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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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떠올리면 푸름이 잇따른다. 멀리 있는 산, 거리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과 바다, 그 너머의 수평선과 지평선에 펼쳐져 있다가 다가갈수록 뒤로 물러나서 투명하게 사라지는 푸름, 손안에 쥘 수 없는 푸름에서 작가는 청춘, 성장, 상실, 슬픔, 우울, 비밀, 고독을 읽고 어루만진다.

작가는 우연히 보게 된 그림이나 책 속 문장이 곧바로 뿌리내리지는 않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순간을 언급한다. 몇백 년 전, 수십 년 전 작품이 나에게 닿고, 그 작품이 만든 파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은 언젠가 생길 변화를 품고 있다. 예술 작품은 당장에 마음을 반짝반짝 비추지 않더라도 가만히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의 눈길이 머무는 방향을 바꾼다. 예술이 주는 이런 은은함과 은근함이 좋다.

책을 읽고 나니, 제사(題詞, epigraph)로 쓴 폴 발레리의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우리 신체의 일부인 피부는 내면과 외부 세계의 경계이면서 다양한 경험과 감성을 연결한다. 내면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 타인이 그것을 인식하는 시선과 방식을 통해 본질을 찾아간다. 이 책에 실린 예술가와 작품(내면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변화한다. 작품에 담긴 인생 이야기, 그 작품과 관련한 작가의 경험담을 읽으며, 예술가와 그들의 남긴 피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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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에 쓱싹 편의점 과학 - 삼각김밥부터 계산대까지, 세상 모든 물건의 과학 곰곰문고 18
이창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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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양한 물건이 진열된 편의점으로 범위를 좁히고, 주요 제품의 역사와 트렌드를 살펴본다. 편의점으로 범위를 좁혔다지만, 사실상 빅데이터에 의해 선별된 물건을 판매하기 때문에 넓게 보면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을 반영하는 장소가 바로 편의점이기도 하다.

동네 곳곳마다 자리 잡은 편의점은 현대판 동네 구멍가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다만 어릴 적 쭈쭈바나 새우깡을 사 먹으러 드나들던 동네 구멍가게는 주인아주머니가 기억에 의존한 데이터로 단골의 취향을 파악했다면, 편의점은 포스에 남은 고객의 구매 이력을 통해 고객의 취향, 주로 방문하는 시간, 심지어는 건강 상태까지도 파악한다. 우리는 소비 행위 하나하나가 거대 편의점 업계의 빅데이터로 남아 분석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빅데이터가 마케팅 전략으로 이어지고, 편의점 산업이 성장을 이어가는 동력이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한 식품과 기술을 읽다 보면 새롭고 재미난 정보를 얻는 즐거움이 있다. 현대인이 주로 먹고 쓰는 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역사적인 정보를 알고, 어떻게 선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지 경제적인 원리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리고 최종소비자로서 내가 누리는 편리함 이면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환경 문제와 공정 무역을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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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릿속 하루 - 오늘 나의 감정, 생각, 행동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실비 쇼크롱 지음, 윤미연 옮김 / 7분의언덕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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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와 2부로 나누어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1부는 커리어우먼 안나의 일상을 따라가며 하루 동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스토리 위주로 쓰고, 2부는 1부의 흐름에 따라 뇌과학 관점에서 조금 더 깊숙이 다룬다. 1부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과학 논문의 주제를 알기 쉽게 소개하였고, 관심 분야를 더 알아보려면 이 인용 논문을 활용할 수 있다.

현대 도시인의 하루 일상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많다. 마치 나 자신과 주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인상이나 감정에 치우친 글이라기보다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앞으로 더 나은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과학 지식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전달하는 저자의 시도가 인상적이다.

실비쇼크롱, 신경과학, 뇌, 신경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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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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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소녀들의 숲』(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미디어창비)은 140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 허주은은 '공녀(貢女)'로 살던 여성들에 대해 쓰고 싶었으며, 1337년에 고려시대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의 인상적인 대목에서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가 태어났다.

우선 표지와 엽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살펴보면, 미국 출판사와 한국어 번역본이 서로 다른 분위기다. 미국 출판사의 표지는 꽃에 둘러싸인 두 여성을 표현했고, 한국어 번역본에는 숲에서 어디론가 바라보거나 향하는 조선 여성 두 명을 그렸다. 초가집과 구절초가 보이고 둥근 보름달이 환하다.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원서 표지에 비해 번역본 표지가 조금 더 선명하게 내용을 담았다. 표지가 상징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스토리로 풀어질지, 책을 읽고 나면 어떤 표지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궁금해진다.


