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175.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처음에 그를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는 괴짜흉내를 내는 교수가 아닌가 했다. 평범한(?)외모를 감추기 위해 머리스타일을 의식적으로 튀게 하고 말을 재미나게 하는 그런 사람말이다. 그런데 그의 책이 내 책장에 두 권정도 꽂히고 그가 안정적인 교수직을 내던지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괴짜흉내의 흉내라는 인식을 버렸다. 그는 괴짜다. 괴짜 지식인이며 화가다.
그런데 이번 책은 그의 괴짜스러움이 그리 강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책을 읽다보면 툭툭 튀어나오는 모습을 아직도 볼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먹어서인지 그런 면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외로운 섬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바다를 보며 세월을 보내니 감수성이 더 풍부해져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책제목부터 그렇다. 너무 길고 임팩트가 없다. 물론 내용은 그렇지 않다. 자기 존재감은 역시 돋보인다. 독일에서 유학한 티를 꼭 낸다. 슈필라움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내용은 절대 그렇지 않다. 슈필라움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괜시리 한국어로 번역할 필요를 못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 책에 빠져든다.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저자는 압축성장과 주거문화의 변화로 인한 남성들의 슈필라움의 부재 현상을 단적으로 운전만 하면 양보를 하지 않는 문화를 예를 삼았다. 유일한 슈필라움이 된 운전석에서 내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본 것이다. 난 그렇지 않던데 공간이 좀 커서 그런가?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강요다.
훔쳐보기는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소통 거부의 집단적 자폐 증상이다.
훔쳐보기는 함께보기가 어려울 때 흥행한다.
그는 글을 참 잘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기본적으로 지식이 많이 올라가 있다. 거기에 유머와 위트가 잘 버무려져 있다. 여기에 가끔 스스로에 대한 구라도 좀 더해지기도 하고 삶의 성찰과 감성 그리고 비꼼이 항상 옆에 놓여져 있다. 그래서 재미있다. 이 책이 그러하다. 제목이 길고 잘 외워지지 않는 것만 제외하고는.
폐차 수준의 배를 산 이야기를 담은 <배에서 해 봤어요> 편이나 이제 50줄이 넘어 저자의 말처럼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친구들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면 저자의 위트 넘치는 삶을 엿본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적어내고 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물때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살다 보면 물때와 같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이 들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다.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가 당연히 있다. 이 물때와 같은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조급함이다. 항상 잘되어야 하고 안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조급함 때문에 참 많은 이가 불행해진다.
이제 삶에서 위뿐만 아니라 옆과 아래가 보이는 현실에 처한 내게 곰곰이 생각을 많이 던져주는 글이었다. 시간이라는 조급함과 계속 싸우고만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내 삶에 물음을 던졌다. 물론 저자처럼 만들어놓은 것도 천착하는 것도 없는 하루살이처지지만 그래도 이 글을 보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
인생이 자주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해있다.
열등감에 관한 이야기를 유대인 민족의 예를 결부시켜 우리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어떤 유대인은 결국 히틀러를 도와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고 어떤 유대인은 시오니즘을 주창하며 오늘날에 이르렀고 또 어떤 유대인은 평화로운 유대인으로 살고 있다.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양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적을 만드는 행위를 가장 게으른 행위라고 규정한다. 내면의 성찰을 통해 평화로운 유대인이 되어 그들의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간단하지만 멋지다. 이제 각자의 리스트를 만들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해보자.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하도록 실천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 김정운 교수의 이야기가 참 그럴 듯 하게 들리지 않는가?
리스펙트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다. 한국에서는 보통 존경, 존중의 의미로 쓰여졌다. 존경과 존중은 보통 상하 관계를 담고 있다. 그러나 독일어의 리스펙트는 보다 수평적인 상호존중의 관계다. 가족관계에서 그리고 나아가 삶의 인간관계에서 리스펙트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아무에게나 리스펙트한 존재인지 생각해본다.
저자는 지금 여수라는 곳에 있다. 왜 여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장소로 여수를 택했다는게 중요하다. 그는 여수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많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미역창고를 개조해 자신의 美力創考를 만드는 모습도 부럽다.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면 늙지 않으려는 몸부림같기도 하고 역시 그답다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그의 사유와 시선이 부럽다. 불안한 인간들의 나쁜 이야기나 민족에 관한 이야기편을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한 번쯤 나의 생각을 고쳐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A와 B가 아닌 다른 선택지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가 보는 시선은 남다르다.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그가 공부한 지식, 그가 경험한 공간, 기억 그리고 그의 유머가 곁들어진 시선이 책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참 기분이 좋아졌다.
지루함이 없었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렇다.
이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그냥 재미있다고 하면 억울하다. 그의 심리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지식이 기본이고 그것을 단어만 제외한다면 그리 현학적으로 보이지도 않게 잘 녹여놓았다. 여기에 그의 그림과 멋진 사진들이 가끔 눈을 호강시켜준다. 그리고 그의 유머와 위트가 책을 읽는 시간을 녹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