바뀌기도 했지만 꿈이라 부를만한 많은 생각을 담고 살았다. 그러나 소위 '철이 든' 후부터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꿈을 좇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리게 된 듯하다. 천국의 '심판'에서 꿈을 잃은 것조차 죄가 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선택의 순간 멀리 있는 꿈보다는 가족을 포함한 내 삶의 안정을 택할 여지가 많아 보인다. 철이 너무 든 모양이다. 


'개미', '파피용', '뇌' 등 기존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는 재미와 흥미를 봤다. 다른 것들이 있었겠지만 내 관심사는 재미로 집중됐었다. 그런데 이번 '심판'은 재미와 함께 철학을 떠올리게 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삶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실존이란 것이 '나'와 상관없이 존재 할 수 있는가 등을 묻게 됐다. 인간의 삶이 고행이라는 불교의 말씀처럼 윤회 또한 부족한 선(善)을 쌓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옳을 것인지도 자문하게 됐다. 

'심판'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윤회하는 영혼의 삶은 유전과 카르마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고 그 가운데 자유의지가 50%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유의지의 방향을 선한 마음으로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조언으로 다가왔다.


본래 소설을 단지 소설로써 읽는 걸 선호하는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에 기대하는 재미에 집중하려는 생각으로 펼친 책에서 너무 심오한 주제가 떠올라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태풍이 지나가며 남긴 잔잔한 빗방울 때문에 감수성이 높아진 것인지, 그동안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재밌는 질문을 남기는 철학책을 읽은 느낌이다.   


'심판'은 흥미만으로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발상이 신선하고 천국의 재판 과정도 흥미롭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 또한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 여긴다. 적어도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늘 품을 수 있으니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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