   여성은 인류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지만, 이들에 관한 기록은 적다. 기껏해야 역사의 조연으로 대하던 여성의 역사, 특히 아픈 역사로 기억하는 '공녀'를 소재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기대하며 책을 펼친다. 허주은 작가는 역사의 기본 사료(史料) 중에서 역사의 조연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설에는 다양한 계급과 장소가 등장하는데, 이 중에서 주축은 '여성'과 '제주'이다. 조선시대 역사의 약자로 대우받던 여성이라는 젠더성, 제주라는 장소성을 중심으로 공녀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소설은 육지에서 제주로, 외곽에서 마을 속으로, 깊은 숲속으로 점차 공간적 범위를 좁히고, 여자아이들의 실종과 살인 사건에 서서히 돋보기를 갖다 댄다. 전반부는 조금 느린 속도이지만, 독자도 그 속도에 맞추어 주변을 파악하고 장소와 인물에 몰입해간다.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기 전에 단서가 될 만한 세부 사항과 인물의 성격에 집중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를 의심하게 하는 구성이 매력적이다. 책장을 넘기며 숲으로 한 발짝 내딛고 진실과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고 숨어 있는 위험에 오스스 소름 돋는 두려움과 맞닥뜨린다.

제주라는 장소성도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독자는 여러 등장인물의 시선과 입장을 따라 제주의 땅을 밟고 집을 방문하고 숲으로 들어가고 제주 사람을 만나며 그곳 문화를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문화와 단서 사이를 넘나든다. 작가는 제주를 직접 찾아서 조선 시대 제주에 유배된 사람들의 서신을 발견하여 소설의 자료로 썼다. 

   주인공 환이의 의심과 추리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 하지만, 작은 단서로 이리저리 추리하는 과정이 더 복잡한 미스터리 요인이 되어 흥미진진하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며, 가장 확실해 보이는 용의자가 늘 가해자인 것은 아니고 절대적인 가해자는 없다는 사실, 사랑의 의도와 결과의 경계가 어긋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등장인물의 관계와 경계에서 이런 발견을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이 역사 추리를 넘어 가족—자매지간, 부녀지간—의 갈등, 유대감과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의 또 다른 주요 축은 여성의 젠더성이다. 공녀라는 실제 사건에 기반하는 이 소설은 국가의 힘, 성별과 계급 차이, 경제력 차이 등에 따라 당시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두려움, 치욕을 담았다.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차별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는 호기심과 의지가 가득한 환이, 고집 세고 자립적인 매월이는 고군분투하면서도 서로 하나가 되어 영리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독자는 소설 속 댕기 머리 탐정이 되어, 민환이와 민매월 자매의 여정을 따라가며 함께 저항하고, 변화를 꿈꾼다.


#사라진소녀들의숲, #허주은, #미디어창비, #역사소설,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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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시민 - 시민으로 당당하게 늙어가기 선배시민 라이브러리
유범상.유해숙 지음 / 마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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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No人, Know人, 액티브 시니어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의 노인상을 잘 드러낸다. 각 개념에 맞춤한 듯한 주변의 어르신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계층의 노인이 함께 산다.

   우선 공동 저자는 '분리 이론'을 언급하며, 인간은 나이 듦에 따라 경제적·심리적·사회적 측면에서 분리가 일어나고, 그중 핵심은 경제적 분리라고 짚었다. 쓸모없고 돌봄의 대상이며 불통의 존재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No人'에서부터 지혜로움의 상징인 'Know人',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액티브 시니어'에 이르기까지 노인 삶의 질은 경제적 측면과 깊이 관계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분위기는 노인 삶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입장을 합리화하고 공적 책임을 약화할 우려가 있다.

공동 저자는 시민권 이론을 토대로, 국가가 시민의 삶을 책임져야 하며, 노인도 시민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선배시민'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선배시민이란 시민으로서의 노인, 인간으로서의 노인, 선배로서의 노인을 아우른다. 시민권이 당연한 권리임을 자각하고,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체와 참여하여 후배시민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노인이 '선배시민'이다. 마음가짐과 행동, 호모 폴리티쿠스라는 존재감이 변화하면, 시민성에 따라 늙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바뀌고,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새롭게 만들고 노년이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 사회적인 기반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실천하는 선배시민의 활동을 소개하고, 노인이 공동체와 연대하여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사회를 바꿔 가는 사례를 보여준다.

   '시민의 집'이란 모든 시민이 한 집안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모두 하나로 연결된 이 사회가 연대하여 노인 문제에 주목해야 하며, 선배시민인 노인은 자신과 후배 시민들의 안녕과 공동체의 이익을 고민해야 한다. 책과 관련한 기사를 검색해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시민교육, 토론과 실천을 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선배시민'이라는 개념이 확산하는 사례를 알 수 있다. 노인이 선배시민임을 자각하고, 후배시민이 함께 공동체에 참가하고 성찰하며 더 나은 사회를 모색하고 있다. 책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선배시민과 후배시민이 손을 맞잡은 시민 잇기, 함께하는 공동체 연대를 기대해본다.

No人, Know人, 액티브시니어, 선배시민, 인간, 늙음_자유와죽음, 시민의집, 시민권, 공동체, 주체적인삶, 시민잇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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