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돼지의 간은 가열해라 3 - Shift Novel
사카이 타쿠마 지음, 토사카 아사기 그림, 이경인 옮김 / YNK MEDIA(만화) / 2023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2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더라도. 3권을 한마디로 표현 하라면, 빌어먹을 동정은 훈제나 되어 버려라. 1권에서 제스는 시할아버지(국왕)에 의해 기억이 봉인되었고, 2권에서 오작교의 견우와 직녀처럼 돼지(주인공)는 제스(메인 히로인)와 다시 만났지만 너 님 누구세요?인 상황을 가슴 아파할 겨를도 없이 전란에 휘말려야 했었습니다. 암약하는 술사(이하 불사자)에 의해 저주받은 시할아버지는 비명횡사, 돼지도 제스를 감싸고 저주를 받아 죽어가던 상황에서 봉인된 기억을 되찾았던 제스.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했던(2권에서 전란) 둘의 관계는 앞으로 장밋빛 인생만 있을 것인가. 있어야겠죠. 근데 돼지가 지구에 귀환해 있는 동안 제스는 왕자와 약혼한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죽음조차 둘의 사이를 가르지 못했는데 그깟 약혼이 대수겠습니까. 3권에서 뭔가 남자들끼리 피 터지는 싸움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더니 왕자도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본 동정 소년. 돼지가 돼지라서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남편(왕자) 보란 듯이 와이프가 돼지에게 사랑의 어필을 하고 있는데도 동정답게 말 한마디 못하는 쑥맥. 그런 어필을 받는 돼지는 여친이 다른 남자와 잘 되는 걸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며 응원해 주는 아싸 타입. 다들 나이 먹을 대로 먹어놓고 뭔 청춘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건지.
1권에서 돼지와 제스를 갈라 놓았던, 혼자서 몇 개의 나라를 쌈 싸 먹을 사상 최강의 마법사였던 국왕(제스 시할아버지)은 불사자에 의해 어이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제스에게 봉인된 기억을 풀 단서를 준 걸로 보아 국왕으로서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같은 자상한 면모를 보여 주었죠. 이번 3권에서 북부 반란군과의 전쟁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불사자의 위협은 여전했기에 그를 없애기 위한 단서를 모아갑니다. 불사자의 능력인 저주는 매우 성가셔서 막을 방도도 없고, 한번 맞으면 100% 죽음으로 몰고 가기에 마법사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었죠. 문제는 불사신이기에 보통의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왕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지보(보물 같은 거)를 모아 물리치기로 결정합니다만, 그전에 1권에서 돼지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던 이케맨 노트가 이끄는 예스마 해방군과의 연합 전선을 꾸리기로 합니다. 그러나 예스마를 노예나 다름없이 다루는 왕국과 그 예스마를 해방하기 위한 해방군은 절대 섞일 수가 없는 관계죠. 이걸 협상을 통해 융합해야 되는 임무가 돼지와 제스 그리고 왕자(제스 남편)에게 맡겨집니다. 사실 이건 엔딩까진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 겉절이 형식으로만 언급해 두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불사자를 죽일 방법을 찾는 것이고,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거든요.
사실 불사자를 없애는 건 과정일 뿐이고 진짜 이야기는 돼지와 제스의 관계를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제스는 자신의 기도로 이 세계에 와준 돼지가 고마웠고, 그와 여행하며 정이 들었고, 예스마 사냥꾼들에게서 목숨을 바쳐 지켜주는 그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돼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자신은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몸. 그녀의 마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죠. 돼지는 전이나 전생이 아닌, 뭐랄까 정신체만 이세계 돼지에 깃들어 있고, 본체는 지구에서 코마 상태에 있습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고, 국왕(제스 시할아버지)이 이때다 싶으면 지구로 돌아가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겨 두었던 점, 시기를 못 타면 영영 지구로 못 돌아갈 수 있다는 점, 원래 세계(지구)에 미련이 있다는 것, 돼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등이 주인공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 냉큼 돌아가 버리던가. 제스가 매번 마음을 부딪혀 오면 엉뚱한 말로 논점을 흐리는 통에 이 시키 훈제나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군요. 아닌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런 돼지를 보며 구워 버리겠다고 벼르는 중이기도 하고요(물론 다른 이유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부딪히는 제스에게서 한편으로는 의존증을, 한편으로는 측은함을 보았습니다.
맺으며: 사실 이 작품은 굉장히 시리어스합니다. 마법사 숫자를 줄이겠다고 태어나는 여자애들을 예스마라는 이름의 노예로 팔아버리는 왕국, 그 노예 소녀를 납치해 도륙해서 파는 사냥꾼들. 이번 3권에서도 인간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나 하는 걸 보여주죠. 예스마는 마법의 재료가 되어 비싼 값에 팔려가는 현실. 그냥 팔려가는 게 아니라 산 채로 조각조각. 이를 방관하는 왕국. 불사자는 수많은 예스마들을 사냥해서 그 신체 일부를 먹고 불사신이 되었죠. 이번 3권에서도 많은 예스마들이 희생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돼지와 제스는 그런 슬픈 세상이 없도록 행동에 나서죠. 그 결과 제스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탄생의 비밀을 알아 갑니다. 상황은 시할아버지가 죽고 시아버지가 차기 국왕이 되면서 상황이 좀 나아지나 했더니, 더 악화 일로(예스마들이 처한 상황)를 달려가는 등, 돼지와 제스의 앞날은 순탄치만은 않다는 메시지를 곳곳에서 던집니다. 돼지에게 더욱 의존해가는 제스가 우려스럽기도 하죠. 이젠 거의 막무가내가 되어 갑니다. 그럴수록 돼지는 도망가고요. 근데 도망가는 것도 그냥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내가 희생해서 다른 남자(왕자)와 잘 지내게 해주겠다는 식이라서 좀 꼴불견이기도 하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이로써 암약하는 술사 -불사자-편은 끝이 났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불사자를 통해 악이 누구이고 선이 누구인지 물음을 던진다는 것입니다(이전에도 던졌지만 이번엔 더욱 명확하게). 100년 전 마법사들에 의해 수천만명이 죽은 전쟁을 되풀이 않기 위해 태어나는 여자애들을 사지로 내몰아 마법사 숫자(예스마는 마법사)를 줄이려는 왕국은 정의인가, 그런 왕국은 멸하려 했던 불사자는 악인가. 현재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왕국에 지내는 돼지와 제스는 악에 동조하는 무리인가. 그러나 돼지와 제스의 행동은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엔딩에서 언급됩니다. 예스마들에게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죠. 돼지와 제스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옵니다(정확히는 돼지의 마음). 요기부터는 사족, 걸핏하면 색드립을 해대서 제스를 질리게 만들고, 그런 주제에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돼지. (제스를) 남이 가져가면 화를 내지만 내가 가지는 건 주저하는 돼지. 같이 목욕하는 사이면 끝난 거 아닌가? 지구에 미련이 있으면 가서 돌아오지 말던가, 제스가 마음을 부딪혀 오면 어쭙잖게 딴말하는 돼지는 발암이었습니다. 왜 자신(돼지)은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건가 하는 느낌을 들게 하죠. 제스도 의존증이 날로 심해져서 이러다 미저리 되는 거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군요.