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재들의 실패
로저 로웬스타인 지음, 이승욱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LTCM이라는 단어를 읽고 이거 무슨 암호야? 한다면 경제학, 경영학 분야 전공자가 아닐 것이다. 반면 LTCM을 한때 월스트리트를 주름잡았으나 폭삭 망해버린 헤지펀드 명으로 기억한다면 최소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LTCM(Long-Term Capital Management)는 1990년대 중반 월스트리트에 혜성같이 나타나 수년간 업계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나 러시아와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터지던 시기 무리한 차입투자를 일삼다 한 순간에 망해버린 헤지펀드다. 헤지펀드는 일반 뮤추얼펀드 등과 달리 소수의 고액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위험하나 수익성이 뛰어난 주식, 채권, 특히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신탁이다. 고위험 고수익을 쫓고 수익률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원금의 수배 많게는 수십배에 달하는 자금을 차입해 공격적인 투자를 일삼기에 흥할땐 더할 나위 없이 흥하나 망할 땐 믿기 힘들 정도로 한 순간에 나락 끝까지 떨어진다. 현재까지 운영되는 가장 유명한 헤지펀드는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펀드다. 그러나 과거(1990년대)를 포함한다면, 가장 유명하고 화려했으며 더 이상 오를 곳 없이 비상하다 정말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린, 헤지펀드의 장점과 단점, 흥망성쇠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펀드는 단언컨데 LTCM이다. LTCM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양초날개가 녹아 추락해버린 이카루스와 닮았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 살로먼에는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투자자 존 메리웨더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채권투자부서를 진두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 곳은 그와 그가 고용한 우수한 인재들이 살로먼의 수익 대부분을 벌어주고 있던 핵심부서였다. 그러나 메리웨더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최고 경영진 진입을 눈앞에 둔 순간 본인과 별로 관련없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회사에 복귀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오랜 기간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헤지펀드를 직접 만들게 되는데 그게 바로 LTCM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월스트리트라는 과학, 수학보다 펀드매니저들의 직감에 의한 투자가 대세를 이루던 곳이었다. 그런 게임장에 메리웨더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가지고 참가했다. 그것은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투자형태로, 최대한의 데이터를 긁어모아 정교한 수학공식을 통해 철저히 분석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투자 리스크를 최소화, 심지어는 없애버리려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 금융경제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두 원칙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그 어떤 펀드보다 이 두 가지를 철저히 따랐다. 또한, 이런 류의 스타일로 펀드를 운여하기 위해선 해당분야 전문가가 필요했기에 수학자들을 위시로 한 많은 인재들을 영입했다. 그가 모은 대표적인 인재로는 하버드대학 교수 로센펠드, 런던 대학 재정학 석사 학위자 빅터 하가니, MIT 금융경제학 박사학위자 그레고리 호킨스, MIT 경제학 박사학위자 윌리엄 크래스커, MIT에서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로렌스 힐리브랜드, 하버드 교수 로버트 머턴, 저 유명한 블랙-숄스 옵션가격결정모형을 만들어낸 노벨상수상자 마이런 숄스,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다음가는 제2인자 데이비드 뮬린스가 있다. 이런 먹물들을(그러나 지나치게 똑똑하며 화려하고 유명한 두뇌들을) 거느리고 월스트리트에 나타난 메리웨더의 LTCM은 곧 월스트리트를 장악해버렸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모든 채권의 과거 가격을 컴퓨터에 입력했고 그 가격들이 미래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모델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수년간 믿기지 않을 만큼의 수익을 거두며 월스트리의 존경과 시샘을 한몸에 받았다. 그들에게 실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고 그들의 예언은 곧 확신이자 현실이 되었으며 월스트리트 그 누구도 그런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던 한에서만큼은.
LTCM의 기본적인 채권투자전략은 채권가격의 스프레드를 이용해 저위험 혹은 무위험 차익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스프레드 범위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모델을 고안했다. 이 범위라는 것이 소숫점 이하일 정도로 차이가 미비했지만 해결방안은 있었다. 최대한의 차입을 통해 레버리지를 (가급적 무한히) 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위험성이 적고 수익 또한 적은 투자라 하더라도 워낙 투자단위가 크다 보니 막대한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그들은 그 방식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자 배부른 문제가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유명세였고 그로 인한 투자금액이었다. 시장에 뛰어 들었던 초창기를 지나 펀드가 업계 전체 NO.1이 되어 유명해진 뒤로 막대한 투자액이 펀드에 몰려들었다. 기존의 투자액과 수익, 신규 투자액, 차입액을 더하니 LTCM이 투자해야 할 자본은 100조원이 넘어버렸다.(1990년대에!!). 그런데 시장의 크기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자신만만해 하던 채권시장은 점점 건져먹을 수 있는 파이조각이 줄어들고 있었다. 수익을 낼 곳은 점점 사라져가나 유명했던 만큼이나 수익률이 중요했던 그들은 조금씩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잘 알지 못하던 주식시장, 파생상품 시장에까지 무리하게 뛰어든 것이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그들이 성경처럼 맹신하던 리스크최소화 수학모델이 채권시장 외에도 충분히 먹혀들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오산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입력된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었는데 그 채권가격결정모델은 주식과 기타 파생상품엔 먹혀들지 않았다. (어쩌면 운이 좋았을 뿐, 종국에는 채권시장에서도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과거를 통한 미래 예측이 늘 맞을거라는 믿음은 황당한 이론일 뿐이니까.) 그리고 1997년, 우리에게도 IMF로 잘 알려져 있는 최악의 아시아 금융위기에 LTCM은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댓가를 톡톡히 치뤘다. 그들의 모든 투자는 죄다 실패해버렸고 100조원이 넘던 자본금이 불과 몇 달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LTCM의 부도는 월스트리트를 넘어 전세계 금융시장을 휘청이게 만들었으며 골드만 삭스, 멜릴린치, JP모건, 리먼브라더스, 모건스탠리 등 전세계 금융시장을 손에 넣고 흔들어대던 거대 공룡 은행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갈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화려했던 영광을 뒤로 한 채, 월스트리트의 온갖 비난과 조롱을 감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책 <천재들의 실패>는 LTCM을 운영했던 존 메리웨더 외 하버드, MIT, 연방준비위원회 출신들의 성공과 실패를 적나라하게 풀어헤친 책이다. <천재들의 실패>는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긴장감을 늦출 수 없도록 정리해놓은 탓에 정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게 된다. 마치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 경험해버린 기분이다. 워낙 재미있게 잘 적은 글이라 금융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