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구의 북쪽이었다
우부순 지음 / 놀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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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말한다. 몸이 아프고 난 뒤 덤으로 사는 것 같다고. 아픈 몸으로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말이다. 긴 겨울을 보내고 상처 속에서 일어난 봄처럼 오고야 만 뒤에 시를 통해서 담담히 말하고 있다. 모든 사물과 연관된 것들 또한 그렇다는 것을, 그것이 오롯이 사랑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새로 산 식탁이 긁혔다

깊이 패여 물이 고인다

진짜 나의 것이 되었다

 

내가 준 상처는 고유한

너의 이름이고

나의 목소리에만 응답하여 열리는

길이 된다

 

피 흘리고 눈물 흘리고

한 세월 벽처럼 세상을 등졌을

그러다 딱지를 벗고

다시 피가 통하는 맨살을 펼친 자리

 

너에게로 부단히 돌아갈 근거이고

다시 시작점이라는 기호

 

사랑은

함께 새긴 몸의 문장을

짐승의 혀로 읽어내는 것

 

우부순, <사랑> 전문

 

 '짐승의 혀로 읽어내'는 것이란 마무리에서 격하게 느껴지듯 그는 몸의 문장이자 근거이자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야 '사랑'을 어렵게 꺼내들었다. 절반의 시들이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사유하는 몸의 문장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 첫 시집을 낸 기쁨이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이제 내려놓고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먼 다짐이어서 뜻깊다 할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한 마리의 오리가 되는 것

 

물을 헤치며

물길을 만드는 것

 

곧바로 사라질 길이더라도

온몸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우부순, <오리에게 배우다>

 

 그 길은 섣부르게 돌에 새기거나 하는 맹세가 아니다. 물 위에 쓴 시다. 오리가 그렇듯이 온몸으로 그렇게 지나갈 뿐, 곧 지워지는 몸의 길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두 편의 시가 첫 시집을 빛내주었고 그 다음은 다시 그보다 힘든 길이겠지만 기꺼이 감수하고 만들어낼 것을 알기에 '젊은 지구의 북쪽'을 읽는 기쁨이 있다.

 

사랑은 함께 새긴 몸의 문장을 짐승의 혀로 읽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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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됩니다. 젊은 지구의 북쪽이었다

이종수 2020-09-1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세상의 모든 B에게
김영빈 지음 / 놀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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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빈 시인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사진 시집을 펼치는 순간 페이지마다 내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만큼 낯익다. 전에는 사진기를 들고 일부러 찍고 다니는 풍경이 이제는 간편하게 휴대폰으로 들어왔기에 시인이 곳곳을 쏘다니며 찾아낸 순간들이 내 것인 것만 같다. 최강의 화소를 자랑하는 눈이 있지만 굳이 사진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독자들의 손목을 잡아 끄는 권유의 것이기도 하다. 제발 바쁜 발길 멈추어서서 바라보라고, 생각하라고 말하는, 그러나 긴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짧은 갈피이니 스스로 느껴보시라, 하고 말해주는 사진 시집.

 제목부터가 과감하다. 어찌 들으면 <세상의 모든 을에게>로 들릴 수 있으나 착각이 오히려 배부를 수 있으니 감안하고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다. 2등이든 B학점이든 자연이 가리키는 기호를 찾아가다 보면 세상살이에 여유가 생기리라.

 

"나무들의 나이테처럼 나를 휘감고 도는 시간을 햇살과 빗물과 바람의 언어로 기록해 두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대로 언제든 작정하고 떠나면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B들. 계절, 꽃과 나무, 그림자, 저녁과 새벽의 말들로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나무들의 나이테처럼 나를 휘감고 도는 시간을 햇살과 빗물과 바람의 언어로 기록해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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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옮기는 바람 - 청풍명월의 심상지도
김덕근 지음 / 놀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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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어오는 풍경, 청풍명월 고장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만의 장소를 만들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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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옮기는 바람 - 청풍명월의 심상지도
김덕근 지음 / 놀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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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건네는 언어를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깃든 시인들의 언어를 찾아 읽고, 내 방식으로 응답하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서문 중에서)

