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황제 - 로마보다 강렬한 인도 이야기
이옥순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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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향한 배움의 노력은 과거를 스쳐간 흔적을 좇는 과정이 아니라 현대로 이어진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고 현대에 적용하거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힌트를 얻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의 미래이며, 미래의 과거이듯 역사는 파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다같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형태를 띤다. 오늘의 나를 돌아보기 위해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봐야 하는 것처럼 국가와 시대의 모습 또한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전문가를 제외하고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매우 많고, 그만큼 역사서를 편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문자와 인쇄술이 대중에 널리 퍼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세계사의 중심은 서유럽이였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서유럽의 후손인 미국이 부상했기 때문에 많은 역사서는 서양 위주로 발간되곤 한다. 동양의 역사도 유구한 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지만 17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서양 열강의 침입에 굴복했고 세계사의 변방으로 취급받음으로써 그 가치가 빛을 잃게 됐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치중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동양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서적은 중국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사에 대한 접근은 용이한 반면 그 외의 동양 국가의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서구 열강이나 중국을 제외한다면 특정 국가에 대한 각별한 관심없이 일반적 세계사 서적을 통해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국사를 제외한다면 내가 읽어 온 역사서의 대부분도 그리스 로마사로 시작되는 서양의 역사와 주나라로부터 시작되는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운 좋게도 이번에 리뷰하는 <무굴 황제>는 상대적으로 무지한 인도 역사를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제목 그대로 무굴 제국의 흥망성쇠를 읽을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였다고 생각한다.



 무굴제국은 1526년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한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세운 왕국으로 '무굴'이란 말은 국명이 아닌 황제들이 속한 부족의 이름이었다. 바브르가 부계로는 티무르, 모계로는 칭기즈 칸의 후예기 때문에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뜻하는 '무굴'제국이라 칭하게 되었다. 

 무굴제국의 창시자 바부르는 1483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에서 태어나 11살에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이내 동생에게 왕위를 뺏기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가진 것이 미천했지만 칭기스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커다란 포부와 인심을 얻는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숟한 전쟁을 치르며 성장했고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많았지만 인도 대륙을 점령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4차례 공격에 실패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5번째 공격을 가해 뉴델리 이브라힘 왕조를 무너뜨리고 1526년 아그라를 수도로 삼아 무굴제국을 세웠다. 바부르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인내한 30년이 결실을 맺어 인도 대륙을 통치하기에 이르렀지만 4년 뒤 병마로 쓰러졌고 생전에 그리워 마지 않던 고향 땅에 묻혔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게으르고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이복 동생들과의 골육상쟁과 더불어 이브라힘의 잔존 세력의 반란으로 수세에 몰려 15년 가량을 떠돌게 된다. 결단력이 부족하고 성정이 온화했기 때문에 이복동생들과 반란군을 엄벌하지 못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비가 물려준 제국을 지키지 못하고 쫒기게 됐다. 천운으로 숙적 세르 샤가 죽자 세르 샤 정권의 공백기가 생겼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후마윤은 다시금 무굴제국의 영토를 수복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어이없는 낙상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후마윤의 아들 아크바르가 제위를 잇는다.

 13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은 아크바르는 후마윤과 달리 현명하고 결단력이 뛰어났다. 아크바르는 18세가 되자 섭정세력을 물리고 도를 넘는 행동을 하는 신하는 개인적 친분과 신분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략결혼으로 토착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다. 아크바르 황제는 '제국의 지배자란 영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제국에 영화를 가져오는 자'라고 믿었고 제국의 백성을 종교와 언어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크바르의 관용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의 마음을 두드렸고 결국 그들이 마음을 열어 제국의 일원으로 적극 동참할 수 있게 도왔으며 고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황제처럼 그의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게 됐다.
 위대한 아크바르도 자식농사 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3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술에 찌들어 방탕한 생활에 탐닉했고 2명의 아들은 자신보다 일찍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남은 아들인 살림은 두차례 반란을 일으켜 아비인 아크바르의 마음을 찢어놨다. 아크바르는 제위를 손자에게 물려주는 방안까지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처럼 결국 임종 시에 살림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살림이 바로 무굴제국 4번째 왕인 자한기르 황제이다.

