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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실푸른산국
김영범 지음 / 고두미 / 2025년 11월
평점 :
김영범 시인의 아내 탁영주는 시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인데, 대표곡이 <연필 깎는 남자>이다.
반듯하게 비질을 끝낸
눈밭처럼 하얀 사각의 정원
마당을 가로질러 선을 긋는 그 남자
언제나 평행이 되도록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다른 하나가 저 혼자 멀어지지 않도록
뭉툭하게 깎은 몽당연필 선 긋는 소리
찬 눈 속을 뚫고 나온 복수초를 그려 넣고
보도블록 작은 틈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그려 넣고
눈물 많은 물봉선을 그려 넣는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을 그리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이들을 그리고
당당하지만 여리디여린 그녀를 그려 넣는다.
한밤 잠 못 들고 질주하는 자동차 경적을
새벽녘 현관 앞 신문 놓이는 소리를
아침 안개를 뚫고 출근하는 발소리를 그려 넣는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소리를 모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음표료 만든 그녀의 집,
방 한 칸 세 들어
연필을 깎는 남자
<연필 깎는 남자>
공연 무대에 오를 때마다 불렀으니 꽤 오랫동안 그는 이웃의 사람들과 소리들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깎는 남자였다. 김영범 시인을 그대로 말해주는 시라 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이어도 좋았겠지만 <까실푸른산국>이란 제목을 달고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으로 나왔다. 그간 갈아 엎은 시가 얼마였을지 알 것이다. 그러니 발문을 쓴 정민 시인의 첫 마디가 "영범은 순후醇厚하다. 진하고 맑고 도타운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두 번째 시집이 흙의 자식이자 고향 말로 다시 돌아가 이룬 시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똥 퍼먹고 자란
흙의 자식이다.
이 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누던 똥이다.
똥 푸는 날이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똥 냄새에
온 동네 흙들이 몸살을 앓았다.
감나무에서 떨어진 손주에게
맑게 거른 똥물을 퍼주던
할머니의 할머니 똥이다.
내가 태어난 똥수깐은
헛간이기도 해서
망태기며, 쟁기며, 호미가 가득하여
봄날이면 부산히도 드나들었다.
지렁이, 땅강아지와 사촌인 나는
봄만 되면 아랫도리가 헐거워져
맨엉덩이 내밀고 흙고랑을 뛰어다니고 싶은
흙의 자식이다.
<흙의 자식>
도시로 이사 와서 시인이자 예술 단체의 사무국장이라는 박봉 아래 살면서 시를 써 온 그가 가야 할 자리는 '흙의 자식'이자 '맑게 거른 똥물'로 치유한 시의 근간이기도 한 '웃덕디' 사람인 것이다. 웃덕디는 아랫덕디, 화칭이, 중리, 도명골, 안티, 풍계골, 후잉이 같은 마을과 똥수깐 옆 살구나무를 기억하는 곳이다. 웃덕디에서 태어난 그는 돌잽이로 '낫'을 들었다고 할 만큼 '일하는 아이'로 자란 고향 이야기에 가깝다. 농삿꾼이 천업이었겠지만 그 또한 '고요함도 사라져/고요하리라'는 웃덕디를 떠나 왔기에 그곳에 남아 농사를 짓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내가 시인이 될 줄 아셨냐"고 뒤늦은 안부를 전한다. 15년 만에 시집을 내며 그는 다시 '일하는 아이'에서 '연필 깎는 사람'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가장 큰 텃밭이자 들을 가진 사람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밤늦도록 사랑방엔 담배조리가 한창이었다.
모깃불이 어둠 속에 안개를 드리우고
오는 이 없는 동구 밖으로 개가 짖어댔다.
그때, 별들의 길을 본 적 있다.
가 본 적 없는 저편에서
끝 간 곳 없는 이편까지
하늘에 흩뿌린 유리알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봉숭아 꽃잎에 내려앉은 별 하나가
눈에 슬픔을
마음에 그리움을 넣어두었다.
내가 시인이 될 줄 알았을까.
그때, 그 여름밤을 환하게 밝히던 이들
별이 되어 하얗게 흘러간다.
<은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