물길을 고갯길을 오르내리던 배와 사람들은 사라지고 나루터에 흐드러지던 주막과 장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지만 그곳을 스쳐 간 사람들의 시와 말을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 믿는 시인은 자신만의 응답 방식으로 책을 엮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연재로 시작하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일이지만 지도 위에 깃발을 꽂듯 총 4장으로 나누어 충북의 대표적인 심상 공간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장소에 담긴 이야기가 아니다. 끝없이 사람을 부르고 다녀가게 하는 그곳만의 장소성을 바탕으로 길 위에서 날것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오래된 부도 하나, 강가의 바위 하나, 고갯길의 나무 한 그루마저 기억의 다른 이름이어서 우리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인의 시선으로 말하고 있다. “좌정해 있는 산에서 강물을 가로질러 내려와 순풍의 청량함을 선물”하는 청풍淸風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책과 함께 누구라도 길을 나서면 시인묵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장에서는 ‘길 위의 숨결’이란 소제목으로 제천의 청풍루와 보은 회인의 인산객사, 영동의 월류봉과 가학루, 제천 박달재를, 2장에서는 ‘머무는 공존’으로 하여 음성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충주 하늘재의 미륵대원지 석조여래입상, 청주 육거리시장에 묻힌 남석교, 구곡의 나라 괴산을 둘러보고, 3장에서는 ‘바람의 경전’ 아래 단양 도담삼봉을 거쳐 진천 두타산 영수사 영산회괴불탱을 우러르고, 청주 탑동의 양관과 괴산 연풍의 마애이불병좌상을 만난다. 4장에서는 ‘느린 기다림’ 아래 충주 목계나루 가흥창, 문의의 문산관,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탑비를 들렀다가 옥천 용암사의 동서 삼층석탑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시인은 대장정의 길목에서 지치지 않는 전기수傳奇?처럼 해박한 역사 지식과 아울러 손을 들어 가리키듯 곳곳의 장소에서 유념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있다. 시인의 서정 어린 언어에 잡히지 않고 자기만의 이야기로 써가야 할 노정기路程記를 완성하도록 돕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충북의 심상지리라는 소제목 아래 ‘그림자를 옮기는 바람’ 이야기를 들려주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만큼 책을 들고 꼭 가봐야 할 곳이다. 한 번에 가기보다 길을 내고 물길을 가던 옛사람들의 심정이 되어 대화하며 가야 할 것이다. 과거와 오늘을 그림자처럼 옮기는 바람을 느껴본다면 또 다른 심상지리를 발견하게 될 테고 어느새 자기만의 이야기로 새로운 장소를 개척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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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실푸른산국
김영범 지음 / 고두미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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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시인의 아내 탁영주는 시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인데, 대표곡이 <연필 깎는 남자>이다. 


반듯하게 비질을 끝낸

눈밭처럼 하얀 사각의 정원

마당을 가로질러 선을 긋는 그 남자

언제나 평행이 되도록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다른 하나가 저 혼자 멀어지지 않도록

뭉툭하게 깎은 몽당연필 선 긋는 소리


찬 눈 속을 뚫고 나온 복수초를 그려 넣고

보도블록 작은 틈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그려 넣고

눈물 많은 물봉선을 그려 넣는다.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을 그리고

세상의 모순과 싸우는 이들을 그리고

당당하지만 여리디여린 그녀를 그려 넣는다.

한밤 잠 못 들고 질주하는 자동차 경적을

새벽녘 현관 앞 신문 놓이는 소리를

아침 안개를 뚫고 출근하는 발소리를 그려 넣는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소리를 모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음표료 만든 그녀의 집,

방 한 칸 세 들어

연필을 깎는 남자


<연필 깎는 남자>


 공연 무대에 오를 때마다 불렀으니 꽤 오랫동안 그는 이웃의 사람들과 소리들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깎는 남자였다. 김영범 시인을 그대로 말해주는 시라 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이어도 좋았겠지만 <까실푸른산국>이란 제목을 달고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으로 나왔다. 그간 갈아 엎은 시가 얼마였을지 알 것이다. 그러니 발문을 쓴 정민 시인의 첫 마디가 "영범은 순후醇厚하다. 진하고 맑고 도타운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두 번째 시집이 흙의 자식이자 고향 말로 다시 돌아가 이룬 시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똥 퍼먹고 자란

흙의 자식이다.

이 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누던 똥이다.

똥 푸는 날이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똥 냄새에

온 동네 흙들이 몸살을 앓았다.

감나무에서 떨어진 손주에게

맑게 거른 똥물을 퍼주던

할머니의 할머니 똥이다.

내가 태어난 똥수깐은 

헛간이기도 해서

망태기며, 쟁기며, 호미가 가득하여

봄날이면 부산히도 드나들었다.

지렁이, 땅강아지와 사촌인 나는

봄만 되면 아랫도리가 헐거워져

맨엉덩이 내밀고 흙고랑을 뛰어다니고 싶은 

흙의 자식이다.


<흙의 자식>


 도시로 이사 와서 시인이자 예술 단체의 사무국장이라는 박봉 아래 살면서 시를 써 온 그가 가야 할 자리는 '흙의 자식'이자 '맑게 거른 똥물'로 치유한 시의 근간이기도 한 '웃덕디' 사람인 것이다. 웃덕디는 아랫덕디, 화칭이, 중리, 도명골, 안티, 풍계골, 후잉이 같은 마을과 똥수깐 옆 살구나무를 기억하는 곳이다. 웃덕디에서 태어난 그는 돌잽이로 '낫'을 들었다고 할 만큼 '일하는 아이'로 자란 고향 이야기에 가깝다. 농삿꾼이 천업이었겠지만 그 또한  '고요함도 사라져/고요하리라'는 웃덕디를 떠나 왔기에 그곳에 남아 농사를 짓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내가 시인이 될 줄 아셨냐"고 뒤늦은 안부를 전한다. 15년 만에 시집을 내며 그는 다시 '일하는 아이'에서 '연필 깎는 사람'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가장 큰 텃밭이자 들을 가진 사람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밤늦도록 사랑방엔 담배조리가 한창이었다.

모깃불이 어둠 속에 안개를 드리우고

오는 이 없는 동구 밖으로 개가 짖어댔다.


그때, 별들의 길을 본 적 있다.

가 본 적 없는 저편에서

끝 간 곳 없는 이편까지

하늘에 흩뿌린 유리알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봉숭아 꽃잎에 내려앉은 별 하나가

눈에 슬픔을

마음에 그리움을 넣어두었다.


내가 시인이 될 줄 알았을까.

그때, 그 여름밤을 환하게 밝히던 이들

별이 되어 하얗게 흘러간다.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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