 1605년 제위에 오른 자한기르는 술과 아편에 찌든 왕이였음에도 전대의 치세 덕분에 순탄한 길을 걸었다. 아크바르가 닦아 놓은 탄탄한 기반 위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꿈꿨고 국민의 복지에 신경쓰고 정의로운 사회를 형성하고자 했다.
 과거 자한기르가 왕좌를 뺏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아크바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처럼 자한기르의 자녀들 또한 반역을 저지른다. 업보인 것인지, 자한기르는 자신이 아비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스란히 되받게 된다. 다른 점이라면 자한기르는 아크바르와 같은 관대함을 베풀지 않고 아들들을 처벌한다.
 지나친 음주와 마약에 심신은 피폐해졌고 결국 통치를 왕비인 누르자한에게 넘긴다. 말년에 막내아들의 반란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1627년 숨을 거둔다.
 자한기르가 아비인 아크바르의 덕으로 제국의 통치는 해나갔으나 뛰어난 위정자라 보기는 어렵다.  그는 위정자로서의 재능보다는 회화, 건축, 과학 등에 뛰어났으며 무굴제국의 예술 발달에 큰 업적을 남긴다.

 자한기르가 죽자 그의 막내 아들인 쿠람(자한기르 생전 반란을 일으켜 왕위 찬탈을 노리다 실패한 뒤 자신의 두 아들을 볼모로 내주고 목숨을 구했다)은 정적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발빠른 움직임을 보인다. 당시 자한기르를 대신해 통치를 하던 누르자한을 제압하고 왕위를 노릴 만한 이복형제들을 숙청했다. 영특한 면이 있었던 샤자한(쿠람)은 치세에 능했고 건축과 같은 예술 분야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천도한 후 델리를 인구 50 만이 거주하는 당대 최고의 도시로 성장시킨다. 당시의 무굴 제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황제 샤자한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건축물을 세우는데 공을 들임과 동시에 선대들이 행한 것처럼 정복전쟁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샤자한은 그의 아내인 뭄타즈 마할을 매우 사랑했다. 전장까지도 따라다니며 항상 샤자한의 곁을 지키던 그녀가 전장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뭄타즈 마할은 유언으로 자신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을 세워 달라는 것과 재혼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샤자한은 그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연인원 2만 명이 20여 년에 걸쳐 만든 '타지마할(선택받은 자의 거처)'을 건설하고 재혼하지 않는다.
 샤자한의 노후는 끔찍함의 연속이었다. 막내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왕위 찬탈을 위해 형제를 숙청하고 황제인 샤자한을 감금했다. 무력으로 왕위를 계승한 후 피의 숙청을 이어갔고 샤자한 또한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1658년 아우랑제브는 왕위에 등극하면서 샤자한을 아그라 성에 가두었고 형제와 사촌형제를 제거해 정적의 수를 줄였다. 선대가 겪은 고통처럼 아우랑제브 또한 자식들의 반란을 겪기도 했지만 바로 진압한 후 자식들을 옥에 가둔다.
 왕좌에 다가선 과정과 왕좌를 차지한 직후 모습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우랑제브 황제의 재임 초기는 민생 안정에 애를 쓰는 애민 군주였다. 아우랑제브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사 지휘자였고, 그의 통치 시절의 무굴 제국은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무렵의 영토에 버금가는 넓은 영토와 1억 5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자랑했다. 1690년 제국의 GDP는 약 4천 5백억 원으로 세계 1위였으며 당시의 조세 수입은 같은 시기 프랑스의 열 배가 넘었다.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근검절약하고 금욕적인 삶을 실천했다. 금주령을 선포하고 힌두교도에 대한 인두세를 추징하는 한편 노래와 악기 연주를 금지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이슬람 신앙에 몰두한 덕에 주변 사람들은 떠나갔고 결국 아우랑제브는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의 후반기 인생은 자식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인도 대륙의 남부 원정에 허비되었다. 무려 26년을 수도를 떠나 전장의 막사에서 지내다 1707년 노환으로 일기를 마친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1526년 바부르부터 1707년까지 이어진 무굴 제국의 영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자한기르와 샤자한이 건축에 국고를 낭비했고 아우랑제브는 군사 원정에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무굴 제국의 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제국의 영향력과 영토도 축소되었다. 내란이 잦고 왕은 계속 바뀌었으며 왕권은 유명무실해 졌다. 설상가상으로 외세의 침입까지 겪으며 무굴 제국은 패망의 길로 향한다. 힘겹게 명맥만 유지하며 버티던 무굴 제국은 바하두르 샤 자파르 왕을 끝으로 1857년 막을 내린다.





 생소했던 무굴제국의 역사를 읽으며 제국과 황제의 흥망성쇠를 보게 됐고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인도 역사가 주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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